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직후 인천은 점령자의 지위에서 하루 아침에 신세가 뒤바뀐 일본인들이 본국으로 철수하는 중심지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일제의 강제징용이나 폭압을 피해 해외로 나가 있던 '전쟁 이재민'들이 몰려 들어오는 통로였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사회적 문제도 야기됐고, 숭일(崇日)의 아픔이 되살아나는 현장이기도 했다. 1945년 일제의 패전 당시 해외
동포의 수는 약 500만명으로 이는 전체 한국인의 20%에 달했다고 한다. 이 중 해방직후 귀환한 해외동포는 250만명 정도였고, 이들 가운에
약 75만명이 인천항을 통해 조국의 품에 돌아왔다는 게 학계의 정설이다.
인천은 특히 지리적으로 중국과 가까웠기 때문에 화북지역의
많은 해외 동포들이 귀국 통로로 인천항을 이용했다. 인천에서 창간된 '대중일보' 1947년 11월21일자에 따르면 1945년 9월부터 이듬해
12월 말까지 인천에 귀환한 전쟁피해 해외동포는 6만5천779명이다. 이들을 출발지역별로 보면 중국 4만4천772명, 일본 1만6천7명,
남양군도 5천700명 등이다. 이후의 귀환동포까지 따져 1947년 10월 말 현재 인천에 들어 온 동포의 수는 총 6만7천394명(인천미군정
외사처 집계)이다.
막대한 해외 동포의 귀환은 주택난과 실업, 질병, 범죄 등 심각한 사회문제로 이어진다.
인천은 해방을 맞았지만 또다른 아픔을 껴안게 됐던 것이다.
또 카미카제 특공대원으로 비행기를 탔다 자폭해 친일문인들에 의해
전쟁영웅으로 묘사되기도 했던 '어린 병사'가 인천항을 통해 살아 돌아오는 해프닝이 빚어지기도 했다.
정진오·schild@kyeongin.com / 2005. 10.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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