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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4 - 인천 개항기

[해방기 격동의 현장 인천] 5. 패망앞둔 일제 발악의 자살놀음

by 아름다운비행 2005. 10.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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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는 전쟁터에 나가는 소년병들을 미화하기 위한 작업에 열을 올렸다. 사
진은 일본 육군보도부장상을 수상한 소년병 미화 엽서. =인천학연구원 제공


>5< 돌아온 카미카제 '오장 마쓰이'

 일제 강점기간 중 징병과 징용, 학병이나 지원병으로 끌려가거나 가혹한 수탈을 피해 해외로 이주했던 동포들은 당시 총인구의 20%에 해당하는 500만명에 달했다. 해방이 되면서 귀환한 전재동포는 총 250만 명으로 추산되는데 약 75만 명은 인천항을 통해 귀국했다. 인천은 지리적으로 중국에 가까운 탓으로 화북지역의 동포들이 주로 인천항을 통해 귀환했으며 강제 징집되어 연합군의 포로가 된 조선인 병사들의 상당수도 인천항으로 귀환했다.

 당시 해외동포의 귀환을 다룬 신문기사 가운데 카미카제(神風) 특공대원으로 전사했다고 알려졌던 ‘마쓰이 오장’이 인천항으로 살아서 돌아왔다는 소식은 해방정국을 맞은 우리 사회의 단면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한편의 희극이었다.

 

1946년 1월 10일, '조선일보'와 '자유신문'에 보도된 기사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전사했다든 松井伍長 살아서 十日 仁川 入港 : 재작년 11월 24일 소위 特別攻擊隊員으로서

   전사하였다던 송정오장(松井伍長=本名 印在雄, 23세, 開城出身)이 생존하야 방금 인천

   팔미도에 머물고 있는데 오는 10日 아침 미국포로수송선으로 수송되어 인천에 상륙하게

   되었다. 버젓이 살아 있는 사람을 죽었다고 허위보도하야 세인의 이목을 속인 것만으로

   미루어 보드라도 제국주의 일본의 천박한 선전정책이 얼마나 가증한가를 알 수 있다. 그

   런데 동군의 양친은 아들을 만나려고 지금 인천 율목동(栗木洞)에 체류하고 있는데 그

   부친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전사하였다는 통지가 있어서 장례까지 지냈는데 일본육군성에서 채권으로 3천500원을

   보내고 기타 부의금으로 약 2만원이 모여서 정말 죽은 줄 알았더니 하와이에서 포로가

   되어 미국 군함을 타고 인천에 입항한다는 소식이 있어 여기 와서 기다리고 있는 중입니다.”

 개성출신의 ‘마쓰이 오장’이 카미카제 특공대원으로 자원하여 미국 함대를 공격하다가 전사한 것으로 알려지자 일제는 이 사실을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당시 매일신보는 ‘마쓰이 오장을 따르자’는 사설을 게재했으며 조선총독부는 ‘마쓰이 정신(松井情神)을 드높이기 위한 사업’을 그의 고향인 개성에서 시작하기도 했다. 육탄돌격대인 카미카제 특공대가 되어 전사한 일본과 조선의 군인은 천황과 대일본제국에 대한 충성과 애국심의 표본으로 선전해왔기 때문이다.

 

   조선총독부 기관지였던 '매일신보'는 특공대원의 사망 소식을 빠짐없이 기사화하였으며 ‘결전필승의 인간 신풍(神風)’이니 비행기 한대로 전함 한척을 반드시 파괴해야 한다는 ‘일기일함(一機一艦)의 필살행’과 같은 주장을 하며 조선의 청년들에게 일왕을 위해 죽을 것을 부추겼다. 전장에 나가 일왕을 위해 죽으면 군신(軍神)이 되어 야스쿠니 신사(靖國神祠)에 위패를 올리는 영예를 얻을 수 있다고 유혹하기도 했다.

 ‘마쓰이 오장’의 생환 소식이 전해지자 죽은 줄 알고 제사까지 지내던 개성의 부친은 인천으로 달려와 그를 맞이했지만, 이와는 달리 그의 생환을 악몽처럼 여겼던 사람들도 있었다. 일제의 카미카제 특공대를 찬양하는 선동에 참여하여 동포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적극적 친일파들이 그들이다.

 

   친일문학의 대표적 사례인 ‘오장 마쓰이 송가(頌歌)’를 지어 바쳤던 미당 서정주의 경우는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미당이 1944년 12월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발표한 그 작품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마쓰이 히데오!
 그대는 우리의 오장(伍長) 우리의 자랑.
 그대는 조선 경기도 개성 사람
 인씨(印氏)의 둘째 아들 스물한 살 먹은 사내

 마쓰이 히데오!
 그대는 우리의 가미가제 특별공격대원
 귀국대원

 귀국대원의 푸른 영혼은
 살아서 벌써 우리게로 왔느니
 우리 숨 쉬는 이 나라의 하늘위에
 조용히 조용히 돌아왔느니
 원수 영미의 항공모함을

 그대 몸뚱이로 내려쳐서 깨었는가?
 깨뜨리며 깨뜨리며 자네도 깨졌는가 ―
 장하도다
 우리의 육군항공 오장 마쓰이 히데오여
 너로 하여 향기로운 삼천리의 산천이여
 한결 더 짙푸르른 우리의 하늘이여

 -서정주, 〈오장 마쓰이 송가〉에서


 이 작품에서 미당은 광기에 찬 군국주의자들이 부추긴 무모한 자살놀음을 숭고한 애국행위로 찬양하고 식민지 청년이 동포를 억압해온 지배자를 위해 죽어간 비극을 ‘옥쇄’라고 미화했던 것이다. 그런데 미당의 시 구절처럼 ‘푸른 영혼’이 되어 ‘조용히’ 되돌아와야 할 카미카제 특공대원 ‘마쓰이 히데오’가 시퍼렇게 살아서 인천항으로 돌아온 것이다. 당시 마쓰이 오장, 아니 인재웅의 생환 기사를 접한 미당의 표정은 어땠을까.

 

   뒷날 미당은 자신의 행위가 친일도 부일(附日)도 아니며 단지 ‘이것은(일본의 지배는) 하늘이 이 겨레에게 주는 팔자’로 여기며 살아가려 했다는 말로 눙쳤다. 시 뿐만 아니라 평론과 수필, 단편 소설(최체부의 군속지망) 등 열편 이상의 친일문학을 제작하여 일제의 학병지원이나 징병의 정당성을 적극적으로 선전했던 미당의 변명치고는 졸렬하다 하겠다.

 ‘마쓰이 오장’ 같은 동포의 귀환을 반기지 못하고 당혹감을 맛본 사람이 비단 미당 뿐이었겠는가? 카미카제 특공대를 찬양하기 위해 '군신송(軍神頌)'을 지은 노천명과 같은 시인도 아마 미당과 흡사한 심정이었을 것이다.

 

   친일파들에게 광복은 환희와 감격이 아니라, 좌절이었으며, 일본의 패망은 일본인이 느낀 것처럼 ‘날벼락’과 같았을 것이다. 8·15 당시, 인천교육자회 학무과장 김 아무개는 일왕의 항복 방송을 듣고서도 이를 유언비어라고 일축하고 오히려 학생들을 운동장에 모아놓고 일본군대를 지지한 ‘황국신민의 서사’를 큰소리로 제창시켰다고(대중일보, 1945.12.5) 하는데, 그도 역시 일제의 조선지배가 영원하기를 바랐던 조선인 군상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김창수(문학평론가, 인천학연구원 상임연구위원) / 2005. 10.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