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

[스페셜 리포트/韓·中 역사전쟁 제2탄!] 광개토태왕의 南征北伐

by 아름다운비행 2007. 3. 22.
[스페셜 리포트/韓·中 역사전쟁 제2탄!] 광개토태왕의 南征北伐
대흥안령, 사할린까지 영토 개척

경주의 신라시대 고분 호우총에서 발견된 그릇.

중국 5호16국 시대 혼란 이용 팽창정책 추진
왜국 궤멸하며 임라가야 정복… 백제, 奴客 맹세


광개토태왕(이하 ‘태왕’)은 고구려 제19대 왕이다. 태왕은 374년에 태어나 391년 아버지인 고국양왕의 뒤를 이어 즉위했다. 이 시기는 동북아시아 역사상 대격변기였다. 4세기 들어 흉노(匈奴)·갈(켨)·선비(鮮卑)·저(흷)·강(羌) 등 북방의 이민족들이 대거 중국 대륙에 진출해 각기 국가를 세우고 난립했다.

역사에서는 이 시기를 5호16국시대라고 한다. 중국이 이처럼 여러 세력으로 분열되어 혼란에 빠지자 고구려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적극적으로 팽창정책을 꾀하였다. 태왕의 대외 정복은 바로 이러한 동북아시아의 국제정세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광개토태왕비를 중심으로 태왕의 생전 업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즉위초 거란 공격, 백제·신라는 臣民 삼아

거란 정벌 : 영락 5년(395) 태왕은 패려(稗麗)의 3부락 600∼700 영(營)을 공파하고 수많은 소·말·양 등을 노획했다. 패려는 거란족을 구성하던 8부 중 하나인 ‘필혈부’를 가리킨다. 유목민족인 거란은 나중에 고구려의 계승국인 발해를 멸망시키고 중국 역사상 최초의 정복왕조인 ‘요’(遼)를 건국한 민족이다.

일찍이 거란은 소수림왕 때부터 변경을 침입해 고구려에 피해를 입혔다. 때문에 태왕은 즉위 초부터 거란에 대한 공격을 감행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에 따르면 태왕은 즉위한 해인 391년(영락 원년) 북쪽의 거란을 쳐 500여 명을 사로잡았다고 한다.

당시 태왕에게 격파당한 거란은 원래 거주지인 내몽고 흥안령 산맥 남쪽의 시라무렌 유역을 떠나 난하 상류의 염호로 이동하던 거란족의 일부로 추측된다. 시라무렌 유역은 후연(後燕 : 고구려 서쪽에 선비족이 세운 국가)의 수도인 용성(龍城: 현재 요령성 조양)의 서북쪽으로, 이는 고구려가 거란을 공격해 후연을 견제하려는 목적으로 행한 공략이었다고 할 수 있다. 즉, 고구려는 후연이 거란과 연결해 고구려를 압박할 수 있는 상황에 대비해 먼저 거란을 격파함으로써 후연과 거란의 연결을 차단했던 것이다.

삼국사기에는 광개토태왕 대에 후연이 멸망하고 고구려계 인물인 고 운이 북연(北燕) 왕으로 즉위하기 전까지 고구려와 후연 사이에 여러 차례 공방전이 있었음이 기록되어 있다. 때문에 고구려는 후연을 견제하는 데 적극적이었다.

한편 이를 계기로 고구려는 내몽고 초원지대로의 진출을 적극 추진했다. 내몽고 지역으로의 진출은 고구려의 세력권이 서북 지역으로 확대되는 계기가 되었을 뿐 아니라 이 지역에서 나는 가축을 획득해 경제적 이익도 챙길 수 있었다.

특히 정복전쟁에서 중요한 군사적 재원이었던 기마병의 구성을 위해 질 좋은 말의 확보는 필수적이었다. 고구려는 거란을 공략하고 내몽고 초원지대로 진출해 이를 해결했던 것이다.

왜구 격퇴 : 비문에 따르면 태왕은 신묘년(辛卯年, 391) 이래 바다를 건너 쳐들어온 왜구를 격파하고 백제와 신라를 신민(臣民)으로 삼았다. 이 ‘신미년’ 기사는 비문 중 가장 논란이 많은 부분으로, 조작설이 제기된 구절이기도 하다.

이 부분의 해석을 두고 일부 학자들은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신라를 신민으로 삼은 주체를 왜, 즉 일본으로 보기도 했다. 그러나 비석이 태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것임을 생각할 때 당연히 비문의 주체는 고구려 또는 태왕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 기사는 왜구가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연합해 신라를 침입하자 고구려 군대가 왜구를 격파하고 백제와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는 내용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생각된다.

이 후에도 백제는 왜와 연합해 신라를 침입했다. 영락 9년(399) 태왕이 순시차 평양에 갔을 때 신라 왕이 왜구가 쳐들어왔음을 고하고 구원을 요청하자 이듬해인 400년 보병과 기병 5만명을 보내 신라를 구원했다. 이때 고구려의 원정군은 달아나는 왜구를 추격해 임나가야와 아라가야까지 쳐들어가 전기 가야 연맹체를 해체하고 왜구를 궤멸시켰다.

이 시기 한반도에 건너와 신라를 괴롭히던 왜구는 독자적으로 활동한 세력이라기보다 백제의 요청에 의한 일종의 용병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영락 14년(404)에도 대방계(帶方界)에서 왜구를 궤멸시켰다는 기록이 있는데, 대방 지역이 고구려와 백제의 경계 지역임을 생각할 때 이 왜구 역시 백제의 요청으로 출병하였다가 태왕의 군대에 섬멸당했다고 할 수 있다.

즉, 백제는 왜의 지배세력에게 선진 문물을 전수해 정치적 후원을 하는 대신 군사력을 제공받아 당시 고구려의 영향권 아래 있던 신라를 공격함으로써 고구려의 남진을 견제하고자 했던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러한 백제의 행동은 고구려의 대대적인 공격을 초래했다.

팽창 정책의 완성 ‘동부여 정벌’

백제 공파 : 앞서 비문에 등장하는 왜구의 실체를 백제의 요청으로 출병한 일종의 용병이라고 하였는데, 고구려군이 왜구를 격퇴하는 과정에서 백제도 큰 타격을 받았다. 이에 그치지 않고 태왕은 백제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도 감행했다. 비문에 의하면 영락 6년(396) 태왕은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백제를 공격해 한강을 건너 백제를 위협했다. 백제 왕은 남녀 1,000명과 가는베 1,000필을 바치며 태왕 앞에 무릎을 꿇고 영원히 노객(奴客)이 되겠다고 맹세했다. 이 때 고구려군은 백제의 58개 성과 700여 마을을 탈취하고 백제 왕의 아우 및 대신 10명을 거느리고 돌아갔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후에도 백제는 왜구를 동원해 공공연히 고구려에 적대적인 행동을 했다. 이에 대해 고구려는 적극적으로 응징해 왜구를 격퇴하는 동시에 백제를 쳤다. 비문 중 영락 17년(407)의 기록은 공격 대상이 확실하지 않아 이를 후연과 관련된 기록으로 보기도 하고 백제와 관련된 기록으로 보기도 한다.

이 해에 태왕은 보병과 기병 5만명을 보내 적을 소탕하고 갑옷 1만여 벌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군수품과 장비를 노획했다. 고구려군은 돌아오는 길에 여러 성을 공파했는데, 그 중 하나인 사구성(沙溝城)을 삼국사기에 나오는 백제의 사구성(沙口城)으로 보면 이 영락 17년의 기사는 백제 공략과 관계된 기사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 고구려는 적극적으로 남진 경영에 힘썼고, 이에 맞서 백제는 왜구까지 동원해 고구려에 대항하는 한편 고구려의 영향권 아래 있던 신라를 공격해 고구려의 침입을 초래했다. 이는 한반도 남부 지역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고구려와 이를 적극 저지하려는 백제의 이해가 상충하면서 발생한 충돌이었다고 할 수 있다.

동부여 정벌 : 영락 20년(410) 태왕은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동부여를 토벌해 64성과 1,400개의 촌락을 공파했다. 이 동부여의 위치에 대해서는 길림성 일대로 보기도 하나 목단강에서 두만강 유역의 연해주 일대로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비문에 기록된 태왕의 정복 지역 중 마지막을 장식한 동부여 정벌 기사는 전방위에 걸쳐 진행된 고구려 팽창 정책의 완성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한편 비문의 기록에 따르면 영락 8년(398) 태왕은 군대를 보내 숙신(肅愼) 지역을 순시하게 했는데, 여기에 등장하는 숙신에 대해서는 설이 분분하다. 숙신을 강원도 일대에 거주했던 원주민으로 보기도 하고, 백두산 이북 길림 일대 또는 송화강 유역에 거주했던 주민으로 보기도 한다.

숙신에 대한 기사는 정복지가 아니라 지배 지역에 대한 순시라는 점에서 다른 정복 기사와 구분된다. 태왕은 정복지를 통한 지배 영역의 확대뿐만 아니라 이미 복속된 지역에 대한 지배력 강화에도 힘썼음을 알 수 있다.

후연과의 전쟁 : 또한 삼국사기에는 비문의 기록 중에는 보이지 않는 후연과의 전쟁 기사가 여러 차례 나와 있다. 이는 서로 국경을 맞대고 있던 고구려와 후연이 세력권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여러 차례 충돌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앞에서 고구려의 거란 공략 역시 후연을 견제하려는 의도에서 이루어졌음을 이미 언급하였다. 이 시기 고구려는 요동 지역을 완전히 장악하고 요하를 건너 요서 지역까지 진출해 후연을 위협했다. 태왕 11년(401) 고구려가 후연의 숙군성(요령성 북진 부근)을 공격하자 평주 자사 모용귀는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또 ‘진서’(晋書)의 기록에 의하면 403년에도 고구려는 후연의 연군(북경 부근 또는 요령성 남쪽 일대로 추정)을 공격했다. 후연의 고구려 침입도 있었지만 407년 내부 반란으로 후연이 멸망하고 양국 간의 충돌도 막을 내렸다.

고구려 역사상 태왕의 통치 시기는 전방위에 걸쳐 정복전쟁이 실시되어 고구려의 영토가 비약적으로 확장된 시기였다. 북으로 내몽고, 서로 요서 지역, 동으로 연해주 지역에 걸쳐 지배 영역을 확대하고 남으로 신라와 백제 지역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했다.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이라는 왕의 칭호가 태왕의 업적과 위대함을 상징한다고 하겠다. 이를 계기로 고구려는 동북아시아의 강국으로 부상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 광개토태왕 연보 -

연도 업적
374 탄생
386 태자에 봉해짐
391 즉위
392 백제 북쪽 변경의 10개 성을 함락시킴 고구려 북쪽의 거란을 정벌
393 평양에 9개의 사찰을 건립
393∼395 한강 유역을 둘러싸고 백제와 교전
395 내몽고 시라무렌 유역의 거란 부족을 정벌하고 요동 지역 순시
396 수륙 양군을 동원해 백제를 쳐 한강 유역 58개 성을 함락시킴
398 국경지대를 순시하고 신라와 숙신을 복속시킴
400 신라에 쳐들어온 왜구를 격퇴하고 임나가야와 아라가야를 멸망시킴
401 요서 지역에 진출해 후연의 숙군성 공략
403 후연의 연군을 공격
404 남부 국경에서 백제와 왜 연합군 격퇴
405 국경을 침입한 후연군 격퇴
407 후연이 망하고 고구려계 인물인 고 운이 북연 왕에 즉위하자 북연을 고구려의 영향권 아래에 둠
백제를 공략해 6개의 성을 함락시킴
410 동부여 및 연해주 일부 지역 정복
412 사망
강 선 숙명여대 강사 [2004년 08월호] 2004.08.19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