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이 보는 고구려
中華질서로 귀환시켜야 할 소수민족 |
前漢末 王莽朝 때 떨어져나가… 백제·신라보다 강한 臣下 의식
고대로부터 중국인들은 ‘중국’이라는 용어를 크게 두 가지 의미로 사용해 왔다. 협의(狹義)의 중국은 바로 만국지중심(萬國之中心), 천하지중심(天下之中心)을 뜻한다. 한 마디로 이 세상의 중심이 되는 나라가 중국이라는 의미다. 실제로 역대 중국의 최고통치자들은 늘 자신이 차지한 지역을 천하, 즉 오토(五土)의 중심으로 간주했다. 광의(廣義)의 중국은 그 의미나 적용 범위를 훨씬 더 확대한 것이다. 구체적으로 보면 아래와 같은 몇 가지 경우가 있다. 첫째는 중원 지구 혹은 중원 왕조를 중국이라고 칭하는 것이다. 상고시대부터 화하족(華夏族)은 황하 유역에 거주하면서 그 일대를 천하의 중심으로 간주해 ‘중국’이라고 칭하고 주변의 기타 지역은 ‘사방’(四方)이라고 불렀다. 이를테면 춘추시대에는 중원 지구인 주(周)·위(衛)·제(齊)·노(魯)·진(晉)·송(宋)·정(鄭) 등의 나라를 중국으로 간주했다. 반면 중원 이외 지역에 해당하는 진(秦)·초(楚)·오(吳)·월(越) 등은 이적(夷狄:오랑캐)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이 같은 상황은 진조(秦朝)에 이르러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진시황(秦始皇)의 전국 통일과 더불어 진나라 사람들의 중원 입주가 시작됐고, 진나라는 중국을 상징하는 나라로 부상했다. 따라서 사람들은 중국인을 진인(秦人)으로 칭하기도 했다. 한(漢) 나라가 건립된 후에는 자연스레 한나라를 중국으로 칭하게 됐다. 그 뒤 한족이 세운 양진(兩晉)·수(隋)·당(唐)·송(宋)·명(明)나라도 모두 ‘중국’으로 일컬어졌다. 이들 왕조는 스스로를 전통적인 중국 왕조로 간주했다. 소수민족 정권도 중국이다 다른 한 가지 경우는 소수민족 정권, 혹은 소수민족이 중원 일대에 입주한 후 건립한 왕조도 중국이라고 칭하는 경향이었다. 이를테면 후조(後趙)는 양(羊+초두 없는 葛)族이 세운 정권이었지만 그 최고통치자를 역시 ‘중국 제왕’이라고 불렀다. 오히려 후조는 동진(東晋)을 편비(偏鄙)로 보고 중국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 뒤의 전진(前秦) 및 남북조 시기의 북조(北朝) 등도 모두 중국이라고 자칭했으며 요(遼)·금(金)·원(元)·청(淸) 등도 모두 중국이라고 칭했다. 이 가운데 청조(淸朝)는 의심할 나위 없이 으레 중국이라고 칭했을 뿐만 아니라 역사상의 중국이라는 함의를 점차 근대적 의미에서의 중국으로 탈바꿈시켰다. 이 대목에서 특히 강조돼야 할 점은 협의에서의 중국이든, 광의의 중국이든 모두 천하의 중심을 뜻한다는 것이다. 자연히 중국 외에 또 사방(四方)이라는 것이 있었다. 중국의 통치자들은 모두 중국을 자기의 영토로 간주했을 뿐만 아니라 중국 이외 지역이라고 할 사방 지역도 자기 영토로 간주했다. 고대 중국의 통치자들의 이 같은 이념은 서주(西周) 시기에 이르러 그 윤곽이 보다 뚜렷하게 표현되었다. ‘시경’(詩經)의 소아 북산(小雅·北山) 편에 이르기를 ‘세상 넓은 천지에 왕의 땅이 아닌 곳이 없고, 사해를 따라 그 어디에 이르러도 왕의 신하 아닌 자가 없다’(溥天之下, 莫非王土; 率土之賓, 莫非王臣)고 했다. 여기서 ‘천하’는 ‘중국’(중원)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쉽게 말하면 중국 고대 제왕들은 일월(日月)이 비칠 수 있고 주차(舟車)가 통할 수 있는 지역이면 전부 자기의 영토로 간주하고 그 주민들은 당연히 자신의 신민(臣民)으로 인정했다는 것이다. 이른바 중화 천하질서(中華天下秩序)란 실제로 고대 중국 제왕들의 천하에 대한 치리(治理)를 말하는 것이다. 천자는 의당 천하의 공주(共主)이며 제후국의 국군이나 부용 지구의 부락 두령이나 할 것 없이 모두 중원 제왕의 신하로, 천자에게 복종해야 했다. 이 같은 복종은 주로 칭신납공(稱臣納貢)의 형식으로 표현된다. 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동북아의 허다한 고족(古族)들은 모두 중원 천자를 향해 칭신납공한 적이 있었다. ‘일주서’(逸周書) ‘왕회편’(王會篇)의 관련 기록은 우리에게 이에 관한 확실한 증거를 제공해 준다. 이 기록에 나오는 예인(穢人)은 의당 부여의 선조일 것이고 고이(高夷)와 발인(發(貊)人)은 고구려인의 조상이며 양이(浪夷 혹은 樂浪夷)는 고조선 선인의 한 갈래다. 이들 민족은 모두 주천자(周天子)의 북토(北土) 경역 내에서 생활했다. 주 선왕(宣王) 중흥 시기에 예인(穢人)과 맥인(貊人) 지역에 한후지국(韓候之國)을 설치해 두 민족에 대한 통치를 강화했다. 동주(東周) 시기에 이르러 중원 제후들의 할거로 전화가 끊이지 않은 데다 요서(遼西) 지구 제후 및 나중의 동호(東胡)가 동북아 제후국과 중원의 육로 교통을 차단하는 바람에 상기 지역의 고족(古族)들은 한동안 독립 발전의 시기를 경과하다 전국 시기에 이르러 연(燕) 소왕(昭王)이 동북 지구로 영토 확장을 진행함에 따라 요동 지구는 군현(郡縣)의 궤도에 들어서게 되었다. 진·한(秦漢) 시기에 이르러 동북아 지구의 군현제는 진일보 발달해 보다 완비 단계에 들어서게 되었으며 과거의 황복지지(荒服之地)는 연(燕)·진(秦)·한(漢)의 직접관할 지역에 들어가게 되었다. 군현제 실시는 동북아 고족고국(古族古國)의 사회 발전을 크게 도모했다. 요동군 관할 지역 내의 고맥족(古貊族)은 대부분 연과 한에 동화되었다. 고구려족은 대체로 서한(西漢) 초기에 지금의 훈강 지류 부이강(富爾江) 유역의 고리(高夷) 부락에서 탈태(脫胎)한 민족공동체다. 고리는 상말주초(商末周初)에 이미 중원 천자의 북토(北土)였으며 전국 시기에는 요동군 관할 지역에 속해 있었다. 당시 고구려의 활동 지역은 근근이 고구려현의 동부 부이강 유역이었다. 주몽(朱蒙)이 건국하기 전에 송양(松讓)을 부락 연맹 추장으로 하는 고구려인들은 모두 고구려현 현령(縣令)의 지배를 받았으며 한천자(漢天子)는 고구려에 고취기인 (鼓吹伎人) 및 건모의물(巾帽衣物)을 하사해 현령이 책임지고 유관 수속을 마쳤다고 한다. 주몽이 부여에서 남하한 후 졸본부여(卒本夫餘:지금의 요녕성 환인현 오녀산성 훈강곡지 일대)에서 건국하고 그 국명을 고구려라고 칭한 후 송양(松讓)을 두령으로 하는 고구려 부락연맹 중의 여러 부락들을 정복하였다. 주몽이 건립한 고구려국은 비록 나라 속의 나라이지만 여전히 서한(西漢) 군현의 지배 하에 있었고 또 한천자의 책봉을 받았으며 스스로 신하라고 불렀다. 왕망조(王莽朝) 시기에 이르러 중원 조정(中原朝廷)의 착오적 변강정책과 민족정책으로 동북 변강에 대한 공제력이 크게 약화되었고 고구려와의 모순도 격화되었다. 고구려는 이 기회를 타 현토군 지역을 점령하였고, 현토군은 할 수 없이 요동장성 이내의 원요동군 지역으로 옮기지 않으면 안 될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이때 고구려는 이미 수도를 흘승골성(紇升骨城)에서 지금의 집안시인 국내(國內) 지구로 옮기고 부단히 세력을 확장해 제6대 태조왕 때는 거의 5부의 규모를 갖추었다. 고구려는 中華天下秩序의 하나 5부가 형성된 후에도 고구려는 때로는 복종, 때로는 반역을 반복하였다. 그렇지만 복종시에는 의연히 현토군 또는 요동군의 지배를 받고 중원의 천자에게 조공을 바쳤다. 중원의 조정과 동북의 군현들은 고구려가 복종할 때는 안무정책을 취하고 반역할 때는 정복정책을 취했다. 고구려는 중국의 군현에서 갈라져 나간 할거정권으로, 한·위(漢魏)나 양진(兩晉) 및 16국 시기에 고구려 문제를 둘러싸고 할거와 반할거, 분열과 반분열 투쟁이 거의 끊이지 않았다. 역사의 발전은 동북아에서 고구려에 절호의 기회를 제공했던 바, 중국 북방 소수민족 세력의 궐기로 형성된 분열 국면을 틈타 고구려는 요동(遼東)·현토(玄兎)·낙랑(樂浪)·대방(帶方) 등 중원 조정의 4개 변군(邊郡)의 광대한 관할 지구를 탈취했다. 평양으로 천도한 뒤에는 한반도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백제·신라와 치열한 각축전을 벌였다. 고구려는 중국이 남북조 시대에 진입한 후 상대적으로 독립된 발전 단계로 진입했지만 남북조와의 군신 관계를 줄곧 유지했다. 고구려의 신하 의식은 백제나 신라에 비해 훨씬 강했다. 왜냐하면 고구려는 남북조(南北朝) 모두에 대해 스스로를 신하라고 불렀다. 양조(兩朝) 모두로부터 책봉받는 정치적 대우도 누릴 수 있었다. 반면 백제와 신라는 남조에 대해서만 신하라고 불렀을 뿐이다. 중국의 고대 제왕들은 모두 천하공주(天下共主)로 자처했고 천하의 토지를 자기의 토지로, 천하의 백성을 자기의 신민(臣民)으로 간주했다. 그들의 통치 방식에는 직접 또는 간접이라는 차이가 있었다. 진(秦)나라 이후는 군현제를 직접통치의 수단으로 취하면서 주변의 소수민족지구에 한해서는 책봉의 방법으로 간접 관할을 도모했다. 그러나 역사의 발전과 더불어 이 같은 책봉 체제에도 두 가지 상황변화가 나타나게 되었다. 같은 번복지국(蕃服之國)에서도 내외의 구별이 생긴 것이었다. 이른바 내번(內蕃)이란 중국 고유 영토에서 갈라져 나간 소수민족정권을 지칭하는 말이고, 외번(外蕃)이란 중국 고유 영토 이외의 속국을 말한다. 동북아 지구에서 볼 때 고구려는 당연히 내번에 속하고 신라와 백제는 외번에 속했다. 수·당의 군신들이 고구려·백제·신라 세 나라에 대해 취한 각기 다른 태도와 입장이 이를 입증해 준다. 隋唐, 영토 수복 의식 강해 수·당은 중국이 분열에서 통일로 진입하는 과정에서 등장한 왕조였다. 수와 당은 통일 대업을 완성하는 과정에서 고구려에 특별한 관심을 보였다. 한반도에서 벌어지던 고구려·백제·신라의 치열한 각축전은 동북아 지역의 안정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수·당의 왕들이 영위해온 천하질서도 파괴했기 때문이다. 더 중요한 것은 수·당의 입장에서는 고구려의 존재 자체가 변경 지역에서의 뚜렷한 위협으로 떠올랐고, 통일 대업에 바로 영향을 미쳤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수나라 군신들에게 고구려 문제는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는 중대 사안으로 부상했다. 수의 문제(文帝)는 고구려가 말갈과 합작해 영주(營州) 지방을 교란하자 크게 격노해 가차없이 정벌을 가한 적이 있었다. 양제(煬帝)에 이르러 고구려 문제의 본질은 진일보 명시되었다. 즉, 수의 군신들은 고구려가 중국 고유 영토에서 갈라져 나간 할거정권임을 분명히 짚고 있으며, 통일 대업을 이룬 후에도 계속 과거의 관대지경(冠帶之境)을 만맥지향(蠻貊之鄕)으로 머무르게 해서는 절대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 같은 인식을 바탕으로 수 양제의 고구려 정벌이 진행됐으나 여러 가지 원인으로 수의 군신들은 자기들의 야망을 이루지 못했을 뿐이다. 수·당 군신들의 고구려관에는 그들의 영토 의식과 수복 의식이 강렬하게 비쳐 있는 바, 그들은 갈라져 나간 중국 고유영토를 수복해 통일된 중국의 판도에 다시 귀속시키려고 했다. 중국의 사서와 조선 사서의 관련 자료들을 살펴보면 수·당 군신들의 고구려·신라·백제 문제에 대한 견해에 뚜렷한 차이가 있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고구려에 대해서는 중국의 영토로 간주하면서 고구려의 분열, 할거 상태를 조속히 결속 지어 중화의 판도 속에 귀환시켜야 한다는 의식이 강렬하게 비쳐 있다. 반면 백제·신라에 대해서는 다만 천하공주(天下共主)의 입장에서 그들과 신속(臣屬)의 지위를 유지했을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관계라고 할지라도 엄연히 신하 된 도리(臣子之理)를 행해야 했다. 천자의 뜻을 명백하게 거역했을 때는 자고로부터 전해 내려온 전통적 방법에 의해 천자는 당연히 무력 토벌을 가할 수 있었다. 이러한 사실로 볼 때, 수·당의 군신들은 동북아 문제를 처리할 때 한반도의 고구려·신라·백제에 대해서는 서로 다르면서도 연관성이 있는 원칙에 근거했음을 발견하게 된다. 고구려 할거 문제 해결은 중국 고유 영토의 통일과 관계되는 문제였다. 이에 비해 백제·신라와의 문제는 동북아의 질서 문제로 귀결되는 것으로, 천하공주로서의 중국 천자의 책임과 권위와 관련된 문제였다. 따라서 이 시대 동북아를 연구할 때 고대 동아시아의 특수한 역사적 배경을 떠나서는 절대 안 된다. 근현대의 국제관계로 고대의 천하질서를 가늠해서는 더더욱 안 될 것이다. 고대의 역사 문제를 대할 때는 당연히 역사유물주의의 태도를 취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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