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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에 있던 일본인들은 해방 직후에도 국가기간 시설이라고 할 수 있는 인천 앞바다의 등대를 폭파하는
범죄행위를 버젓이 저질렀다. 일본인들이 만든 우표에 담긴 이 사진은 폭파직전의 소월미도 등대의 모습. 등대를 인천의 명소라고 한 점이 이채롭다.
/인천학연구원 제공
>4< 해방직후도 계속된 日범죄
1945년 8월
15일 찾아 온 해방은 우리에게는 일제의 폭압에서 벗어나는 일대 전환점이었지만 일본인에게는 상상할 수 없던 치욕이었을 것이다. 일제 수탈의
전진기지였던 인천에선 어떠했을까. 인천에 있던 일본인들은 조선인들이 자신들을 공격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인천 거주 일본인들은 밤이되면 문을
잠그고 전전긍긍했다고 당시 일본인들은 기록하고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런 예상은 빗나갔다. 해방직후부터 몇 개월이 흐를 때까지도 일본인들의
범죄행위는 버젓이 이어진 것이다. 중요 시설과 정보가 그 대상이 됐다. 인천부(시청)에서는 각종 서류를 소각하느라 연기가 하늘을 뒤덮었다는
기록도 있다. 지배자에서 패퇴자가된 일본인들은 해방 이후에도 범죄행위를 서슴지 않을 정도로 인천사회는 기형적으로 돌아갔던 것이다. 당시
신문기사는 이런 사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등대 폭파사건(해방뉴스 1945년
8월28일자)
'단말마에 허덕이는 패전 일본 군관은 방화와 파괴 등을 제멋대로 하고 있는데 항해선을
위험한 혼란에서 구하는 등대를 폭파해 이 귀축(鬼畜)같은 행위에 일반은 격분하고 있다.
즉 인천 바다의 등대 6곳 중 4곳을 인천 부두국(埠頭局) 일본인 관리가 폭약으로 파괴하고
나머지 두 대도 폭파를 기도하였으나 근무하는 조선인 사용인(使用人)의 용감한 저지로
파괴를 하지 못하였다. 이래서 인천 앞바다는 위험상황에 빠져 있으므로 일반 항해자는
경계하여야 한다'.
인천 앞바다에 등대가 6곳이나 있었다는 사실을 통해 인천항의 기능이 얼마나 중요했는
지를 유추해 볼 수 있다. 등대가 없다면 인천항의 기능은 마비될 수도 있다. 일본인 관리는 이런 점을 노렸다. 등대 모두를 파괴하려 했지만
4곳에 그쳤다. 해방 이후 10일 이상 지났지만 일본인 관리는 폭약을 마음대로 쓸 수 있었다는 사실도 새삼
놀랍다.
#화약공장 폭파사건(대중일보 1945년 12월3일자)
'즉사
11명, 중상 4명, 원인 조사 중. 인천시내 논현정(논현동)에 있는 조선유지 뇌관공장
(한국화약)을 이번에 조선사람이 접수 경영하게 돼 지난 11월 30일 경성으로부터 온 경영주
이갑수씨 외에 최진관, 안두선씨가 공장 대표 이재복씨의 안내로 공장시찰을 하던 중
제1, 제2공장을 돌아보고 정오경에 제3공장에 들어서자 돌연 제3공장이 폭파되어 전기(前記)
4명을 비롯하여 수행하던 화약공, 이춘식 뇌관공장 주임, 최종기 정비원 3명, 운전수 등
11명이 즉사하고, 근방에 있던 4명이 빈사의 중상을 입어 응급가료 중인데 생명이 위독하
다고 한다.
이 급보를 접한 인천경찰서에서는 강 사법주임 이하 계원이 현장에 달려가 목하(目下) 그
원인을 조사중인데 혹시나 악덕 일본인의 모략적 소행이 아닌가 하여 동(同) 공장의
전회계주임 시기하라 외 3명을 소환해 심문중이라 한다'.
일본인들은 전쟁 중 가장 중요시했던 화약공장을 그대로 조선에 넘겨줄 수는 없다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단일 사건으로 15명의 사상자를 낸 경우는 당시로서는 보기 드물다. 이전이 확정된
남동구 논현동 한국화약이 이런 역사를 안고 있다는 점도 눈길을 끄는 대목이다.
#학교 공금횡령사건(대중일보 1945년
10월27일자)
'인천 상업학교 교장 야마모토(山本)는 이 학교 후원회비와 설립 준비 중이던
인천여자상업
학교 기부금을 편취한 후 서류를 소각하고 어디로인지 도주하였다고 한다'.
갑자기 찾아온 패망 소식에 자신들의 재산 챙기기에 혈안이 된 일본인들의 단상을 보여준다. 해방 직후 금융거래가 사실상 중단된
일본인들이 공금횡령이란 범죄행위를 통해 현금을 확보하려 했다는 사실도 이채롭다.
#첨단정보 폐기사건(자유신문
1945년 10월8일자)
'전 경성측후소장 구보다씨가 (조선중앙기상대인 인천측후소의)8·15 직후
기상통계표와
암호전보 등과 같은 주요 서류가 든 강철 서류보관창고를 파괴하고 중요 설비를 자신의 집에
은닉한 뒤 물품대장을 전부 고쳐 놓은 사실이 드러나 군정당국이 인천기상대를 급습해 조사 중
이다'.
인천기상대는 당시 조선의 최첨단 시설이었다. 여기서 나온 각종 고급 정보를 일본인들이 폐기한
것이다.
#인천부두 화재(1945년 10월14일자)
'군수품과 창고 등
전소. 지난 (10월)12일 저녁 7시 37분경 부두 안에 정박 중이던 미군 수송선
에서 돌연 폭발음과 함께 발화돼 남쪽 중 6, 7, 8, 9, 14, 15호 등 여섯 채의 창고에 불이 연소돼
미군의 중요 물자가 그 창고에 가득 채워져 있었는데 대부분이 전소됐다. 이에 조사한 바에 의
하면 미군 수송선에는 폭탄을 실은 수송선이 안벽에 대어 있었던 바 그 곳에서 발화된 듯 하다'.
(대중일보 1945년 10월 14일자)
'(10월)12일 오후 7시 40분경 인천항에 정박 중이던
함선에서 불이 나 부두의 미곡창고를 비롯한
인근 창고로 옮겨 붙어 약 4시간만에 진화했는데 원인과 손해액을 조사 중이다'.
(자유신문 1945년 10월 14일자)
인천부두 화재를 다룬 2건의 기사는 인천 지역신문의 정확성을 잘 드러낸다.
인천에서 발행된 대중일보는 당시 사건을 자세하고 정확하게 보도하고 있는 데 반해 전국적으로 발행되던 자유신문은 같은 날 기사임에도 불구하고
간략하게 소개하는 데 그친 것이다.
정진오·schild@kyeongin.com / 2005-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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