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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인물39

[인천인물100인] 46. 작가 엄흥섭…원고지에 핀 '사회변혁의 꿈' ▲ 엄흥섭의 단편소설 '새벽바다'의 주무대였던 인천항에서 고단한 삶을 살아야 했던 부두 노동자들의 모습을 담은 1930년대 사진.(제공·인천학연구원) [인천인물100人·46] 원고지에 핀 '사회변혁의 꿈'…작가 엄흥섭 일제 식민지시대 인천지역 빈민들의 삶에 천착한 작가 엄흥섭(1906~?). 해방 이후 지.. 2006. 10. 14.
[인물 45] 기념비 조각과 월북작가 조규봉 월북 1세대 조각가들의 노력 기념비 조각과 월북작가 조규봉 * "기분 좋은 문화중독 - 컬쳐뉴스"에서 전재. http://www.culturenews.net/read.asp?title_up_code=003&title_down_code=007&area_code_num=113&article_num=4731 지난 몇 시간 기념비 조각을 감상해보았다. 오늘은 마지막으로 기념비 조각이 설립되는 위치선정의 .. 2006. 10. 14.
[인천인물 100인] 45. 조각가 조규봉 - 인천이 낳았으나 인천이 잊어버린 '비운의 예술혼' ▲ 공원으로 변한 조규봉의 생가 터. >45< 조각가 조규봉 조규봉이 초등학교 때 살던 동구 신화수리(新花水里·지금의 화수1·화평동) 77이 화도진공원 부지에 편입되는 바람에 지금은 집터의 흔적조차 가늠할 수 없다. 다만 그가 다녔던 창영초등학교에 어린 조규봉의 모습을 엿볼 수 있게 하는 학적부가 보관돼 있을 뿐이다. 조규봉의 예술가적 기질은 초등학교 시절부터 나타난다. 일제치하에서 초등학생 조규봉은 국어(일어), 조선어, 산술(산수), 일본역사 등에는 관심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6학년 때 이들 4개 과목의 점수는 모두 4점(10점 만점)에 그쳤다. 그러나 도화(그림)와 창가(노래)는 5~6학년 기간에 자신의 최고 점수인 8~9점을 각각 받을 정도였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그림에 재주가 뛰어나서 학교.. 2006. 10. 14.
[인물 44] '셋째아들 신국조교수'가 본 아버지는 “선친께서는 인재양성만이 밝은 내일을 기대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선친의 뒤를 이어 서울대 자연과학대 화학과 교수로 활동하고 있는 셋째 아들 신국조(61)씨는 “아버님께서는 수렁에 빠진 한국경제를 어떡하면 다시 일으켜 낼 수 있을까 늘 고민하셨다”며 “자율성이 최대한 보장된 대학에서 훌륭한 인재를 길러내 사회 각 분야에 진출시키는 것만이 나라를 위한 길이라고 생각하셨다”고 회고했다. 국조씨는 “선친께선 서울대에서 인재를 길러내는 것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고 말했다. 그는 선친의 꿈은 '경제학자'가 아닌 '화가'였다고 소개했다. “선친께서는 미술을 전공하고 싶었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었죠. 어려서 부터 그림 그리기와 예술 작품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아버님은 미술분야 전공을 마음먹고 미대 진.. 2006. 10.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