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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4 - 인천 개항기

묻혀선 안될 인천 근대건축물 10선

by 아름다운비행 2007. 9. 4.

게으른 소리지만, 인천 역사를 찾아보면서 편리(?)하게 우선 찾는 것이 경인일보가 되어 버렸다.

인천인물 100인 시리즈를 보고 이곳으로 퍼 나르기 시작한 이래 내게는 아주 손쉬운 방법이 되어버렸는데..

나는 비록 인천을 떠나 외지로 나와있지만

경인일보가 꾸준히 인천을 생각하면서 새로운 모습의 인천을 추구하는 것에서

대리만족을 얻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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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http://www.kyeongin.com/news/articleView.html?idxno=344607

 

묻혀선 안될 인천 근대건축물 10선

전통과 현대 잇는 역사의 보고

 

1876년 조선과 일본 사이에 체결된 강화도 조약(한일수호조약 또는 병자수호조약)에 의해 개항장으로 지정된 인천은 1883년 1월에 개항했다. 개항후 일본 등 각국 조계가 형성되면서 인천지역은 근대 여명기를 알리는 역사의 현장으로 부상했다. 부산과 원산에 이어 3번째 개항이지만 서울의 관문인 지리적 특성때문에 정치·외교·사회·문화의 중심지가 됐다. 하지만 열강 침략기의 굴절된 역사 현장으로 부각되면서 정작 근대는 우리에게 잊고 싶은 시대, 지워버리고 싶은 어두운 모습이었다.

1995년 구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가 대표적이다. 근대문화유산을 보호하기 위한 정부의 움직임도 2001년에서야 시작됐다. 등록문화재 제도 도입으로 근대문화유산이 재평가되기 시작된 지 7년째, 인천에선 고작 4건만이 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경인일보는 창간 47주년을 맞아 세상에 주목받을 만큼 드러나진 않았지만 숨은 뜻이 깊은 '인천의 근대건축물 10선'을 새롭게 소개한다. 잘 알려진 근대 건축물이 아니라 저평가된 근대 건축물을 굳이 고집한 이유는 근대화의 보고인 인천이 전통과 현대를 잇는 노력의 중심에 서길 바라는 뜻에서다. '인천의 근대건축물 10선'엔 근대 건축물 전문가인 인천대 김영배 교수와 재능대 손장원 교수가 도움을 줬다. <편집자주>

 

 

 
 

▲ 우리나라 최초 도선사 유항렬의 중구 내동 생가

 

 
 

 

 
 

▲ 맹인의 아버지 송암 박두성 생가

 

 
 

 

 
 

▲ 강화군 송해면 솔정리 고씨 가옥

 

 
 

 

 
 

▲ 중구 송학동 진재근씨댁

 

 
 

 

 
 

▲ 남구 문학동 김영철씨댁

 

 
 

 

 
 

▲ 중구청 건너편 중국풍 연립주택

 

 
 

 

 
 

▲ 송현동 배수지 계단

 

 
 

 

 
 

▲ 자유공원(연오정·석정루)현판

 

 
 

 

 
 

▲ 동구 배다리 한국철도기공지비

 

 
 

 

 
 

▲ 인천세관 선거(독)계 사무실

 

 

유명한 사람이 살면 그 집도 유명해진다. 우리나라 최초의 도선사 유항렬은 중구 내동 143의 1에 살았다. 지상 2층 지하 1층 규모의 화강석 석벽이 쌓인 고급 주택이다. 일부는 신재료로 보수했으나 외관은 원형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다.

한글 점자를 창안해 맹인의 아버지로 불리는 송암 박두성의 생가도 중구 율목동 25의 1에 있다. 'ㄱ'자 목조와즙으로 'ㅅ'자의 맞배 지붕이며 마당은 중정형이다. 생가에는 박두성의 공적과 생가임을 나타내는 기념비가 설치돼 있다.

우리나라에서 흔치 않은 99칸 민가 건물도 있다. 전통적인 한옥에 일본식 건축 양식이 도입된 가옥이다. 강화군 송해면 솔정리에 위치한 고씨 댁 가옥은 1941년에 지어졌으며 'ㅁ'자형 반가형 주택이다. 집 안에는 남자와 여자의 길이 따로 있고, 규모가 매우 커 문화재적 가치가 높은 건물이다. 고씨 아들은 등록문화재 지정에 동의하고 있지만 마을 주민들이 개발을 못한다면서 반대해 무산됐다.

평범한 사람이 살지만 범상치 않은 가옥도 있다. 중구 송학동 2가 7의 1 진재근씨 댁은 벽감 실내에 굵은 나무가 자라고 있다. 1941년에 지어졌고, 목조트러스 위에 일식 기와를 얹은 형태다. 건물 후미에는 1940년대에 건축한 것으로 추정되는 서양식 건물이 함께 붙어 있다.

이 건물의 지붕은 아연 도금된 함석판으로 모임지붕 형태이며 벽체는 조적위 모르타르마감으로 처리돼 있다. 1943년에 지은 남구 문학동 376의 4 김영철씨 댁은 중부지방의 전형적인 민가형태 건물이다. 북동쪽으로 'ㄱ'자형 안채와 'ㄴ'자형 사랑채로 이루어진 'ㅁ'자형 집이다.

안채는 안방-마루-건넌방 순으로 연결돼 있고 안방에는 부엌이, 건넌방 툇마루 밑은 솥을 건 아궁이가 있다. 최근 실내 일부를 음식점으로 개수했으나 근대 민가 건축으로 훌륭해 보존이 필요한 건물이다.

인천 중구청을 바라보고 좌측으로 70여를 걸어가면 중국풍 연립주택을 만날 수 있다. 1939년에 건립됐는데 1930년대 청조계지에 형성된 중국의 사합원 주택의 원형이 그대로 남아 있다. 특히 2층 발코니 형태 및 창호 등의 재료가 특징적이다. 외관 처마 양식도 중국풍인데 차이나타운에 이같은 양식은 손으로 꼽는다. 이 건물 역시 등록문화재 지정이 추진됐으나 주인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원래 인천은 골목과 계단이 유명한 곳이다. 동구 송현3동 23의55에 위치한 송현배수지내 계단을 보자. 장대석을 이용해 22계단으로 엇줄눈으로 쌓아 만들었다. 석재가공은 혹두기 다듬으로 야취감을 살렸다. 자유공원 계단과 화교 입구, 전 인천시장 공관 등에서도 이런 류의 계단을 볼 수 있다.

인천 중구 자유공원에선 현판을 주목해야 한다. 한문으로 石汀樓(석정루)라고 쓰인 현판은 강화가 고향인 서예가 박세림이 쓴 글이고, 한문 然吾亭(연오정)은 검여 유희강의 솜씨다. 이밖에 자유공원은 맥아더 장군 동상(1957년)과 자유의 여신상, 한미수교 100주년 기념탑이 설립, 현대와 전통이 조화를 이루는 곳이기도 하다.

동구 배다리 간선도로변에는 한국철도기공지비를 볼 수 있다. 우리나라 첫 철도인 경인선을 기공한 터이다. 단순하고 소박한 한국철도 최초의 기공지비다. 기차가 서울을 향해 가는 형상이다.

당시의 세관 모습을 그대로 볼 수 있는 유일한 건물도 인천 중구에 있다. 1919년 4월 세워진 화물계 사무실은 현재 경비실로 사용되고 있다. 벽돌조 모임지붕 단층 건물로 쇠락한 상태지만 전체적으로 아담한 느낌을 준다. 선거(독)계 사무실은 1919년 5월 석조기단 위에 벽돌을 쌓아 올린 단층건물로 맨사드 지붕(이중으로 경사를 이루고 있는 지붕)을 올렸다.

■등록문화재 허점·개선책
근대문화유산은 지난 2001년에서야 주목을 받았다. 그 전까지는 지정문화재에만 관심이 있었지 근대문화유산까지 신경쓸 여력이 없었다. 특히 근대문화유산은 강제 침략의 유산으로 인식되면서 끌어안기도 불편한 존재였다. 겨우 국민의 공감대가 형성, 법적 보호장치가 마련됐지만 지정문화재 만큼 효과를 못보고 있다. 등록문화재는 원칙적으로 신고제여서 소유주의 입김이 센 탓이다.

지난 6월 시흥시 소래염전의 소금창고 40동 가운데 38동이 토지 소유주에 의해 일방적으로 철거된 사례가 대표적이다. 문화재청의 문화재 등록 심의를 불과 3일 앞둔 시점이었다. 1930년대에 조성된 소래염전은 일본에 반출되던 소금 생산지로 아픔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시흥시는 2010년까지 염전 일대를 생태공원으로 조성한다며 등록문화재 지정을 추진해 왔지만 사유재산권 침해를 우려한 토지 소유주가 철거해 버린 것이다. 서울 명동의 대한증권거래소와 스카라극장이 사라진 것도 같은 이유다.

문화재청 근대문화재과 관계자는 "대부분의 소유자들은 등록문화재 지정이 개인의 재산권을 침해하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는데 오히려 등록문화재로 지정되면 인센티브가 주어진다"면서 등록문화재 지정에 대한 오해를 풀 것을 호소했다.

등록문화재로 지정되면 외관을 변경하지 않는 한도내에서 용적률 150% 할증을 보장하고 상속세 징수가 유예된다. 또 1가구 1주택 양도세 감면과 재산세 50% 감면 등의 혜택도 주어진다. 용적률 혜택을 실질화하려면 조례 제정이 시급하다. 세부 기준을 지자체가 조례에서 정하도록 위임했기 때문이다. 전국에선 경상남도가 유일하게 관련 조례를 만든 상태다.

일각에선 등록문화재를 신고제에서 허가제로 바꾸는 대신 인센티브를 더 확대해야 한다는 대안이 제시되고 있기도 하다. 이밖에 인천시의 적극적 행보도 필요하단 지적이다.

 

 

지홍구 gigu@kyeongin.com / 2007년 09월 03일 (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