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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4 - 인천 개항기

[해방기 격동의 현장 인천] 6. 그러나 그들은 갈곳이 없었다

by 아름다운비행 2005. 11.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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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전국 최대혼란지 인천

 인천은 해방직후 전국에서 가장 극심한 혼란상황을 겪은 곳이다.
 해방직후 귀환한 해외동포는 총 250만명에 달했는데, 이들 가운데 인천항을 통해 들어온 경우가 75만여명이라고 한다. 이 중 상당수는 인천에 눌러 앉았다. 급격한 인구팽창으로 인한 사회문제는 불가피했다. 대표적인 게 주택난과 각종 범죄였다고 할 수 있다.

 1947년 10월 8일자 '독립신보'는 인천의 인구증가에 따른 사회문제를 보도하면서 “이들에 대한 구제문제는 과거 3년간 가장 긴급한 사회문제”였다고 표현했다.
 인천에서 발행되던 '대중일보'는 1946년 12월 초 인천에 거주하는 해외동포와 월남 동포를 일컫는 전재민(戰災民)이 3만여명이라고 집계하고 있다. 이는 당시 인천 인구의 5분의 1에 해당한다고 한다.

 당시 대중일보를 보면 이들 전재동포의 급격한 유입으로 야기된 문제 가운데 가장 심각한 것은 주택난이었다. 전재동포들은 인천항에 입항해 보통 3~4일간 수송선 안에서 검역을 받은 뒤 미군정청 후생과와 인천시 사회과로 인계되고, 다시 조선인민원호회 등 민간 구호단체의 안내로 별도의 수용시설에서 2~3일을 보낸 뒤 열차 편으로 각자의 고향에 보내졌다.

 수용시설은 당시 유곽이 밀집돼 있던 선학동(敷島町)에 6개소가 있었고, 이 시설은 모두 일본인이 경영하던 유곽과 여관을 개조해 만들었다고 한다.
 문제는 전재민들이 수용소를 나와도 갈 곳이 없는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인천으로 귀환한 중국 화북지역 전재동포들은 현지에서 재산을 빼앗겨 빈털터리가 된 데다 고향에 농사를 지을 토지마저 없는 경우가 많아 이곳저곳을 배회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을 수용할 주택은 절대적으로 부족해 특히 겨울철이 문제였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당국에서는 인천에서 일본인들의 본국 철수사무를 주관하고 있던 '일본인세화회'(日本人世和會)의 임원들을 불러 일본인 소유의 빈 가옥들을 조선인 전재민들을 위해 비워주도록 요구할 정도였다. 결국 1946년 11월에는 인천시내에 있던 일본인 경영의 여관 네 곳이 전재동포의 수용을 위해 개방됐다고 한다.

 당국에서는 주택난 해결을 위한 근본대책을 마련하지 못했고, 그나마 3천여호에 달하던 일본인 주택을 접수해 전재동포들에게 임대한다는 계획도 일본인들로부터 미리 돈을 주고 사들인 '모리배'들이 극성을 부리면서 실패로 돌아갔다. 또 미군정은 1946년 12월 말까지 인천시내 일본인 소유의 요정을 비롯한 유흥업소를 모두 접수해 이를 개방한다고 발표했다가 돌연 그 개방의 시기를 한 달간 연기한다고 다시 발표하는 등 우왕좌왕하는 모습도 보였다.

 갈 곳없는 노숙 전재동포들의 동사문제가 현실화하자 각 정당과 사회단체는 한 목소리로 당국의 처사를 비판하기도 했다.
 조선일보 1946년 12월26일자에 실린 각 정당에서 발표한 요구는 급박한 당시상황을 여실히 보여준다.

 “수십만 전재동포가 기아에 떨고 있을 때 일부 요정을 경영하여 치부를 하려는 무리들과 호의호식으로 향락을 꾀하는 일부 특수계급을 위하여 집 없는 전재동포를 위한 요정 개방을 연기한다는 것은 실로 언어도단이라 아니할 수 없다. 종업 노무자의 생업에 대해서는 위정당국으로서는 물론 대책을 강구하여야 할 것이다.”(민주주의민족전선)

 “현실문제로 보아 또 민족적 양심으로 보아 일제 압정에서 쫓겨났다 해방된 조국에 헐벗고 돌아온 전재 귀환동포에게 적산을 주는 것은 당연하다. 항차 추위와 기아에서 시급히 구제가 요청되는 그들에게 일단 적산요정을 개방해 들게까지 하였다가 며칠 후에 1개월 유예를 선언하는 미군정을 이해하기 힘들다. 이래서야 군정에서 하는 일을 누가 믿을 수 있을까. 우선 문제는 전재동포를 구하는 일이 가장 급한 일이다.”(한국독립당)

 갈 곳 없는 전재동포들은 일제말기 전시 하에 구축된 고사포 진지와 뒷골목 방공호, 다리 밑 등지에서 엄동설한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해방이 이루어져 꿈에도 그리던 고국땅을 밟았으나, 현실은 일본인들의 집을 얻어야 했으나 그것도 여의치 않았고, 일제의 전쟁 상징인 군사시설물에서 찬바람을 견뎌야 했던 것이다.

 대중일보 1946년 12월12일자와 14일자는 “1946년 12월 현재 인천에 잔류한 3만여명의 전재동포 가운데 거리의 무숙자가 최소한 80여 세대였고, 한 겨울에 그대로 두면 굶어죽을 사람은 600여명으로 조사됐다”고 쓰고 있다.

 또한 대규모 유입인구로 인해 실업사태와 주택난, 불결한 주거환경 속에서의 질병의 만연을 피할 수 없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해방직후 인천 지역사회를 한동안 시끄럽게 했던 문둥병자(나환자)의 집단 소동이었다. 100여명의 나환자들이 중구 신흥동 1가 신한공사 부근 공터에 천막을 치고 집단적으로 거주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살인사건도 일으켰고 집단을 이뤄 양복점과 주택을 침입해 의류와 시계 등을 훔쳐 달아나기도 했다.

 대규모 전재동포의 인천잔류는 각종 범죄발생의 요인도 제공했다. 해방 후 1946년 12월30일까지 인천의 범죄 피해건수는 2천200여건이었고, 피해금액은 1천300여만원에 달했다고 한다. 대중일보와 독립신보 등은 당시 인천경찰서에서 검거한 절도범의 대부분은 전재민이었다고 보도하고 있다.

 또 전염병도 현실문제였다. 1947년 초 해빙기가 되면서 콜레라 등 전염병의 창궐이 크게 우려됐던 것이다. 이 때문에 시 당국은 해외 귀환 전재동포와 북한지역 월남인들을 태우고 인천항에 입항하는 수송선에 대한 검역을 한층 강화했다. 4월 초 미군정청은 전염병의 국내 진입을 방지하기 위한 강력한 대책으로 항만 검역에 대한 법령을 제정하고 인천과 부산, 목포, 여수 등 해외 전재동포의 귀한 수송선의 입항이 잦은 항구에 별도의 검역소 설치를 결정할 정도였다.

 '해방후 인천지역의 전재동포 귀환과 사회변화'란 논문을 쓴 이현주 국가보훈처 연구관은 해방기 인천을 가리켜 “최초의 개항장으로 외국인 전용 거류지가 형성되어 중심부에는 많은 일본인들이 거주하였고 식민지 근대화의 첨병역할을 수행하였던 곳이, 해방 후는 제일 먼저 미군의 점령을 경험함으로써 다시금 고단한 현대사의 서막을 열었던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처럼 해방을 맞는 인천의 풍경은 남다른 점이 있었다.

 인천에 진주한 미군은 군정을 실시, 시장을 선출하고 행정기구를 정비하는 등 시정을 빠르게 장악해갔으나 시의 행정을 맡은 한국인의 대부분은 식민지 아래서 일본인 밑에서 일하던 인사들었던 것이다. 또 이들에 대한 우익의 엄호 속에 8·15 전후 자생적으로 탄생한 좌익은 자연스럽게 이들에 대한 비판과 견제를 강화해갔고, 신탁통치 파동과 미소공위의 공전 등을 거치면서 1947년 말까지 극한적 대치가 지속되었다.

 이런 혼란 속에서 주택난을 해결하고자 만든 집단적 가주택 지역은 자연스럽게 빈민촌을 형성, 잠재적 사회갈등의 씨앗이 됐고 전재동포는 더 이상 민족의 이름으로 포용의 대상이 되지 못한 채 견제와 격리의 대상으로 내몰리고 만 것이다.

 이현주 연구관은 “해방 직후라고 하는 신질서 형성기 인천지역사회에서 일어난 강력한 민족 내부의 균열과 배제가 오늘날 인천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깊은 상처가 되었을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말할 정도로 인천은 해방기 가장 혼란스런 사회상을 겪으면서 일제와 해방이란 극단적 상황에서 모두 최대 피해자로 전락하는 아픈 경험을 하게 된 것이다.

 

정진오·schild@kyeongin.com / 2005. 11.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