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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4 - 인천 개항기

[개항기 격동의 현장 인천] 7. '日 흔적 없애기' 개혁의 바람

by 아름다운비행 2005. 12. 5.

>7< 새로운 도시를 위해

 해방 직후 전국에서 가장 극심한 혼란상을 보인 인천은 어려운 가운데서도 '새로운 조국의 관문 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위한 준비작업이 각 분야에 걸쳐 진행됐다.

 일본제국주의로부터 통치권을 넘겨 받은 미군정은 우선 행정·치안조직 재편에 나섰고, 민의를 대변할 시의원도 선출했다. 최초의 순한글 지역신문인 대중일보와 인천신문도 잇따라 창간, 올바른 언로(言路) 확보가 안돼 지역 소식에 어두울 수밖에 없던 당시 시민들의 눈과 귀 역할을 했다. 일제때 일본식으로 바뀌었던 지명도 복원됐다. 특히 식민지 잔재 청산방침에 따른 교육개혁도 이루어졌다.

 인천은 해방 후 미군의 첫 주둔지역이었다. 1945년 9월 8일 미육군 선도대가 인천에 도착했으며, 이튿날 7사단의 병력과 장비의 하역이 완료됐다. 그 뒤 인천지역은 제17보병연대에 인계됐다. 인천은 수도 서울의 관문이라는 중요성과 함께 교통도 원활한 지역이었으므로 다른 지역보다 일찍 미군이 진주해 군정을 실시했다. 당시 미군이 인천에서 군정을 실시하면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인천지역의 행정권과 치안권을 접수, 장악하는 일이었다. 구체적으로는 인천지역의 경찰권을 확보하고, 나아가 일제시기 총독정치의 상징이던 인천부(仁川府)를 대체한 새로운 행정조직을 만드는 것이었다.


 가장 상징적 조치는 해방 후 1개월이 훨씬 지난 10월 4일에 있었다. 미군정은 이날 일제 하에 임명된 관제적 정회장(町會長, 동장)을 파면하고 시장선거에 대한 조치를 내린 것이다.

 이 조치는 ▲관선 정회장으로 구성된 일본식 정회제를 폐지하고 ▲잠정적으로 관선 정회장제를 마련하는 한편 정회장을 각 반(班)을 통해 민주적으로 선임할 것 ▲인천부 정회장 연합회를 조직한 다음 그 연합회로 하여금 미국식에 따라 부윤(府尹, 시장) 후보자 7명을 공천케 할 것 등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이런 상황 아래서 초대 인천시장에 임홍재가 선출됐다. 10월 10일 취임한 임 시장을 비롯한 인천시 고위 관료들은 그러나 일제 때 교원을 지내거나 일본인들과 직·간접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던 인물들이 많아 제대로 된 일제청산은 기대하기 어려웠던 것도 현실이었다.


 미군정은 또 인천시 의회의원의 선출을 통해 군정에 대한 시민의 협조를 이끌어내고 통치기반을 확대하고자 했다. 이런 틀에서 지방의회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고문회의'가 출범한다.
 대중일보 1945년 11월 3일자는 당시 고문회의 출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인천시회 의원은 지난 (10월)31일에 정원 32명이 선임되었다. 이 32명 중에는 일본치하에서 다년간 공직생활을 하였던 이가 7명이 있고 신인으로 등장한 이는 25명이다. … 이들 전부가 25만 시민의 대변자라면 시민의 기대에 어그러진 바도 적지 않다. … 이 인선에는 군정청에서 시장의 의사로 생각지 않고 3, 4일 동안을 끌어오면서 자기네들이 어떤 방법으로 신원조사를 하였는지 모르나 시장의 인선을 몇사람 빼고 발표한 것이 묘한 점이다. … 25만 시민을 위한 인재가 나서려니 하는 희망은 실망으로 돌아갔다고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행정체계가 어느 정도 잡혀가면서 일본식 지명을 우리 것으로 바꾸기 위한 움직임도 활발했다. 해방 직후 지역언론에서는 새해부터 일본식 냄새를 없애자는 여론을 쏟아냈다. 대중일보는 “8·15 해방 이후에도 아직 거리거리에는 가증스럽고 더러운 왜색이 일소되지 못하고 국치적인 정명(町名)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것은 대단히 한심스러운 일이었다”고 쓰고 있다.

 

  이에 따라 시청 당국에서는 정명 개정위원회를 조직하고, 여러 차례의 협의과정을 거쳐 정(町)을 동(洞)으로 고치고, 정목(丁目)을 가(街)로 개칭하기로 하고 1946년 1월 1일부터 이를 시행하기로 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나온 게 중앙동(본정), 관동(중정), 송학동(산수정), 신생동(궁정), 신포동(신정), 답동(욱정), 신흥동(화정), 산화동(부도정), 북성동(화방정), 인현동(용강정), 옥련동(송도정) 등 76개였다.

 해방은 인천 언론계에도 새바람을 불어 넣었다. 해방이후 인천 관련 일을 가장 많이 싣고 있는 신문은 대중일보다. 대중일보는 최상철을 편집 겸 발행인으로 중구 중앙동에 회사를 세우고, 1945년 10월 8일자로 제1호를 발간했다. 지역 안팎의 주목을 받으면서 창간된 대중일보는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직전까지 여러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1천488호를 내며 지역 언론의 창달과 건국 대업에 커다란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평가된다. 특히 인천지역의 반민족행위자 처벌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해방정국의 이모저모에 대한 상세한 보도, 그리고 인천의 교육 문제와 미곡문제에 대한 꾸준한 취재·보도가 돋보인다.

 대중일보에 이어 46년 3월 1일엔 좌익성향을 띤 '인천신문(발행인·김홍식)'이 발간돼 지역신문 경쟁체제가 들어서기도 한다.


 기독교 포교와 함께 '근대식 학교 교육'의 시발점이 되었던 인천의 교육열은 해방 이후 더욱 뜨거워졌다. 1892년 인천 신교육의 효시인 영화여학당이 생겨나고, 부평공립소학교(1899·계양구 계산동)가 개교한 뒤 일제강점기 창영, 서곶, 문학, 숭의, 송림, 송현, 축현, 서림 등 20개에 이르는 학교가 문을 열었다.

 해방 직후 창영초교 청라분교, 석남초교, 산곡초교 등 각 지역마다 학교들이 잇따라 개교했다. 1천588명(45년 10월), 33학급 2천115명(46년 9월), 2천417명(47년 9월), 35학급 2천638명(48년), 2천830명(49년) 등으로 이어지는 창영초교의 폭발적 학생 증가상황은 당시 교육열을 대변해 준다.

 1945년 9월 18일 미군 아놀드 군정장관은 각 도에 '조선인의 조선인을 위한 교육방침'이란 내용의 포고문을 발표했다. 경기도교육위원회가 1975년 펴낸 '경기교육사'에 따르면 1945년 11월경부터 인천에서 새교육운동이 전개되었다. 신교육사상, 교육과정 구성과 운영, 신학습지도법 등을 내용으로 하는 새교육잡지를 발간했으며, 1946년과 1947년 사이에 인천 신흥초등학교에서 교육의 모든 분야에 걸쳐 처음으로 도내 교육자료 전시회를 개최해 우수한 자료는 시상하고, 이를 일반화하는 데 노력했다. 또 1946년에는 처음으로 인천에서 아동문집 '등대'를 엮어내는 등 인천은 이른바 '새교육운동'의 선도적 역할을 했다고 한다.

 이런 인천의 새 교육열기는 일제하 약 54%에 머물던 초등학교 취학률이 1949년 말에 81%에 육박했던 것에서 잘 읽을 수 있다.
 '소화강습회'를 '인천공립동명국민학교'로 학교 이름을 바꾸는 등의 교명변경 작업은 교육개혁 차원에서 펼친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해방 직후 경제·정치 분야에서의 바로 세우기 등 혼란상황도 빼놓을 수 없는 대목이다.

 

정진오·schild@kyeongin.com / 2005. 12.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