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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스페셜 리포트/韓vs中 고구려 역사 대전쟁] 고구려는 한국사다

by 아름다운비행 2007. 3. 22.
[스페셜 리포트/韓vs中 고구려 역사 대전쟁] 고구려는 한국사다
월간중앙 역사탐험·백산학회 공동기획

 

 

 

고구려 시대에 세워진 천리장성의 한 부분인 백암성.

“광개토대왕이 중국인이라고?”
‘정치체제 다른 독립국가’ 中國 史書 곳곳에 기록


한나라의 성격을 구명하는 데는 대체로 자국의 기록(문헌)에 의존하는 것이 통념이다. 한 국가의 성격을 타국의 기록에 의존할 때 거기에는 커다란 모순과 왜곡이 따르게 마련이다.

역사의 기술은 자기 나라 중심으로 서술되기 때문이다. 고대 일본 문헌(日本書記)에 나타난 한국상을 일본식으로 설명할 때나 우리나라 고대 3국을 중국편에서 볼 때는 역사의 진실성과 객관성을 찾기 어려워진다. 따라서 고구려사도 우리의 기록에 따라 설명할 때 진실한 고구려상을 찾을 수 있다.

고구려(또는 구려)가 중국 문헌에 나타난 것은 ‘상서’ ‘일주서’(王會篇) ‘위략’ 등에서부터다. 이 때부터 고구려는 중국 동북쪽에 있는 나라로 여겨졌고, 한(漢)나라나 왕망(新)이 고구려를 침략할 정도로 그 세력이 강했다. 다만, 이러한 초기 고구려에 대한 우리측 기록은 고주몽 이후부터이고 그 이전 사실은 빠지고 없다.

따라서 ‘산해경’(山海經)을 통해 초기 고구려의 성격이나 고구려 고분벽화를 통해 고구려사의 초기 상을 엿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초기 고구려사의 복원에 대해 북한은 구려국으로, 남한은 원시 고구려 또는 고구려 종족사회로 그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상서’ 등 중국 문헌, 고구려 소개

고구려사에 대한 우리나라 최초의 사료는 ‘삼국사기’(三國史記)다. 이 책에서 고구려는 주몽(天帝의 아들 해모수와 유화를 부모로 둔)이 부여에서 남하(烏伊·摩離·陜父와 함께)해 졸본(현재 중국 환인현(桓仁縣)의 오녀산)에서 나라를 세웠다(BC 37)고 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삼국유사’(三國遺事)에도 비슷하게 기록돼 있다. 이후 고구려는 28대 보장왕까지 705년간 존속된 왕조로서 왕의 평균 재위연도는 25년 정도였다.

이러한 고구려는 만주 벌판에서 자란 나라였으므로 항상 중국의 침략에 직면하였다. 유리왕 31년(AD 12) 이후, 3세기의 위(관구검·왕기)와 전연(모용외)의 침입 그리고 4세기의 계속된 모용황·모용농의 칩입을 저지하면서 국토를 요동(遼東) 지방까지 확대하였다. 이러한 고구려의 영토 확장은 자연히 중국과의 전쟁을 면할 수 없었고, 고구려가 망할 때까지 철 생산의 고장인 요동을 확보해 중국의 동진을 저지했다.

한편, 동아시아에서 이러한 정치·군사적 충돌을 완화하기 위해 고구려는 중국과의 외교적 관계를 유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무신왕 15년(AD 32)에 후한 광무제(光武帝)에게 조공(朝貢)한 이래 역대 중국 왕조와 교섭을 유지했다.

중국측은 이러한 조공 속에서 보이는 책봉관계(冊封關係)를 신속관계(臣屬關係)로 설명했다. 그러나 이러한 조공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일본은 물론 중국 주변 국가는 거의 실시하고 있었다.

이러한 외교관계는 중국에서 볼 때 천하의 주인공임을 스스로 자처한 행위이지만, 우리측에서는 그러한 표면적 접근 속에서 국가의 자주권과 정체성을 잃은 적은 결코 없었다. 이것은 중국의 침략을 저지하면서 그들과의 공존을 통해 영토 확장을 꾀하려는 적극적인 수단인 것이다.

중국측은 그들에게 유리한 기록들, 특히 ‘상서’ ‘좌전’ ‘자치통감’ ‘책무원귀’ ‘당서’(신구) 등에서 ‘중국지어이적 유태양지대열성’(中國之於夷狄 猶太陽之對列星)(당서)과 같은 내용만을 열거하며 고구려를 그들의 지방정권(할거정권)이라고 주장한다.

일부의 기록만으로 전체의 국가 성격을 규정짓는 것은 정당한 평가 기준이 아니다. 과연 언제, 어디에 고구려가 그들의 속국이라는 기록이 있는가. 한·중 양국의 어디에도 고구려가 중국의 속국이었다는 공식적인 서술은 보이지 않는다.

‘삼국사기’의 ‘요동본중국지야 수씨사출사 이불능득 금동정 욕위중국보자제지수’(遼東本中國之地 隋氏四出師 而不能得 今東征 慾爲中國報子弟之讐)에서 볼 때도 고구려가 끝까지 요동을 차지하고 있어 당태종이 이곳을 되찾으려고 고구려를 침략한 것이다. 속국을 정벌하려고 100만 대군을 동원하였다면 이미 그 나라(당)와 고구려의 정치·군사적 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 수·당나라가 자신의 속국을 정벌하려고 100만 대군을 동원했다면 중국측 표현대로 신속관계(臣屬關係)가 성립될 수 있겠는가.

중국 문헌에도 고구려는 그 종족과 법속이 중국과 다르다고 하였다. 특히 언어·복식(服飾)이나 혼인과 예의범절이 중국과 달라 중국인의 눈에 특이하게 비치고 있었다. 그러므로 고구려는 당나라에 당당히 맞서 민족의 긍지나 정통성을 지킨 나라였다.

연개소문은 당 태종이 보낸 사절인 장엄(藏儼)을 토굴에 가두었다. 안시성 혈전에서 적장 이적(李 勣)이 “성이 함락되는 날 고구려 남자를 다 죽이자”고 태종에게 건의하였지만, 고구려 군사는 패퇴하는 적군에게 손을 흔들어 주는 여유를 보여 주었다. 이것은 고구려인들이 갖고 있는 자신감과 힘을 나타내준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 문헌에서 보이는 고구려는 민족적 정체성과 아울러 국가적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다. 천하의 중심을 자처하는 중국에 대항해 국가 보존의 신념을 보였으며 백제나 신라에 대하여 정치적 우위를 지켜 나갔다. 동시에 탄력적인 외교를 통해 국가 보존의 길을 찾았으니 그것이 ‘삼국사기’에 나타난 사대관(事大觀)이다.

즉, ‘좌전’에서 보이는 ‘대국에 대한 소국의 국가 보존의 길’보다 ‘맹자’에 나타나 있는 ‘대외정책에서 소국의 생존을 위한 자위 행위’로서 인자(仁者)로서의 자각적 논리를 잃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필요시에는 국민의 단결과 협력을 통해 대국(당)과 일전을 피하지 않는 생존의 길을 잃지 않은 것이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고구려는 바로 이러한 시각에서 어려운 환경과 불리한 조건을 극복하기 위해 군민(君民)이 함께 3월3일에는 사냥을 하였으며 정월 보름에는 패수 물놀이를 통해 공동의 장을 마련한 나라였다.

따라서 중국의 침략을 막기 위해 국민들은 함께 산성을 쌓았으며, 무덤 속 그림을 통해 화려한 내세관을 구가했다. 이와 같이 고구려인들은 하나의 테두리 속에서 함께 즐기고 나라를 위해 싸울 수 있는 자세를 갖추고 있었다.

중국과는 다른 독자적 천하

고구려가 중국 역사가 아님을 입증하는 사료들은 이 밖에도 얼마든지 있다. 물론 한국 사료 중에서도 고구려 당시의 것과 고구려 멸망 이후의 것의 고구려에 대한 인식은 다를 수밖에 없다.

즉, 고구려 당시의 사료에서는 고구려의 역사가 어디에 귀속된다는 기록이 없다. 광개토대왕릉비·모두루묘지·중원고구려비 같은 고구려인들이 남긴 사료에 의하면, 고구려는 하늘의 자손들에 의해 통치되며, 중국과는 다른 당당한 독립국가이며 독자적 천하였다.

특히 광개토왕비와 중원고구려비에서 이는 분명히 나타나 있다. 신형식 이화여대 교수는 최근 집필한 고구려사에서 ‘중국측 사서(舊唐書·隋書)에는 고구려는 끝까지 중국의 정치제도와 다른 독특한 체제를 유지하였으며, 전통·습관·언어 등 문화에서 중국과는 다르고 신라와 백제와는 같다고 기록되어 있다고 소개했다. 조공(책봉) 기사나 칭신납질(稱臣納質) 기사는 중국정부의 자기 위엄을 나타내고 자기 모습을 극복하려는 칭호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고구려사의 귀속 문제는 고구려 멸망 이후부터 대두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통일신라시대에는 세 개의 한(韓)이 합쳐져 우리나라가 되었다며 삼한(三韓)이라고 했다. 그리고 최치원은 고구려를 마한이라고 했다. 이러한 사실은 통일신라시대부터 고구려사는 한국사의 일부라는 인식이 확고히 자리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고려시대에도 고구려사를 우리 역사의 일부로 보았다는 사실을 뒷받침하는 증거들이 다수 있다. 우선 태조 왕 건이 국호를 고려라고 한 것부터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라는 의미이며, 성종 12년(993) 제1차 거란족 침입 때 서 희(徐熙)는 고려가 고구려의 계승 국가임을 당당하게 주장했고, 그 결과 이를 인정한 요나라로부터 압록강 동쪽 280리의 고구려 고토(故土)를 할양받기까지 했다.

뿐만 아니라 고려시대에 편찬된 역사서들은 고구려사를 한국사에 포함시켜 서술하였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제왕운기’는 말할 것도 없고, 비록 현전하지는 않지만 ‘해동삼국사’ ‘구삼국사’와 삼한 이래의 사적을 편찬한 홍 권(洪灌)의 ‘편년통재속편’(編年通載續編)도 고구려를 한국사의 일부로 취급했을 것임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나아가 ‘삼국유사’에서는 고구려의 시조 주몽을 단군의 아들이라고 했고, ‘제왕운기’에서도 고구려를 단군의 후예라고 하여, 고구려사의 한국사 귀속을 확실히 했다.

한편 조선시대에는 문화의 발달과 더불어 한국 통사에 대한 저술이 관찬·사찬을 막론하고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특히 17세기부터 정통론에 대한 논의가 쟁점으로 부각된다. 이에 따라 삼국시대에 대한 인식에서도 신라를 정통으로 보는 입장과 고구려·백제·신라를 동등하게 보아 삼국시대를 ‘무통’(無統)의 시대로 보는 입장 등 다양한 견해가 제시된다.

나아가 이종휘(李種徽) 같은 학자는 단군­기자­마한의 정통이 고구려로 이어진다고 했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 차이에도 불구하고 고구려를 한국사에서 제외시킨 경우는 한 번도 없다.

이렇듯 한국의 사료들은 하나같이 고구려를 한국사의 일부로 취급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사의 주족(主族)으로까지 보았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래서 한국 사람들이 한·중 수교 이후 만주 땅을 밟으면서 공통적으로 느끼는 감회의 하나가 우리의 옛땅에 왔다는 것이 아닐까 한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고토의 회복을 언젠가는 반드시 이룩해야 할 역사적 사명으로 여기기까지 한다. 물론 이것을 나쁘다고 할 수만은 없지만, 과도한 표현은 중국측의 경계심만 높일 뿐이라는 점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서영대 인하대 사학과 교수 [2004년 08월호] 2004.08.13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