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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4 - 인천 개항기

[해방기 격동의 현장 인천] 패망 앞두고도 극심한 수탈

by 아름다운비행 2005. 9. 20.

 지난 1945년 해방을 전후해 강화와 수봉산, 남동구 논현 지역이 굴절된 역사현장의 중심이었다는 사실이 당시 기록에서 증명되고 있다. 〈관련기사 14면〉

 조선총독부 기관지로 발행되던 매일신보의 1945년 1월부터 8월까지의 기사에는 거의 매일 강화지역 기사가 빠짐없이 등장하고 있다. 1945년 8월2일자엔 '지키자 향토의 대공(大空)', '방위간담회', '결전저축이 호적' 등의 강화기사에서 패망을 앞둔 일제의 마지막 발호가 가감없이 드러나고 있다. 또 신문엔 당시 강화 인구가 10만명이라고 적고 있어 지금의 강화군 인구(6만5천여명)보다 많았음을 짐작케 하고 있다. 해방시기 인천부(시)의 인구가 25만명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당시 강화의 중요성을 가늠케 하는 대목이다. 소나무가 많았던 강화는 또 일제가 항공기의 연료로 송진 기름을 쓰기 위해 소나무 남획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는 사실도 당시 신문에서 비중있게 게재됐다.(자료협조 인천학연구원)

 해방 직전 인천지역에선 또 각종 공출(供出)사업과 소개(疏開·적의 공습이나 화재 따위에 의한 손해를 적게 하기 위하여 집중되어 있는 사람이나 시설 따위를 분산시킴)관련 신문기사에서 나타나고 있다. 매일신보 7월15일자는 전화기도 병기(兵器)로 취급해 공출운동까지 벌였다는 기록이 있어 전쟁 막판 일제의 극심한 수탈 현장을 적시하고 있다.

 해방되던 해 중학교 2년생이던 배경숙(75) 인하대 명예교수는 “해방직전 미군의 공습을 피하기 위해 주민들을 이곳저곳으로 대피시키는 소개가 자주 있었는데, 인천에선 주로 남구 수봉산과 남동구 논현지역, 강화지역 등이 대표적이었다”고 말했다. 어린시절을 중구 경동에 살았던 배 교수는 당시 걸어서 수봉산까지 가는 소개 길이 너무 멀게 느껴졌다고 회고한다.
 그는 또 해방 직후 인천을 떠나 본국으로 향하는 일본인들을 우리 여학생들이 몸수색을 벌였다는 사실도 전했다.

 특히 해방기 인천은 전국에서 가장 먼저 우리말 지역신문인 대중일보가 창간되는 등 민족 정체성을 세우기 위한 정점에 있었던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정진오·schild@kyeongin.com / 2005.8.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