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 리포트/韓·中 역사전쟁 제2탄!] 광개토태왕 정복로 르포
‘시라무렌강’의 추억 |
고구려군이 거란군 쫓아 건넜던 ‘鹽水’의 지금 이름
태왕비의 ‘富山’과 ‘負山’의 의문도 풀려 중국의 고구려사 편입 움직임이 속도를 더해 가는 요즈음 필자의 뇌리 속에 날로 또렷해지는 날이 있다. 바로 1999년 7월6일, 요하(遼河)를 처음 건넌 날이었다. 얼마나 기다렸던 날인가. 10년 남짓 요하 동쪽을 샅샅이 뒤지고 다녔던 필자가 요하를 건너 특별히 기획한 ‘광개토태왕 서북 정복로’를 따라 본격적인 탐사에 나선 것이었다. 우리는 흔히 고구려는 넓은 영토를 가졌다고 한다. 그러나 도대체 고구려의 영향이 정확하게 어디까지 미쳤는지 제대로 검증한 적이 없다. 우리는 자주 고구려 영토를 가장 멀리 넓힌 영웅으로 광개토태왕을 드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광개토태왕은 어디까지 정복했던 것일까. 당시의 탐사는 바로 이런 중요한 물음에 대한 대답을 찾기 위한 대장정이었다. 당시의 탐사는 광개토태왕비의 기록에서 시작됐다. 광개토태왕비 정복 사업 가운데 가장 먼저 나온 것이 서북쪽에 있던 거란 정복이다. ‘…영락 5년(395), 을미년에 왕께서 패려(稗麗)가 △△△하지 않아 친히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토벌하셨다. 부산(富山)과 부산(負山)을 지나 염수(鹽水) 언덕에 이르러 세 부 600∼700영(營)을 쳐부수고 소·말·양떼들을 얻은 것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414년, 지금으로부터 1,600년쯤 전에 쓰인 이 문장에는 많은 수수께끼가 숨어 있다. 첫째, 패려(稗麗)가 어디인가 하는 문제다. 둘째, 패려로 가는 경로다. 부산과 부산, 두 개의 산을 넘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부산은 어떤 산인가. 셋째, 세 부락과 600∼700개의 영을 쳐부수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소·말·양떼들을 얻어온 최대의 전적지 염수(鹽水)는 어디인가. 요하를 건너 험독으로 당시 대탐사는 이런 모든 문제를 한꺼번에 풀어야 하는 큰 숙제를 가지고 출발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기대가 큰 반면 그만큼 어깨도 무거웠다. 몇 년간 관계 논문과 지도를 수집해 검토하고 예비답사를 하는 등 준비했지만 과연 광개토태왕의 정복로를 분명하게 밝힐 수 있을런지! 광개토태왕이 395년 패려를 칠 때 요하 동쪽은 이미 고구려 땅이었기 때문에 광개토태왕의 서북 정복로를 정확히 밝히려면 우선 심양을 출발해 요하를 건너야 한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염수에 대해서는 학계의 시각이 너무 큰 차이가 난다. 첫째는 요하가 염수라는 주장인데, 고구려가 점령하고 있던 심양을 떠나 요하까지는 산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요하를 넘어 만나는 두 산을 찾아야 한다. 심지어 어떤 중국 학자는 염수가 염난수와 음이 비슷하다고 해서 압록강이라는 웃지 못할 주장도 한다. 필자를 비롯한 일행은 그날 오후 요하를 건너는 장황지대교(張荒地大橋, 台安縣 大張)에 다다랐다. 대교의 풍경은 한가로웠다. 내리쬐는 듯한 태양이지만 강가여서인지 산들산들 미풍이 불어 그늘은 시원한 맛이 있었다. ‘요하.’ 단군조선 이후 우리 민족과 이민족 간의 끊임없는 애환이 닮긴 강이다. 사서에는 요수(遼水)라고 하는데 구려하(句驪河)·구류하(枸柳河)·거류하(巨流河)라고 했다. 전국시대 이후 이 요하 쟁탈을 위해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던가. 한강과 비교하며 요하는 그보다 몇 배 크리라고 상상했는데 뜻밖에 수량이 작고 규모가 작아 어리둥절했다. 요하 건너 첫 답사 지역은 대안현(臺安縣) 신개하향(新開河鄕)에 있는 손성자성(孫城子城)이다. 우리가 이 곳을 찾은 것은 손성자성이 한(漢)나라 험독(險瀆)이라는 것이 중국 학자들에 의해 밝혀졌기 때문이다. 험독은 요동성에서 의무려산으로 가는 일직선상에 놓인 성으로, 고구려 광개토태왕의 군대가 요하를 건너 제일 먼저 공략했던 곳이고, 그보다 먼저 험독은 옛 조선의 땅이기 때문이다. ‘한서’ 지리지에 나온 험독의 주에 보면 험독은 ‘조선왕 만(滿)의 도읍지다. 험한 강을 끼고 있기 때문에 험독이라고 했다’고 기록되어 있어 험독이 옛날 조선의 서울이었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답사는 우리의 옛 조선이 요동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하고, 조선이 망한 몇백 년 뒤 고구려가 다시 이 곳을 회복했다는 사실을 밝혀 고구려사뿐 아니라 우리 역사의 뿌리를 찾아 복원한다는 큰 의의가 있는 것이다. 5시30분, 드디어 손성자에 도착했다. “고려성(高麗城)이라고 부른다.” 현지 사람에게 이 말을 듣고 귀가 번쩍 뜨였다. 그렇다, 단군조선 이후 한때 한나라가 이 곳을 차지했지만 그 뒤 오랫동안 고구려가 다시 이 곳을 점령했던 사실을 우리는 왜 그 동안 속 편하게 잊고 있었던가! 우리가 잊고 있던 역사를 현지 중국인들이 일깨워 주는 역사의 아이러니가 이 곳에서 벌어졌고, 사대주의 사관에 물들어 훌륭한 선조들의 역사를 잊고 살았던 필자는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속으로 통한의 피눈물을 흘려야 했다. ‘단군조선 역사의 복원’ ‘고구려 역사의 복원’. 우리의 임무를 일깨워 주는 선조들의 준엄한 꾸짖음을 마음에 새기는 순간이었다. 요하평원을 가로막는 의무려산은 ‘富山’ 다음날 북녕(北寧)을 지나 불과 10분 남짓 가니 멀리 의무려산이 산세를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잔뜩 흐린 날씨 속에 장대한 바위산이 아스라히 나타난 것이다. 요하 동쪽 천산산맥 아래 있는 요동성을 떠나 서쪽으로 평야를 달리다 요하를 건너면 또 다시 낮은 산 하나도 없는 넓은 요하평야(遼澤)가 이어진다. 이처럼 평지만 계속되다 갑자기 앞을 콱 가로막는 산이 바로 이 의무려산인 것이다. “이 산이 광개토태왕이 패려를 정복하러 갈 때 만난 첫번째 산인 부산(富山)이다.” 광개토태왕이 거란의 소굴인 현재의 내몽고 임동 지방으로 진격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길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거란까지 가는 경로를 알 수 있는 힌트는 광개토태왕비에 나타난 ‘부산’(富山) ‘부산’(負山) ‘염수’(鹽水) 등 3곳의 지명뿐이다. 필자는 처음 요수를 거슬러 올라가는 길을 그려 보았다. 그러나 그 길에는 두 개의 부산이 없다. 산이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성이나 요동성을 떠난 태왕의 군대는 어디로 갔을까. 그 길은 당시 이미 확보해 두었을 요하평야를 건너갈 수밖에 없고, 요하평야를 지나 처음 만난 산은 의무려산 외에는 다른 선택이 없다. 그렇다면 광개토태왕의 서북정복로를 따라 탐사길에 오른 우리는 그 첫번째 힌트인 부산(富山)에 도착한 것이다. ‘왜 부산(富山)이라고 했을까.’ ‘당시의 산 이름일까. 아니, 당시에도 의무려산인데?’ 여러 가지 상념이 떠올랐지만 우선 산을 올라보기로 했다. 입장권 뒷면 설명을 보니 요순 때부터 12대 명산의 하나로 불렸다고 하는데 유적들은 대부분 요나라 이후 청나라 때의 것이다. 주위를 감상하면서도 나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화두로 가득 차 있었다. ‘왜 고구려는 이 산을 부산(富山)이라고 불렀을까.’ 소나무·가래나무·보리수 같은 울창한 숲과 밤나무·대추나무 같은 유실수가 보이고, 잘 자라지는 않았지만 머루 덩굴도 보였다. 지금은 치수 사업이 잘 되어 옥토로 변했지만 옛날처럼 범람하던 요하를 간신히 건너 계속되는 늪지대를 달리다 의무려산에 도착했을 때 나타나는 이러한 풍부한 산림자원이 산 속에서 훈련받은 고구려 군들에게는 혹시 부산(富山)으로 비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번뜩 든다. 오랜 화두가 풀린 것이다. 의무려산에 도착한 고구려 광개토태왕의 군대는 그 다음 어디로 갔을까. 의무려산에서 거란의 본거지인 내몽고 임동으로 가려면 노노아호(努魯兒虎) 산맥을 넘어야 하고, 이 산맥을 지나면 거란의 본거지까지 가는 동안 큰 산이 없기 때문에 이 산맥이 바로 부산(富山)을 지나 나타나는 부산(負山)일 수밖에 없다. 7월8일, 하루 종일 연나라가 쌓은 장성을 탐사하고 저녁 7시 장성 터를 떠나 노노아호 산맥을 넘는다. 뜻밖에 산맥을 넘는 길은 험하지 않고 마치 대관령을 넘듯 구릉 같은 경치가 계속된다. 가끔 최근에 특수한 수종을 개발해 심은 나무가 나타나지만 기본적으로 초원이 계속되어 나무가 많은 의무려산과는 크게 대조를 이룬다. ‘그렇다면 태왕군은 왜 이곳을 부산(負山)이라고 했을까.’ 아무래도 쉽게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다. ‘부’(負)는 ‘(등에) 지다, (싸움에) 지다, 빚을 지다, 잃다, 부정의 조동사’처럼 상당히 마이너스(-)적인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풍성한 의무려산을 플러스(+)적인 부산(富山)으로 표현한 반면 아무 것도 없는 민둥산을 본 고구려군에게 노노아호 산맥은 마이너스적인 모양으로 보이지 않았을까. 염수를 찾아 시라무렌강으로 깊은 생각에 빠져 있는데 갑자기 차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요령성을 벗어나자 갑자기 울퉁불퉁한 비포장 도로가 시작됐다. 9시10분 내몽고에서 처음 맞는 구하자(펾河子)에서 늦은 저녁밥을 먹고 10시에 출발해 한밤중인 1시25분 나만기(奈曼旗)에 도착할 때까지 3시간25분은 정말 암흑 속의 사투였다. 부산을 넘는 일은 차로 달리는 데도 결코 만만한 길이 아니었다. 7월9일, 좀 늦은 9시40분 호텔을 출발했다. 사막 지형이 모습을 드러냈다. 전날 다녔던 요령성과는 주위의 풍광이 완전히 바뀐 것이다. 광개토태왕 군대가 거란을 치려면 반드시 시라무렌강(西拉沐倫河)을 건너야 하고 시라무렌강까지 가려면 산맥을 넘어 이런 사막 지형을 지나가야 했을 것이다. 우리 탐사단은 이미 광개토태왕비에 나타난 부산과 부산을 지났고 이제는 염수(鹽水)를 찾아야 한다. 문제는 왜 염수라는 이름을 붙였는가 하는 것이다. ‘시라무렌강은 짠물이어야 한다.’ 그래야만 시라무렌강설이 설득력을 얻게 된다. 시라무렌강 탐사는 이른 아침부터 시작됐다. 6시 임동(林東)을 떠난 탐사단은 11시10분, 시라무렌강변의 하얼친이라는 마을에 다다랐다. “‘옌젠디’다.” 운전기사가 소리쳤다. ‘옌젠디’는 ‘염감지’(鹽?地)를 중국어로 발음한 것이다. 염감지란 알칼리성 토양을 말하는 것으로, 소금기가 많이 들어 있고 썩은 유기물질이 겉을 검게 물들이고 알칼리성 반응을 나타내는 땅을 말하는데 우리말로 하면 ‘소금기 있는 땅’ 정도로 옮길 수 있다. ‘그렇다, 이것이 바로 염수다.’ 마치 요르단강의 사해나 미국 솔트레이크시티의 소금강처럼 짠 강물만 생각했던 필자에게 이 염감지라는 단어는 염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중요한 열쇠가 되었다. 지금은 둑을 막아 강 바깥쪽에 있지만 광개토태왕군이 이곳을 지날 때는 모두 강바닥이었을 것이고, 고구려 대군에게는 소금강과 같았을 것이다. 2시30분, 대흥(大興)에 도착해 우선 허기진 배를 채웠다. 4시에 다시 출발해 서요하 남쪽 강변을 따라 알칼리성 토양을 계속 찾아갔다. 오후 6시, 드디어 시라무렌과 서요하가 소금기가 많은 강이라는 결정적 증거를 찾아냈다. 명인향(明仁鄕) 신립둔(新立屯)에 도착하자 파란 벼논 사이에 풀도 나지 않은 알칼리성 토양이 수천 평 나타난 것이다. “여기는 소금기가 있어 곡식이 안 되고 풀도 자라지 않는다.” “잿물(硝鹹)이 많이 들어 있어 시커멓다. 물로 씻어도 씻기지 않는다.” 몰려든 마을 사람들 가운데 좌이펑둥(翟鳳棟)이라는 젊은이가 자청해 열심히 설명해 주었다. “이 서요하 남쪽 강변으로 쭉 있다. 동쪽으로 동래(東來)까지, 서쪽은 평안지(平安地)까지다. 강변에서 멀리 떨어지면 없다. 시라무렌강쪽도 이런 데가 있다고 친척들한테 들었다.” “소금기가 땅거죽에 나와 있는 것을 외염감지(外鹽콫地), 땅 속에 들어가 있는 것을 내염감지(內鹽콫地)라고 한다. 겉으로 멀쩡해 보이는 내염감지도 풀을 심으면 죽는다.” 마치 전문가처럼 토해내는 좌이의 설명을 들으면서 가슴 속에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이 몰려왔다. 사막을, 산악을, 초원을 헤매다 드디어 광개토태왕 군대가 거란군을 물리치기 위해 건넜던 염수를 찾아낸 것이었다.
|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페셜 리포트/韓·中 역사전쟁 제2탄!]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 학술발표회 (0) | 2007.03.22 |
---|---|
[스페셜 리포트/韓·中 역사전쟁 제2탄!] 고구려 유적에는 지금 무슨 일이? (0) | 2007.03.22 |
[스페셜 리포트/韓·中 역사전쟁 제2탄!] 광개토태왕의 南征北伐 (0) | 2007.03.22 |
[스페셜 리포트/韓·中 역사전쟁 제2탄!] 광개토태왕 비문에 나타난 ‘天下觀’ 입체 조명 (0) | 2007.03.22 |
중국이 보는 고구려 (0) | 2007.03.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