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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스페셜 리포트/韓·中 역사전쟁 제2탄!]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 학술발표회

by 아름다운비행 2007. 3. 22.
[스페셜 리포트/韓·中 역사전쟁 제2탄!]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 학술발표회
[지상중계]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 대책 학술발표회에 참석한 학계 인사들이 중국에 항의하는 성명서를 낭독

이른바 ‘東北工程’을 통해 고구려 역사 왜곡에 나선 중국측은 고구려 遺民의 거취까지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나라가 망한 이후 고구려 주민의 대부분이 漢族에 흡수됐기 때문에 그 역사도 자연스럽게 중국의 일부가 됐다는 것이다. 같은 논리로 중국측은 고구려 유민들이 세운 발해의 정체성마저 부인하려고 든다. 이러한 중국측의 주장이 전혀 설득력이 없다며 우리 학계가 본격적으로 반론에 나선 가운데, 지난해 12월9일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 대책 학술발표회’에서 나온 관련 논문 2편을 요약해 게재한다.

■ 고구려 유민들 어디로 갔나?

… 신라·돌궐·일본 등으로 흩어져


중국측의 ‘고구려 유민의 漢族化’ 주장은 억지춘향
唐나라, 고구려 포로들 봉기 우려해 변방으로 강제 이주시켜


중국 정부와 학계에서 고구려사 귀속 문제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 1990년대 중반 이후 대규모 학술대회가 여러 차례 개최되면서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는 논고들이 연이어 발표되었다. 이 논고들은 모두 고구려 유민들이 대거 한족으로 편입되었으므로 고구려사는 한국사가 아니라 중국사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과연 그럴까. 668년 나당연합군에 의해 평양성이 함락된 후에도 고구려 지역에는 상당수의 주요 성들이 여전히 저항하고 있었다. 당나라는 항쟁을 계속하는 유민에 대한 지배를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나누어 실시했다.

하나는 사민책(徙民策)으로 왕을 비롯한 상층 귀족과 호강자(豪强者)들을 대거 당 내지로 옮겨 부주(府州)에 편제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고구려 고토(故土)를 기미주로 편제한 다음 남아 있는 사람들을 예속시켜 집단적으로 통치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당의 지배에 대해 고구려 유민들은 집단이주와 무력항쟁으로 저항했다. 많은 고구려 유민들이 도망하고 흩어져 평양과 그 주변 일대에 대한 기미통치는 처음부터 흔들리게 되었다. 더욱이 검모잠 등이 벌이는 고구려 부흥 운동과 신라의 대당 투쟁이 서로 연결되면서 평양의 안동도호부를 중심으로 실시하려고 했던 지배안을 대폭 수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당은 고구려 유민들의 반발을 고려해 668년부터 안동부에 재직해 왔던 중국인 관리를 모두 파직하고, 그 다음 해에 보장왕을 요동 도독으로 삼고 조선왕에 봉한 뒤 요동으로 보내 지역민들을 안무하게 했다. 이때 당 내지로 강제 이주시켰던 유민들도 대부분 다시 돌려보냈다. 전에 비해 훨씬 유화적인 정책을 실시했던 것이다. 그 결과 요동 지역 지배는 조금 안정되는 듯했다.

고구려 멸망을 전후해 신라 지역으로 간 고구려인들도 많았다. 666년 12월 고구려의 대신 연정토(淵淨土)가 12개 성읍 763호, 3,543명을 거느리고 신라로 갔다. 문무왕 8년(668) 나당연합군의 고구려 공격이 시작되기 직전 고구려의 대곡(大谷)·한성(漢城) 등 2군성(郡城)이 투항하기도 했다.

669년 2월에는 안승(安勝)이 4,000여 호를 거느리고 신라로 갔으며, 검모잠이 주도하던 고구려 부흥 운동이 좌절된 후 여기에 참여했던 사람들도 대부분 신라로 갔다. 나당전쟁에서의 승리 이후 패서 지역 사람들도 신라로 편입되었고, 문무왕이 고구려 멸망 때 포로로 잡아온 7,000명의 고구려인들도 있었다.

신라는 고구려 유민들의 바람과 달리 그들을 금마저(金馬渚 : 익산)로 옮겼고, 670년 8월 안승을 고구려왕으로 책봉했다. 고구려가 망한 뒤 2년 만에 고구려 유민들의 나라가 세워진 것이다. 그러나 신라 영토 안에 건국된 고구려는 근본 자주권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671년과 672년의 사행(使行)을 제외하고는 고구려국의 사신이 일본에 파견될 때 신라가 이들을 수행하는데, 이는 고구려국의 동향 및 대일본 외교를 감시, 감독하기 위해서였다. 그나마 682년 6월의 견사(遣使)를 끝으로 고구려국의 대일본 외교 사행은 보이지 않는다.

신라는 674년 9월 안승을 보덕왕에 봉했다. 이는 ‘고구려왕’이라는 칭호 자체를 부정함으로써 고구려 계승 의식을 제거하고 신라에 복속된 소국으로 격하시키려는 조치였다. 신라 역시 자국의 정치적 필요에 따라 고구려 유민들에게 건국을 허용했다 필요성이 없어지자 소멸시키고 일반 주군의 백성으로 편재한 것이다.

돌궐쪽으로 들어가거나 일본으로 건너간 사람들도 있었다. 이 중 돌궐로 간 사람 가운데 일부는 당의 영향력이 확대되자 다시 당으로 귀부하기도 했다. 당 현종(玄宗) 개원(開元) 3년(715) 당으로 넘어가 관직을 받은 고문간(高文簡)과 고공의(高拱毅) 등이 그들이다. 거란에 의해 발해가 멸망한 후 요동 지역으로 옮겨졌던 발해민들은 뒤에 다시 중국으로 편입되었다.

중국으로 간 유민 가운데는 연개소문의 아들인 남생과 그 아들인 헌성, 고족유 등 국가의 운명을 예측하고 자신과 가족의 안전과 개인적 영달을 위해 자진해서 건너간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나라가 망한 후 당의 정책에 따라 강제로 집단 이주되었다.

당은 려·수(麗隨)전쟁을 비롯해 중국과의 허다한 전쟁 과정에서 이미 고구려인의 강인한 정신력과 군사력을 확인했으므로 나라가 망하더라도 다시 모여 부흥 운동을 벌이고 당에 대적할 것임을 예상했다. 그래서 그 가능성을 근본적으로 소멸하기 위해 원래의 영토에서 멀리 떨어진 원거리 지역으로 고구려인들을 집단 사민했다. 이곳으로 옮겨진 유민들은 고국과의 접촉 가능성이 차단되었으므로 부흥을 도모할 수 없었다.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 척박한 지역을 개간해야 했다. 부병제에 편입됨으로써 당의 지방 군사력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고구려 유민’ 자의식 강해

다음으로 고구려 유민들의 자의식이라는 측면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강회(江淮) 이남 지역 및 산남(山南)과 경서제주(京西諸州)의 공광지지(空曠之地)로 보내졌던 사람들은 보장왕이 요동으로 돌아갈 때 함께 되돌려 보내졌다가 보장왕과 말갈의 복국(復國) 기도가 발각된 후 다시 옮겨졌다.

이들은 당 조정의 감시와 통제 아래 집중 관리되었다. 따라서 비록 심정적으로는 고구려 부흥을 꿈꾸면서 당의 지배를 거부하더라도 현실적으로는 아무런 활동도 할 수 없었다. 이들은 살기 위해 중국사회에 적응할 수밖에 없었다. 몇 세대를 지난 후에는 모두 중국인으로 될 수밖에 없었다.

이들과 달리 중국에서 고위직에 올라 부귀와 영화를 누렸던 사람들이 있었다. 보장왕의 후손들과 연개소문의 자손들 그리고 일부 자진투화한 귀족들이 그들이다. 이들은 일반 유민들과 달리 중국 내에서도 특권을 누렸으므로 고구려인으로서 의식보다 중국의 신민이라는 의식이 더 강했을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런데도 그들의 묘지명과 사료에 나오는 유민들의 출신지 표시를 보면 대부분 고구려의 후손임을 밝혀 놓고 있다. 이는 고구려 멸망후 많은 시간이 흐른 뒤까지도 고구려 유민들의 정체성이 완전히 소멸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발해를 건국한 사람들이나 신라로 가서 보덕국을 세운 사람들은 고구려인으로서의 강한 자의식을 분명하게 가지고 직접 고구려 부흥에 참여했다. 당으로 간 사람들은 강제 피랍된 경우이지만 신라로 간 사람들은 전쟁포로를 제외하고는 모두 자진 귀부한 경우였다. 신라나 당 모두 고구려의 적국으로 고구려를 멸망시킨 주체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는 매우 의외적인 일이며, 그런 점에서 주목해서 살펴봐야 할 점이 있다.

그들이 당이 아닌 신라를 택해 귀부했던 것은 곧 당보다 신라에 더 친연성을 느꼈다는 것을 말해 주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친연성이란 지리적 측면에서의 근접성만을 말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역사적 측면과 문화적 측면, 종족적 측면에서 공유점이 있었기 때문에 느끼는 공감대이자 친연성일 것이다.

고구려 붕괴후 많은 수의 고구려인들이 중국으로 흘러 들어갔다. 그렇지만 신라로 내려와 한국사의 흐름 속에 융입된 경우도 많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발해국(698∼926)의 역사에 대해서는 한국은 물론 중국·러시아·일본에서도 관심이 높다. 이들 국가는 현재의 영토가 과거 발해국의 일부였다는 사실에서 발해사에 대한 연구를 소홀히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김현숙 경북대 영남문화연구원 연구원 [2004년 08월호] 2004.08.19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