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 리포트/韓·中 역사전쟁 제2탄!] 광개토태왕 비문에 나타난 ‘天下觀’ 입체 조명
“고구려는 天孫國, 동방의 패자” |
중원 민족과 다른 독자연호 사용하며 북방 일대에 대제국 건설 남진 정책은 민족사 발전 과정에서 나타나는 통일 의지의 구현 광개토태왕은 소수림왕 4년(374년)에 태어났으니, 바로 백제의 정복군주인 근초고왕의 몰년에 해당한다. 이는 당시 동아시아의 축을 이루었던 고구려와 백제의 대립에서 명암이 엇갈리는 숙명적 사건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태왕의 인간적 면모를 담은 기록은 희소하지만 대체로 ‘태어나실 때부터 체격이 웅위하고 기상이 늠름했으며 성인(聖人)의 풍모를 지녔다’고 전한다. 태왕의 이름은 ‘담덕’(談德)이나 재위시에는 ‘호태왕’(好太王) 또는 ‘영락태왕’(永樂太王)으로 불렸으며, 능비에 의하면 연호는 ‘영락’(永樂), 시호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다. 태왕은 18세 나이로 즉위(391년)한 이후 22년 간의 짧은 재위 기간에 남정북벌하여 고구려사에서나 민족사에서 한 시대를 구획하는 문자 그대로 ‘광개토경’의 위업을 이룩했다. 태왕은 역사상 두 번 태어났다고 할 수 있다. 자연인으로서의 출생과, 태왕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광개토태왕비가 19세기말 재발견됨으로써 그의 업적이 보다 뚜렷한 실체로서 우리에게 다가온 사실이 바로 그것이다. 광개토태왕비는 ‘광개토경’의 위업을 이룩한 태왕의 훈적을 기리는 송덕비로, 당대 고구려 정치사의 다양한 사실이 유기적으로 구성된 생생한 역사 기록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광개토태왕의 팽창 정책을 비롯해 고구려인의 독자적 천하관(天下觀) 등 고구려사의 발전 과정은 물론 동아시아 세계의 생동하는 국제관계를 파악할 수 있다. 태왕이 세상을 뜨고 2년째 되던 장수왕 3년(414) 9월 그 훈적을 기리기 위해 국내성 고도에 태왕릉과 함께 기념비가 세워졌으니, 이것이 저 유명한 ‘광개토태왕능비’다. 이 능비는 한국사에서는 물론 세계사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거대한 사면 석비로, 당대 고구려 문화의 결정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능비는 우리가 흔히 보는 화강암이 아니라 방주형의 현무암질 화산암에 약간의 인공을 가한 것이다. 예서체에 가까운 고구려 특유의 웅혼한 필체로 44행 1,775자의 문자가 음각되어 있어 최근에 발견된 중원고구려비와 더불어 당대 고구려사를 밝혀주는 최고의 금석사료(金石史料)로 평가된다. 그러나 이 능비는 고구려의 멸망으로 잃어버린 만주의 옛 땅과 더불어 역사의 비밀 속에 묻히고 말았다. ‘용비어천가’ 등 조선시대의 문헌들에 단편적인 기록이 남아 있으나, 여진족의 유적으로 오인했을 뿐 이를 태왕의 기념비로 인식했던 것은 아니었다. 일본 역사 왜곡의 허구 드러나 오랫동안 잊혀졌던 능비의 재발견 경위에 대해서는 정설이 없으나, 대체로 청나라가 만주 지역의 봉금(封禁)을 푼 직후인 1880년께 개간에 종사하던 농민들에 의해 발견되었다. 황량한 벌판에 우뚝 서 있던 능비는 2층의 누각 속에 보호되었으나, 화재로 누각이 소실된 후 1982년 새로 건립된 단층 대형 비각 속에 있었다. 최근에는 유리로 사방을 막고 삼엄한 경비 속에 일반인의 접근이 불허되고 있다. 능비가 발견되었을 때는 석면(碑面)의 불량으로 정교한 탁본은 만들어지지 못하였다. 오히려 초기에는 문자를 임의로 판정한 뒤 문자 테두리를 먹으로 칠한 쌍구가묵본(雙鉤加墨本)이 일반적이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1882년께 만주를 정탐하던 일본 밀정인 포병 중위 사까와 카게노부(酒勾景信)에 의해 비문의 일부 문자가 변조되기에 이르렀다. 그 뒤 일본과 청나라 양국에서 비문 변조를 합리화하거나 고가 매매를 위해 비면에 석회칠을 하기 시작했으며, 이러한 과정에서 비문의 마멸과 일부 문자가 오독되기에 이르렀다. 한편 최근 중국 학계에서는 고구려를 중국의 지방사로 편입하는 동시에 광개토태왕비도 중국의 유적으로 설정하고 광개토태왕의 남진을 중국 동북 소수민족 고구려와 한반도의 백제·신라의 싸움처럼 왜곡해 능비 연구는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능비의 연구는 이와 같이 고구려사를 비롯한 한국 고대사 자체의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근대 일본과 오늘날 중국 학계의 한국사 왜곡에 대한 비판에 연결되며, 나아가 동아시아 교섭사(交涉史)의 문제로 확대된다. ‘황제’ 의미하는 ‘태왕’ 호칭 사용 광개토태왕은 이미 1,600년 전의 인물로 우리와는 시공을 달리하는 역사적 존재지만, 이러한 점에서 오히려 우리와 호흡을 같이하는 현재적 의미를 갖는 인물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광대토태왕비의 올바른 해석과 연구는 곧 왜곡된 한민족사의 재구성을 의미할 뿐 아니라 동아시아 교섭사의 정당한 이해와도 직결된다. 이처럼 역사적 의미가 결코 작지 않은 능비에 담긴 광개토태왕과 고구려의 천하관은 과연 어떠했을까. 능비의 서문과 모두루묘지명에는 고구려의 시조 추모왕을 ‘천제지자, 황천지자, 일월지자’ 등으로 최고의 존칭을 사용해 그 존엄성을 기리고 있다. 이는 당대 고구려가 천손국으로 하늘과 혈연이 이어져 있음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중원 왕조의 추상적인 천자와 대비된다. 이와 함께 주목되는 것은 고구려가 성왕(聖王)과 태왕호 및 연호를 사용했다는 점이다. 광개토태왕의 시호인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 속에는 태왕의 생전 업적은 물론 이러한 당대 고구려의 천하관이 함축되어 표현되어 있다. ‘국강상’은 장지(葬地)명이며, ‘광개토경’과 ‘평안’은 각각 외정(外政)과 내치(內治)의 업적을 간결하게 표현한 말이다. ‘호’는 미칭, ‘태왕’(太王)은 제왕호다. 태왕이란 대왕 중의 대왕, 곧 우리말로 황제를 의미하는 표현이다. 능비에는 ‘사해, 사방’이라는 표현과 함께 ‘백제나 신라 왕이 항복해 노객(奴客)을 자처하며 신하의 예를 올리면 태왕이 은덕을 베풀었다’는 표현이 빈번한데, 이는 바로 천하 사방의 중심이 고구려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영락은 고구려사에 처음 나타나는 독자적 연호다. 당시의 동아시아에서 중원의 천하 질서에 포함된 주변국은 일반적으로 중원 왕조의 연호를 사용하는 것이 관례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광개토태왕이 영락이라는 독자적 연호를 사용한 것은 바로 고구려가 중원 왕조에 대응하는 새로운 천하 질서를 동방에 구축하고 그 패자임을 천명한 것이다. 광개토태왕은 위대한 정복군주인 동시에 유능한 통치자였다. ‘광개토경’도 단순한 영토 확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곡풍숙, 국부민은’(五穀豊熟,國富民殷)이라는 표현에서 보는 바와 같이 민생 안정과 국부를 함께 추구하는 경세적 안목에서 추진되었다. 소수림왕대 이래 다져온 문화 기반도 이 때에 이르러 보다 공고하게 되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영락 2년 평양에 9개의 사찰을 지었다고 하는데, 이는 새로운 정치 이념의 필요로 수용한 불교가 종교로서 생활 속에 정착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요컨대 광개토태왕비에 나타난 고구려의 천하관은 천손 의식을 바탕으로 태왕권으로 표현되는 제국의 질서를 완성하고자 한 고구려의 국가적 자존 의식과, 중국에 대응하는 동방의 패자라는 대외 의식을 사해에 천명한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능비는 당대 고구려인의 독자적인 천하관을 반영한 역사의식의 결정체이며 고구려 문화의 금자탑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북방 경략과 宗法的 제국 질서 img3R광개토태왕은 소수림왕 대의 문화 정책과 고국양왕 대의 철 산지인 요동 확보를 기반으로 다진 국력을 앞세워 남진(南進) 정책을 강화했다. 동시에 전통적인 중국 대륙으로의 서진(西進)을 비롯한 북방 영역 개척에도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서북으로는 요하를 넘어 멀리 대흥안령 남록의 사라무렌강 유역까지 진출해 거란 제 민족을 정복함으로써 이후 고구려의 동몽고 초원 진출 교두보를 확보했으며, 서남으로는 후연(後燕)을 공략해 대릉하 유역까지 진출했다. 동북으로는 조공(朝貢)을 중단한 동부여(東夫餘)를 친정해 복속시켰다. 능비의 북방 경략 기사는 남진 기사에 비해 비중이 낮으나, 과소평가되어서는 안 된다. 정복 기사의 처음과 마지막을 장식한 만주의 극서 대흥안령과 극동인 연해주 지역의 정복 기사는 ‘자치통감’(自治通鑑)에 보이는 후연 정토 기사와 더불어 당대 고구려 팽창 정책의 완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종래에 광개토태왕의 서정을 요동 일대로 한정했던 중국학계의 견해는 수정되어야 마땅하다. 주목되는 것은 후연이 고구려와의 항쟁 과정에서 쿠데타가 일어나 붕괴되고 고구려의 지속인 고 운(高雲)이 왕위에 오르게 되는데, 이는 고구려의 영향력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영락 17년 태왕이 ‘북연왕 고 운에게 종족(宗族)의 예를 베푸니, 고 운이 사신을 보내 보답했다’는 기사는 이 점을 보다 분명히 보여준다. 이는 고구려가 대종, 북연이 소종이 되는 관계로 천자가 제후를 통제했던 중원의 종법적 봉건질서를 고구려가 동방에 구현해 북연을 신하국으로 삼았음을 의미한다. 동부여 정벌도 천자(天子)가 신하를 다스리는 조공지배(朝貢支配)를 이상으로 하고 있다. 이는 고구려가 북연·동부여등을 신하국으로 삼아 태왕으로 표현되는 제국의 질서를 완성했음을 의미한다. 고구려의 대외발전에서 북방 진출 못지 않게 중요한 정책적 목표는 남진에 있었다. 능비에서도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백제 정토전과 신라 복속책 및 왜(倭) 토멸전으로 표현되는 남진 정복 기사다.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비문에는 남진 기사가 많은데, 그 이유는 무엇이며 역사적 의미는 또 무엇일까. 남진 정복 기사 가운데 특기할 만한 것은 왜의 등장으로 한·일 양국에서 과민한 반응을 보이는 부분이다. 그러나 비문에서 고구려의 왜 토벌전은 오히려 그 성격이 명확하다. 고구려의 남진에서 왜는 백제·신라·가야와 달리 복속의 대상이 아니라 공멸(攻滅)의 대상이다. 비문의 임나가라는 대가야의 원명으로 추정되며, 작전 과정에서도 가라·안라 등이 주이며, 왜는 종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비문의 기사는 일본에서 주장하는 ‘임라일본부’의 근거가 되기는커녕 오히려 이를 반증하는 자료다. 주목되는 것은 신속의 대상은 백제·신라·가야였으며, 왜는 부수적 세력으로 단지 토멸의 대상일 뿐이었다는 점이다. 이는 당대 고구려가 백제·신라·가야를 왜와는 성격이 다른 동일 민족집단으로 인식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중원 고구려비의 ‘세세위원, 여형여제, 상하상화, 수천’(世世爲願, 如兄如弟, 上下相和, 守天)은 그 단적인 표현이다. 따라서 광개토태왕의 남진 정책은 농경지 확보에도 목적이 있었지만, 단순히 구복(口腹)을 채우기 위한 침략전쟁이 아니라 민족사의 발전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동일 민족의식을 기반으로 한 통일 의지의 실천적 구현이라는 점에 그 역사적 의미가 있다. 최근 중국에서는 고구려를 중국 변방 소수민족의 역사로 논단하고, 그 근거로 고구려의 선조가 중원 민족의 한 갈래이고, 중원 왕조의 통치질서 안에서 건국하고 발전하였으며, 중원 왕조에 신속했다는 점을 들고 있다. 그러나 광개토태왕비를 통해 본 고구려는 중원 민족과 달리 천손 의식을 바탕으로 한 강렬한 자존 의식을 갖고 있었다. 중원 왕조의 통치질서 안에서 발전하기는커녕 광개토태왕은 서쪽으로 요하를 넘어 대릉하(大凌河) 유역에서부터 멀리 대흥안령 산록의 시라무렌강 유역까지 원정하고, 동쪽으로는 두만강을 넘어 목단강(牧丹江) 유역에서 연해주 일원까지, 북으로는 송화강(松花江) 유역의 북만주 일원으로 통치 영역을 넓혔다. 남으로는 한강 유역을 획득하는 한편 멀리 낙동강 유역에서 왜를 토멸하고 신라와 가라를 복속시키는 정복전쟁을 수행해 문자 그대로 광개토경의 위업을 이룩했다. 뿐만 아니라 ‘국부민은’의 국력을 바탕으로 광개토태왕은 백제·동부여·신라·가라와 북연 등 여러 나라를 조공을 바치는 신하국으로 복속시키는 한편 태왕호와 독자적인 영락 연호를 사용해 중원 왕조와 대등한 동방의 새로운 천하 질서의 중심임을 대외에 천명했다. 이는 당대 고구려가 중원 왕조의 신속국이 아니라 팽창된 국력을 바탕으로 제국 질서를 완성했음을 의미한다. 주목되는 것은 광개토태왕의 남진 정책이 민족사의 발전 과정에서 자연적으로 나타나는 통일 의지의 구현이라는 점이다. 이는 고구려가 한국사의 주류에 당당히 위치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민족의 영광을 위해 점철했던 광개토태왕의 생애가 어제의 것이 아니라 오늘의 것으로 항상 새롭게 재조명되어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제는 잃어버린 만주의 옛 강토에 우뚝 서 있는 광개토태왕비는 남북 분단이라는 현실을 극복하고 민족의 통일이라는 민족사적 과제를 안고 있는 오늘의 우리에게 이러한 사실을 웅변으로 말해 주고 있다. ■ 광개토왕의 호칭 논란 ‘대왕’이 아니라 ‘태왕’이 맞다 고구려 19대 왕으로 22년 동안 고구려를 통치한 광개토태왕을 부르는 호칭은 나라나 학자마다 다르다. 일본이나 중국 학자들은 ‘호태왕’(好太王)이라고 부른다. 우리나라와 일본 학자들 사이에서 자주 쓰이는 것으로 ‘광개토왕’(廣開土王)이라는 표현도 있다. 국내에서 가장 일반적으로 쓰이는 것은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한국인들은 ‘호태왕’이 누구인지 모르고, 중국인들은 ‘광개토왕’이 누구인지 모른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정확한 표현일까. 결론부터 얘기하면 모두 틀린 것은 아니다. 광개토태왕비문에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라는 긴 시호가 나온다. 여기서 태왕릉이 있던 땅 이름인 ‘국강상’을 제하고 나면 공통된 호칭이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이다. 태왕릉에서 나온 벽돌에도 ‘태왕’이라는 칭호가 나오고, 중원고구려비에도 분명히 같은 호칭을 사용했다. 그러나 ‘대왕’(大王)이라는 칭호는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 ‘삼국사기’(三國史記)를 지은 김부식은 광개토태왕비에 대한 연구를 못하고 고구려사의 많은 부분을 중국 사서를 통해 쓸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광개토왕’이라고밖에 쓰지 못했다. 그뒤 근대 사가들이 우리 역사에서 가장 넓은 강역을 넓힌 왕을 ‘왕’이라고만 붙일 수 없어 근거는 없지만 그냥 ‘대왕’이라고 붙였을 뿐이다. 중국은 건국신화인 3황5제에서 ‘황제’를 따내 최고 군주의 명칭으로 썼다. 진나라 이전에는 군주를 ‘왕’이라고 했지 ‘제’(帝)라고 칭하지 않았다. 그러다 진시황이 처음으로 황제라는 칭호를 쓰기 시작했다고 해서 ‘시황제’(始皇帝)라고 했다. 일본은 중국과는 다른 칭호를 쓰기 위해 ‘천황’이라고 했다. 그리고 고구려는 ‘태왕’이라고 불렀다. 이 ‘태왕’이라는 칭호는 다음에 볼 연호(年號) 사용이나 하늘에 제사지내는 천제(天祭) 등과 같이 고구려가 당시 동아시아에서 독자적인 천하관과 세계관을 가지고 국가를 운영했다는 것을 분명히 해 주는 기록들이다. 이런 기록을 제대로 살려 고구려의 진면목을 밝히는 것이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의 임무이고, 이를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후손의 도리다. 앞으로 교과서도 바뀌어야 할 것이다. 광개토대왕이 아니라 ‘광개토태왕’이 맞는 표현이다. (서길수 고구려연구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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