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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인물39

[인천인물 100인] 44. '한강의 기적' 이끈 경제학자-신태환 박사 ▲ 서울대학교 총장시절 박정희 대통령과 만난 신태환 박사(사진 왼쪽). 인천에서 태어난 그는 걸출한 석학(碩學)이었다. 우리나라 경제학계의 '개척자'였고 1960년대 전쟁의 폐허속에서 한국경제를 앞에서 이끌어 간 '기적'과 신화의 '연출가'였다. 그는 수렁에 빠진 한국경제를 어떻게하면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을까에 대해 나라를 걱정하는 지성인들과 밤새워 토론하고 그 해법을 제시했던 '지도자'였다. 연세대 교수, 연세대 상대학장, 서울대 법대 교수, 서울대 행정대학원장, 건설부장관, 서울대 총장, 초대 국토통일원 장관, 학술원 회장, 한국경제 연구원장, 경제정책자문회의 위원장 등 그의 화려한 경력만 봐도 설명이 필요없는 인물. >44< 한국 경제학계 개척자 신태환박사 이런 그를 두고 경제학계 및 교육계에선.. 2006. 10. 14.
[인천인물 100인] 43. 장석우 "나라가 잘되려면 여자가 배워야 한다" 근대 여성교육 '희망' 일구다 ▲ 1940년 12월 부평동 현 경찰종합학교에서 진행된 소화고등여학교 교사 신축 기공식 장면. >43< 민족자본가 석계 장석우선생 선생이 지난 1940년 설립한 인천 소화고등여학교(현 인천 박문여자중·고등학교)는 당시 여성교육의 불모지나 다름없었던 인천에 희망의 씨앗을 뿌리는 일대 사건이었다. 당시 인천에는 인천공립고등여학교(현 인천여고)가 있었지만 일본인 자녀가 주로 다니고 한국인 학생은 불과 2~3명이 특별 입학하는 등 여성 교육의 불모지나 다름없었다. 선생의 1남 2녀중 막내 딸인 장보원(92·미국 LA거주)씨는 “평소 아버님께서는 우리나라가 잘 되려면 여성이 배워야 된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고 기억하고 있어 여학교를 설립하게된 배경을 짐작케 했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평소 장 선생은 나라를 잃은.. 2006. 10. 14.
[인천인물 100인] 42. 계몽가 강화석·강준 부자 [인천인물100人·42] 계몽가 강화석·강준 부자 개화기 근대문물 토착화 '신지식인' 김신태 기자 / 발행일 2006-03-02 제0면 >42< 계몽가 강화석·강준 부자 가톨릭 신자이자 관인의 신분으로 개항당시 인천지역사회에 깊이 관여하며 종교와 교육, 계몽운동을 활발히 펼친 강화석(세례명 요한). 그리고 그 아버지 밑에서 자연스럽게 천주교에 입문한 강준(세례명 바오로) 역시 신앙생활은 물론 교육사업에도 아버지의 뜻을 이어갔다. 하지만 강화석이 아들(강준 1910년 이주)을 따라 1917년 황해도 수안지방의 들무정으로 이주를 하게 되면서 인천을 떠나게 된다. 특히 관직에 있으면서 근대화된 문물을 받아들여 계몽가로도 활동한 강화석은 당시 보기 드문 신지식인중 한사람으로 손꼽아도 손색이 없다는 평가다. 19.. 2006. 10. 14.
[인물 41] 父 한남철 "본인은 소설 쓰지않는 대신 어머님께 조언등 집필 도와" “아버님과 친분을 쌓으셨던 주위분들을 만날 때면 작가로서, 언론인으로서 많은 일을 하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지만, 어렸을 적의 일이라 기억나는 게 없어 아쉬움이 많아요.” 한남철 선생의 큰 아들인 한기웅(34)씨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아쉬움으로 대신했다. “어렸을적 아마 초·중학교 시절이었을 거예요. 집에 부모님이 사용하시던 작업실이 있었는데 그 곳엔 책이 많지 않았어요. 오히려 거실에 책이 더 많았지요. 작업실은 항상 깔끔하게 정리돼 있었고, 어머님이 소설을 쓰시면 아버님이 읽고 조언을 해주시곤 했어요.” 한씨는 “아버님이 작품을 쓰시지 않는 대신 어머님의 작품활동에 많은 도움을 주셨다”며 “어머님이 원고를 작성하시면 꼼꼼히 읽으시고 조언을 해주셨다”고 기억했다. 그가 초등학교 시절부터 어머니 이순씨는.. 2006. 2.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