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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강대국 흥망사' 다큐, 중국을 뒤흔들다

by 아름다운비행 2006. 12. 24.

 

'강대국 흥망사' 다큐, 중국을 뒤흔들다

2006년 12월 24일 (일) 09:56   조선일보

 

지난 11월 13일부터 24일 사이 중국 관영 중앙TV(CCTV)가 한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방영하자 중국 사회에 큰 소동이 벌어졌다. 프로그램의 제목은 ‘대국은 어떻게 일어섰나(大國堀起·대국굴기)’. 방송 직후 시청자와 네티즌 사이에서 찬반 논쟁이 벌어졌다.


“이 프로그램은 중국 역사에 이정표가 될 내용이다. 이 방송은 정치체제 개혁이라는 ‘큰 움직임(大動)’을 위한 마음의 준비를 하려는 것이다.”

“무슨 소리. 이것은 신(新) 자유주의가 파산하는 장송곡에 불과하다.” 

 

 이 방송은 15세기 이후 세계를 호령한 9개 대국(大國)의 발흥과 패망의 역사를 돌아보며, 각 국가의 지도자와 국민은 어떻게 해서 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는지를 짚어보는 역사 다큐멘터리이다. CCTV 제작팀이 무려 3년에 걸쳐 9개국의 역사적 현장과 박물관 등을 직접 찾아가 1차 문건을 확인해 제작한 역작이다. 제작팀은 베이징대학 역사학과 쳰청단(錢乘旦) 교수를 비롯해 수도사범대학 류신청(劉新成) 교수, 영국 노팅엄대학의 쩡용녠(鄭永年) 교수 등 중국 안팎의 학자ㆍ전문가 100여명을 찾아 자문을 구했다. 생동감 넘치는 화면과 충실한 내용 덕분에 이 방송은 중국 시청자들로부터 “2006년 중국 사회를 뒤흔든 최고의 TV 프로그램”이란 찬사를 받았다.

딱딱한 역사물임에도 불구하고 12회 시리즈가 끝나자 방송사에는 “재방송하라”는 시청자의 전화가 쇄도했다. 결국 CCTV 측은 지난 11월 27일 이 프로그램을 재방송했다.

 



게다가 프로그램을 담은 6개짜리 DVD는 12월 20일 베이징 등 대도시 서점에 깔리자마자 2~3일 만에 동이 났다. 8권으로 된 ‘대국굴기’ 책 역시 1만질이 순식간에 매진됐다.
도대체 어떤 내용을 담고 있기에 13억 중국인이 이 방송 내용에 이처럼 뜨거운 반응을 보이는 것일까.

이를 살펴보기 전에 먼저 이 프로그램의 원조격인 ‘하상(河)’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황하(黃河)의 죽음’이란 뜻의 이 프로그램은 1988년 CCTV가 제작한 기획 다큐멘터리. ‘하상’은 만리장성이나 용(龍) 같은, 중국인이 오랫동안 자랑스럽게 여기던 전통문화에 ‘사망선고’를 내렸다. ‘황하’ 자체가 ‘황색 얼굴의 중국인과 중국 전통’을 상징한다.

 

중국의 전통문화에 비수를 들이대고 서방 문명에 대한 동경을 숨기지 않은 이 프로그램이 방송된 지 1년 뒤 중국에서 톈안먼(天安門) 민주화운동이 발발했다. 일부 학자는 “하상이 1989년 중국 민중운동의 사상적 선도 역할을 했다”고도 말한다. 이 작품이 그토록 환영 받은 것은 개혁ㆍ개방 초기 젊은층의 사회 모순에 대한 반발과 변화 욕구를 잘 담았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그로부터 18년 만에 중국 사회가 또다시 한 TV 프로그램으로 들썩이고 있는 것이다. 방송 내용이 무엇이기에 중국 사회가 요동치는 것일까. 조선일보 베이징 특파원의 도움으로 DVD를 긴급 공수받아 본 ‘대국굴기’는 놀라움 그 자체였다.

 

‘아니, 중국의 관영 매체가 이런 방송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중국 사회가 이런 내용을 소화할 만큼 성숙했단 말인가. 중국 공산당 지도부가 이런 방송을 내보내는 의도가 무엇인가.’ 충격과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총 12편의 방송은 6개의 DVD에 담겨 있다. 편당 방송시간은 약 45분. 유럽의 지명과 인명, 역사적 사건을 중국식 표현으로 쏟아놓기 때문에 방송 내용을 따라가려면 상당한 시간과 노력을 요한다.

 

먼저 제1편 ‘해양시대(海洋時代)’는 15~16세기 신항로·신대륙 발견으로 강대국으로 우뚝 선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포르투갈이 아프리카 희망봉을 발견한 동기는 지금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닌 ‘향료(香料)’였다고 본다. 하지만 식민지로부터 은(銀)을 약탈해 엄청난 부를 쌓은 두 나라는 상공업 발전에 투자하지 않고 종교활동과 사치, 식민지 확장에 전념하다 쇠락하고 만다는 내용이다. 제2편 ‘소국의 대업(小國大業)’은 국토 면적이 베이징의 2.5배에 불과하고 12세기 전까지만 해도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습지의 나라 네덜란드가 17세기 세계 경제의 중심으로 우뚝 서게 된 비결을 찾는다. 제작진은 그 비결이 네덜란드인의 자유분방하고 실용적인 사고에 있다고 본다.

 

제3편 ‘현대로 달려가다(走向現代)’와 제4편 ‘공업화의 서막(工業先聲)’은 모두 영국에 관한 것이다. 먼저 3편은 1215년 ‘마그나 카르타’를 체결한 이후, 1588년 영·서(英西·영국과 스페인)전쟁과 1688년 명예혁명을 거치면서 군주의 권한이 제한되고 시민이 자유권을 쟁취해 ‘개방사회’로 진입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4편은 프로테스탄트(신교)의 중심지였던 영국의 상인이 ‘사업으로 돈을 버는 것은 곧 신의 선택을 받는 것’이란 인식을 갖게 되었다는 점, 아이작 뉴턴 이후 ‘과학의 시대’가 열리고 제임스 와트의 증기기관 발명으로 모든 산업에 일대 생산혁명이 일어났다는 점,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으로 자유무역의 정신이 꽃피고 막강한 무력을 바탕으로 전세계에 식민지를 건설해, ‘해가 지지 않는 나라’가 되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제5편 ‘격정의 세월(激情歲月)’은 18세기 말 프랑스가 대혁명을 거쳐 어떻게 현대 민주사회의 기반인 자유ㆍ평등ㆍ박애사상의 발원지가 되었는지를 탐구한다. 제 6편 ‘제국의 세월(帝國春秋)’은 19세기 프로이센의 철혈(鐵血) 재상 비스마르크가 독재적인 방식으로 공업 발전과 군사력 강화를 추진하고 전 국민 의무교육을 실시해 국가를 강성하게 만들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제7편 ‘백년간의 유신(百年維新)’은 아시아의 섬나라 일본이 1853년 7월 8일 미국 페리 제독의 흑선을 목격한 이후 약 100년 사이에 어떻게 아시아 최강을 넘어 서방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강대국으로 발전했는지를 탐구한다. 중국의 한 학자는 그것을 ‘처음은 놀라지만 다음엔 심취하고 마지막에는 미치는(始驚次醉終狂)’ 일본인의 태도에서 찾는다.

당시 일본은 중국·조선처럼 서방 문명의 파도에 쇄국의 빗장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흑선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몰래 배에 오른 시부자와 에이이치(澁澤榮一·메이지 정부의 관리를 거쳐 훗날 경제계에 투신, 500개의 기업을 설립한 일본 기업계의 대부)처럼 국가 지도부와 지식층이 시대의 흐름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것이 그 비결이라고 지적이다. 


제8편 ‘강대국의 길을 모색하다(尋道圖强)’와 제9편 ‘풍운 속의 새로운 길(風雲新途)’은 피터 대제의 개혁과 국민의 저항, 예카테리나 여제의 교육 개혁과 영토 확장 등 제정 러시아의 마지막 몸부림과 이어진 사회주의 혁명 등 현대 러시아의 흥망을 다루고 있다. 10월 혁명 후 레닌은 신 경제정책을 실시해 러시아 경제를 회복시키고, 이어 스탈린은 국가 주도의 공업화 정책으로 소련을 세계 2위의 경제대국으로 키웠지만 배후의 문제를 덮어버렸다고 ‘대국굴기’는 지적한다.

 

제10편 ‘새로운 나라, 새로운 꿈(新國新夢)과 제11편 ‘위기 국면의 새로운 정치(危局新政)’는 미국에 관한 것이다. 제 10편은 미국 제헌의회가 헌법을 제정함으로써 경제발전을 위한 법률적 보호장치를 제공했으며, 링컨이 남북전쟁을 통해 노예제 문제를 해결하고, 그 후 특허권 보장과 과학기술의 발달 등이 미국 경제의 급속한 성장을 이끌었다고 지적한다.

 

제11편은 자유경제로 인해 각종 경제사회의 재난이 출현하자 미국 사회 내부에 진보주의가 대두했으며 이들의 주장으로 ‘반독점법’이 제정되고, 두 차례 전쟁을 거치면서 미국 경제가 발전, 세계 최강의 국가로 부상했다고 분석한다.

 

제12편은 9개 대국의 흥망에서 ‘교훈 찾기’이다. ‘대국굴기’는 “각국 학자들이 내놓은 답은 서로 엇갈리지만 모두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상·문화의 영향력과 정치체제·제도의 개혁이다”라고 지적한다. 프로그램은 또 미국 하버드대학의 조셉 나이 교수가 제기한 ‘소프트 파워’의 중요성도 지적한다. ‘대국굴기’는 “평화와 발전은 현재 세계의 기본 주제”라면서 “다시는 전쟁과 패권쟁탈전을 통해 대국이 될 수는 없으며 영구평화와 공동번영의 ‘조화로운 세계(和諧世界)’ 건설이 인류가 공동노력해야 할 방향”이라고 강조한다.

 

보는 사람에 따라 다소 지루할 수도 있는 이 역사 다큐멘터리의 어떤 점이 중국 시청자를 사로잡고 격렬한 논쟁을 야기한 것일까.

 

먼저 종전과는 다른 역사관이다. 홍콩 시사잡지 아주주간(亞洲週刊)은 12월 10일호에서 “‘대국굴기’는 마르크스주의로 역사를 해석하는 전통적 시각에서 탈피, 식민지 지배와 경제적 수탈을 자본주의 국가의 경쟁력으로 재해석하는 시각을 선보이고 있다”고 지적했다. 제국주의 국가 내부의 권력 간 균형과 우수한 사회구조, 법치사상 등을 높이 평가함으로써 “제국주의에 대해 일종의 ‘복권(平反)’을 해주었다”는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프로그램이 전체적으로 ‘자유’ ‘경쟁’ ‘사유재산권’ ‘민권’ 등에 높은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제4편 ‘공업화의 서막’에서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1776)에 대해 대국굴기는 이렇게 설명한다.

 

“국부론은 인류 경제활동의 주요한 동기는 ‘개인의 이익 추구’이며, ‘보이지 않는 손’을 통해 효율적인 물자 분배가 이루어지고, 시장경제와 사회가 발전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스미스의 ‘자유주의 경제모델’은 당시 정부와 상인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학문을 중시하고 지식인을 우대하는 당시 영국 사회에 대해 높은 점수를 주고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이 프로그램을 놓고 후진타오(胡錦濤), 원자바오(溫家寶) 등 4세대 공산당 지도부가 정치ㆍ사회 개혁을 위한 다음 단계의 조치를 준비하는 것이 아니냐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이런 관측은 프로그램 제작의 배경과 관련이 있다. ‘대국굴기’가 나오게 된 것은 2003년 11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프로그램 제작 총책임자인 런쉐안(任學安)은 총서(叢書) 후기에서 “그 해 11월 말 아침 출근길에 라디오를 들었다. 공산당 중앙정치국이 ‘15세기 이후의 세계 주요 국가의 발전 역사’에 대해 집체학습을 했다는 뉴스였다. 그때 돌연 저 먼 곳에서 역사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하나의 생각으로 나는 온몸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것은 역사의 부름이었다”고 털어놓고 있다.

 

이 프로그램은 소수의 국가지도자만이 학습하던 세계 강대국의 역사를 13억 중국인에게도 알림으로써 ‘국민을 교육시키는’ 효과를 노리고 있다. 이 프로그램 제작에 참여한 베이징대학 쳰청단 교수는 “CCTV가 많은 노력을 기울여 대국굴기를 제작했는데, 그들에겐 하나의 생각이 있었다. 비교적 중요한 국가의 역사 발전과정을 비교함으로써 중국이 거울로 삼을 만한 경험과 교훈을 얻고자 했다. 

 

이 프로그램이 방송된 뒤, 중국 내 보수좌파 진영인 ‘마오쩌둥기치망(毛澤東旗幟網)’은 “제작자들이 역사를 마음대로 재단하고 식민지 약탈을 미화한 것은 비과학적 태도”라고 비판했다. 또 우파 자유주의 진영에서도 “레닌과 스탈린의 정책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비판했다.

 

여러 가지 논란에도 불구하고 ‘대륙굴기’가 국민의 열화와 같은 호응을 얻은 것은 무엇보다 ‘9개의 대국 다음은 중국’이라는 강력한 메시지를 주었기 때문이다. 한 시청자는 “이 프로그램이 말하지 않았지만 말하고 싶은 것(言外之意)은 ‘다음은 중국’이란 것”이라고 지적했다.

 

중국 지도부가 3년 전부터 ‘대국의 흥망사’를 공부하고, 지금 모든 중국인이 그것을 학습하는 현상은 ‘초강대국으로 부상하기 위한 정신적·제도적·학문적 준비’를 착실히 진행하고자 하는 공산당 지도부의 강력한 의지를 보여준다. 중국 대륙과 이어진 한반도 사람이 이 현상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되는 이유는, 중국인이 꿈꾸는 ‘대국’은 미국이나 러시아 다음 가는 ‘2등국’이 아니라 이 모든 나라를 누르는 ‘1등국’이기 때문이다.

 

이 프로그램이 한국에도 소개되어 정치인과 국민이 봤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