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개항기의 일들을 적어나가다가 만나게 되는 또 하나의 일,
"반민특위" 운영과 그 일련의 경과에 대한 일들이다.
철저히 짓밟혔던 우리민족의 쓰라린 과거사를 청산하기 위해서는
일제치하기간중 친일인사들에 대한 철저한 진상파악 및 합당한 조치를 취하지 못한
또 하나의 쓰라린 과거를 우리는 지금도 안고 살아가고 있다.
그중 대표적인 것으로, 인천과 관련하여서는 김활란의 친일행적에 대한 논란을 들 수 있다.
혹자는 친일이다 라고 하고 혹자는 그래도 공과는 따져봐야 한다는 논리를 펴고도 있다.
요즘 개봉을 예고하고 있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비행사에 대한 영화 '청연'에 대한
논란과도 일맥상통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 과거사 청산을 최초로 시도한 것이 반민특위였는데,
결국 우리는 해내지 못했다.
저 프랑스 등의 철저한 친나찌 부역자에 대한 처벌의 예를 우리는 다시금 새겨야 할 것이다.
반민특위에 대한 많은 것을 다 담을 수는 없으되,
반민특위 개요에 대한 설명과
2004년 11월의 KBS의 특집에 대한 소개와
반민특위에 대한 증언을 엮어낸 최근의 저술 하나를 소개하는 것으로
오늘의 얘기를 가름한다.
1. 반민특위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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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反民族行爲特別調査委員會)
일제강점기에 일본에 협력하면서 악질적으로 반민족행위를 저지른 사람을 조사, 처벌하기 위해
1948년 제헌국회 내에 두었던 특별위원회. 약칭 ‘반민특위’라고도 한다.
1948년 9월 22일 제정, 공포된 <반민족행위처벌법>에 따라
그해 10월 22일 당시 제헌국회내에 설치하였다.
이 특별위원회는 그해 10월 23일 각 시·도출신 국회의원들이 추천한 임기 2년의 위원 10명이 모여서,
위원장에 김상덕(金尙德: 경상북도대표), 부위원장에 김상돈(金相敦: 서울대표)을
호선방식으로 선출하였다.
위원은 조중현(趙重顯: 경기도대표)·박우경(朴愚京: 충청북도대표)·김명동(金明東: 충청남도대표)·
오기열(吳基烈: 전라북도대표)·김준연(金俊淵: 전라남도대표)·김효석(金孝錫: 경상남도대표)·
이종순(李鍾淳: 강원도대표)·김경배(金庚培: 제주도 및 황해도대표) 등 8명이었다.
국회는 반민특위의 조사업무를 보다 효율적으로 수행하게 하기 위해
그해 11월 24일 보조기구 설치를 위한 <반민족행위특별조사기관설치법>을 제정하여
중앙과 지방에 중앙사무국 및 지방사무분국을 설치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1949년 1월 12일 중앙사무국에는 책임자(총무과장 겸무) 및 조사1부·조사2부·조사3부를 두어
국장 겸 총무과장으로 이원용(李元鎔)을 임명하고,
각 지방조사책임자에는 경기도에 이기룡(李起龍), 충청북도에 경혜춘(慶惠春),
충청남도에 윤세중(尹世重), 전라북도에 손주탁(孫周卓), 전라남도에 최종섭(崔鍾涉),
경상북도에 정운일(鄭雲馹), 경상남도에 강홍렬(姜弘烈), 강원도에 김우종(金宇鍾),
제주도와 황해도에 송창섭(宋昌燮)을 임명하였다.
한편, 반민족행위자에 대한 기소와 재판업무를 담당할 특별재판부와 특별검찰부도 구성되었는데,
특별재판 전체관장은 대법원장 김병로(金炳魯)가 맡고,
제1부재판장에는 신태익(申泰益), 재판관에는 이종면(李鍾免)·오택관(吳澤寬)·홍순옥(洪淳玉)·김호정(金鎬禎)을 임명하였으며,
제2부재판장에는 노진설(盧鎭卨), 재판관에는 고평(高平)·신현기(申鉉琦)·김병우(金秉瑀)·김장렬(金長烈)을 임명하고,
제3부재판장에는 이춘호(李春昊), 재판관으로 서순영(徐淳永)·정홍거(鄭弘巨)·최영환(崔永煥)·최국현(崔國鉉) 등을 임명하였다.
특별검찰부는 대검찰청장 권승렬(權承烈)이 전체를 관장하고
노일환(盧鎰煥)이 차장을 맡았으며,
검찰관으로 서성달(徐成達)·이의식(李義植)·심상준(沈相駿)·김웅진(金雄鎭)·서용길(徐容吉)·
신현상(申鉉相) 등 9인으로 구성하였다.
이러한 조직과 체제를 갖춘 위원회는 약 4개월간에 걸쳐 305명에 이르는 반민족행위자를 검거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처리문제로 행정부와 의견대립이 일어났는데,
행정부측의 주장은 좌우충돌 및 사회여건 등으로 불안정한 시국에 사회지도급인사의 대량검거는
사회불안을 부채질하는 결과가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반민특위는 1,000여명의 반민특위조사대상자의 명단을 작성, 계속 조사작업을 진행시켰다.
마침내 1949년 6월 2일·3일 이틀간에 걸쳐 ‘국민계몽협회’라는 단체가 주동이 되어
‘국회는 반민특위를 해산하라’는 시위가 있었다.
이에 반민특위는 그 배후 주동인물로 최운하(崔雲霞) 등 수명의 경찰관을 구속하였다.
이에 맞서 경찰은 반민특위활동에 비협조적으로 나오고,
심지어는 반민특위 특경대(반민특위 사법경찰관리)를 습격하여
대원을 연행, 조사하는 등의 행패도 부렸다.
마침내 1949년 8월 22일 ‘반민족행위자 특별조사위원회 폐지안’이
국회에서 통과되었다(공소시효는 8월 31일까지로 제한되었음.).
이로써 반민특위는 참다운 활동을 하지 못한 채
나머지 임무를 검찰에 넘기고 흐지부지 해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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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KBS 특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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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완의 역사, 친일청산” - 반민특위 김상덕
방송일 : 2004년 11월 12일(금) 22:00∼23:00 /KBS 1TV
연출 : 김정중PD
* 출처 : http://www.kbs.co.kr/1tv/sisa/manhistory/vod/1334585_968.html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위원장, 김상덕
반민특위 위원장 김상덕. 그는 1919년 일본 유학생 시절 2·8 독립선언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였다.
이 일로 옥고를 치르고 그는 바로 중국으로 건너가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하기 시작했다.
김상덕은 1944년 임시정부의 문화부장으로 선출되어 독립운동을 하던 중 해방을 맞는다.
1948년 제헌국회 때 고향인 경북 고령에서 출마해 국회의원이 되었다.
1949년 1월, 반민특위가 구성되었고 친일파의 처단은
새로운 국가 건설에 반드시 거쳐가야 할 과정이었다.
김상덕은 반민특위의 위원장으로 선출돼
해방 직후 민족의 과제였던 친일 청산의 과업을 진두지휘하게 된다.
민족문제연구소 부천지회 조월희씨(38, 조각가)가 제작한 김상덕 선생의 흉상.
김상덕 선생은 우리 독립운동사에 빼놓을 수 없는 우뚝한 분으로 임시정부에서 김구 선생님
주석시절 문화부 장관을 역임하셨고 해방이후 국회의원을 지냈으며 반민특위 위원장으로 활
동한 범상치 않은 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들인 김정육님에게 사진 하나 변변히 남겨
놓지 못했습니다. 지금 남아 있는 김상덕 선생님의 사진은 지인들이 구해다 준 것이었다고
합니다.
(사진출처: 민족문제연구소, http://www.banmin.or.kr/main/show_news.asp?newsuid=921)
반민특위의 수난과 좌절
반민특위는 화신백화점 사장 박흥식을 시작으로 친일 문학인 이광수, 33인의 한 사람 최린의 체포 등
여론의 주목을 받으며 역사적 과제를 이루어나간다.
하지만 반민특위의 앞길은 순탄하지 않았다. 친일파의 반격이 시작된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특위의 권한을 약화시키는 수정안을 국회에 제출하기도 했으며,
국무회의에서 체포된 친일파의 석방을 언급하기도 했다.
또한 반민특위 위원장인 김상덕의 관사를 방문해 직접적인 관여를 하기도 했다.
색깔 공세도 이어졌다. 친일세력은 공산당과 싸우는 투사로 변신했다.
반공투사인 자신들을 잡아넣는 반민특위는 공산당이라는 논리로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급기야 국회 프락치 사건으로 친일청산에 적극적이던 소장의원들이 체포되는 상황도 연출된다.
무산 되어버린 친일파 청산
친일 경찰 노덕술의 체포는 반민특위의 험난한 앞길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일제시대 독립운동가를 체포하고 고문앞장 섰던 친일경찰은
미군정을 등에 업고 기득권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노덕술의 체포는 경찰 전체의 위기로 다가왔으며 경찰은 대대적인 반격에 나선다.
1949년 6월 6일 경찰은 반민특위 사무실을 습격해 특위의 특경대원을 체포한다.
결국 이 사건으로 반민특위는 힘을 잃기 시작했고
친일청산이라는 역사적 과제 역시 무산되고 만다.
반민특위 위원장 김상덕은 계속되는 압력과 탄압에
민족의 과제였던 친일 청산을 이루지 못하고 사퇴하고 만다.
독립운동의 커다란 상징이며 친일세력 청산의 커다란 후원자였던 백범 김구마저 암살되면서
친일청산의 목소리는 잦아들기 시작했다.
체포됐던 친일파들은 하나둘 무죄로 석방되었다.
이승만 정권은 반민특위의 흔적을 지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반민특위 관계자들은 신변의 위협을 피해 숨어 다니기 시작했다.
결국 체포됐던 친일파들은 하나둘 풀려나고 민족정기는 회복되지 못한다.
이들은 다시 권력과 결탁하고 이제 더 이상 친일청산을 언급 조차할 수 없게 됐다.
다시 친일파의 세상이 된 것이다.
이루어져야 하는 친일파 청산의 꿈
김상덕 역시 반민특위의 역사와 함께 그렇게 잊혀졌다.
친일경력자가 독립운동가를 국가유공자로 심사하고
때로는 스스로 독립운동가였음을 자처하던 시대.
김상덕은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했다.
1990년에서야 겨우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았다. 납북인사였기 때문이었다.
김상덕의 독립운동은 복권이 되었지만
실패와 좌절로 끝난 반민특위 활동은 아직 복권되지 않았다.
이제 김상덕은 우리에게 자신이 못 다한 친일청산의 역사를 다시 복권시켜달라 말하고 있다.
친일파들은 일제시대 때는 전 국민이 친일할 수밖에 없었다고 강변했다.
그리고 지식인인 자기들에게 올 수밖에 없는 수난이었다고 변명한다.
60년이 지난 지금, 국회에서 친일진상규명법을 제정해 다시 한번 친일 역사 청산에 나서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그때처럼 진상규명에 대한 논란들이 벌어지고 있고
여전히 친일파들은 그때와 같은 변명을 늘어놓고 있다.
실패로 끝난 반민특위와 김상덕 위원장을 통해 반복되는 오늘의 현실을 되새겨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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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최초의 반민특위 관계인사의 육성 증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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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기억의 보고서 - 증언 반민특위 |
저자: 정운현 | |
출판사: 삼인 출판일 :2004-02-2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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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 전자책, 우량 전자책, 특수 기획 전자책은 모두 문화관광부에서 엄선하여 선정된 전자책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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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민특위에 직간접으로 관여했던 주요 인사 7인의 반민특위 관련 최초의 증언집이다. 역사의 고삐를 쥔 자들의 철저한 은폐와 억압으로 그 동안 가려져 왔던 반민특위의 진상이, 그 관련자들이 살아서 증언할 수 있는 거의 마지막 시점에서 기록으로 복원된 것이다. 반민특위 관련자로서 - 생존자 중 최고위급 인사라 할 수 있는 당시 반민특위 총무과장 겸 특위 조사관 이원용씨, - 당시 [국제신문] 기자로서 반민특위 활통을 현장에서 취재했던 조덕송씨, - 반민특위 산하 특경대의 부대장을 역임한 이병창 씨, 반민특위 위원장 김상덕의 아들 김정육씨, - 반민특위 제2조사부 소속의 서기 출신 임영환씨, - 당시 합동통신 기자로 반민특위 출입 기자중 특종을 가장많이 보도했던 오소백 씨, 그리고 - 해방후 북한정권의 고위직에 있으면서 친일파 청산 작업에 관계했던 인물로 1980년대 초 제3국으로 망명 했다가 한국에 들어온 신경완 씨가 이 책에서 증언자로 나선 이들이다. 특히 신경완 씨의 증언은 남한에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북한의 친일파 청산실태를 뛰어난 기억력으로 생생히 증언하고있어 사료적 가치가 큰 것이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반민특위의 구체적인 구성 경위와 반민자들의 체포 당시의 태도 및 수감시의 정신 상태, 반민특위의 해체를 불러온 이른바 '6.6 사건' 의 경과와 현장의 분위기는 물론이고, 반민특위 활동에 임했던 이들의 역사의식과 개인적인 소회와 성향, 특위 관계자들에 대한 이승만 및 친일파들의 협박·회유책 및 뇌물 공세 등에 대해서까지 소상히 살필수 있다. 이 책에서는 증언자들의 이야기를 되도록 가감하지 않고 그들의 말투까지 살려서 그대로 싣고자 하였다. 비록 기억의 불완전함으로 인해 역사적 사실과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있더라도 증언은 그 자체로 1차 사료가 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다만 엮은이 나름대로 크로스체크를 하고 관련 자료를 토대로 확인한 바들을 각주 형태로 자세하게 실명을 붙였으며, 본문 안에서도 필요한 곳에 괄호를 두어 간단한 해설을 덧붙이는 등 독자의 이해를 돕고자 하였다. 아울러 이 책의 맨 뒤에는 반민특위 관련일지를 실어 반민특위의 전과정을 한눈에 살필 수 있도록 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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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현(저자): 경남 함양에서 태어나 대구고와 경북대 도서관학과를 졸업하였다. 1984년 『중앙일보』에 입사하여 조사부 기자, 부설 현대사연구소, 통일문화연구소 현대사연구소, 통일문화연구소
현대사연구팀 기자를 거처1998년 8월에 『대한매일』로 자리를 옮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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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민특위'와 '친일파', 이 두 사안은 따로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는 주제이다. 하나가 나오면 어느 구석에선가 나머지 하나가 따라나오곤 한다. 마치 '바늘과 실'처럼. 그런데 한 가지 놀라운 것은 친일파에 관한 자료나 문건은 더러 발견되는데 비해, 반민특위에 관해서는 이야기만 있고 그 실체를 보여 줄 수 있는 물증은 아무 것도 눈에 띄지 않는다는 것이다. 몇몇 신문의 연재물이나 석사 학위 논문 한 두 편이 나왔을 뿐 1차 자료는 문건 한 장도 제대로 나오는 것이 없다. 꼭꼭 숨어 있든가 아니면 누군가의 철저한 관련 자료 인멸의 결과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점에서 당시 '반민특위'에 조사위원, 특경대 등으로 관계했거나 취재 기자였던 생존자들의 증언은'반민특위'의 참모습을 그려내는 참으로 소중한 자료이다. |
"잃어버린 기억의 보고서 - 증언 반민특위" 목차 |
* 출처 : 한국학전자도서관,
http://www.kdatabase.com/SchRstBook.aspx?schKeyword=791
* 아쉬운 것은, 이 전자도서관의 자료응 회원가입을 해야만 볼 수 있게 되어 있더군요.
저작권을 보호해야만 하니 당연한 일이지요.
제목 | 증언 반민특위 | ||
저작자 | 정운현 | ||
발표년도 | 1999 | ||
전송일 | 2002-08-01 | ||
전송처 | 코리아콘텐츠랩 | ||
파일형식 | html | ||
발행정보 | 한국현대사통합데이터베이스, 코리아콘텐츠랩, 서울, 2002 | ||
출처정보 | 1999, 삼인, 서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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