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 리포트/韓·中 역사전쟁 제2탄!] 발해의 국가 성격
고구려말 사용하고 온돌에서 잠자 |
풍속·문화 그대로 이어받은 고구려 계승국
唐과도 왕조 대 왕조의 대등외교 펼쳐 만 주 지역에 대한 근대적 연구는 일본이 먼저 시작했다. 만주 침략과 더불어 이루어진 발해 유적에 대한 답사와 발굴이 그 시작이었다. 동기는 순수하지 못했더라도, 이 때 이루어진 성과는 지금도 상당한 의미를 갖는 것이 사실이다. 중국의 발해사 연구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중화인민공화국 정권 때부터였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중국의 발해사 연구는 학문을 넘어 정치·외교적 문제까지로 비화되기도 했다. 해외 발해사 전공자들의 현장 접근을 막는다든지, 중국 발해사 연구자들을 한국의 발해사 국제학술대회에 참석하지 못하게 한 것 등이 그 예다. 중국이 이처럼 발해사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것은 앞으로 이 지역에 대한 영토 주권 논쟁에 명분을 주지 않기 위해서라는 것이 일반적 분석이다. 고구려의 풍속·문화 이어받아 중국이 발해를 고구려를 계승한 자주국으로 보지 않고 ‘말갈국’(靺鞨國)으로 보는 근거는 ‘신당서’(新唐書)가 발해의 건국자를 속말말갈(粟末靺鞨)로 여기며, 건국 세력 가운데 말갈이 다수였다는 것에 근거한다. 또한 발해가 당나라의 지방정권이었다고 주장하는 근거는 신당서 등을 근거로 ①발해라는 국호도 당에서 받았고 ②당나라에 끊임없이 조공(朝貢)한 기주(羈州)의 관계였으며 ③흑수주(흑수말갈 : 黑水靺鞨)에 파견되었던 것과 같이 발해에도 지역 관할관인 ‘장사’(長史)가 파견되었고 ④문화적으로도 발해는 한자를 사용했으며 당 중심의 문화를 향유하던 왕조였으며 ⑤시인 온정균(溫庭筠)이 쓴 ‘시서본일가’(詩書本一家)에서도 당과 발해의 관계를 잘 알 수 있다고 강변하고 있다.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왕조인가, 고구려와 다른 말갈국이었는가 하는 문헌적 근거는 ‘구당서’(舊唐書)와 신당서가 가장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신당서는 중국측이 발해의 말갈적 성격을 가장 잘 드러내고 있다며 신뢰하는 사료다. 이에 비해 발해의 ‘고려별종설’(高麗別種說)의 근거가 되는 ‘구당서’는 한국 등이 신뢰하는 사료다. 그러나 말갈은 당시 동북방 이민족(異民族)과 고구려 변방민에 대한 범칭(汎稱)이자 비칭(卑稱)으로, 구당서는 발해국의 종족계통을 고구려로 보는 사료며, 신당서는 그들의 출신 지역을 송화강 지역으로 보는 사료라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모두 ‘고구려적’ 의미가 있는 것이다. 중국측은 발해가 당에서 국호를 받았다고 주장한다. 즉 ‘말갈’이라는 국호를 버리고 ‘발해’라고 처음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중국뿐만 아니라 한국과 일본 학계에서도 상당한 힘을 갖는 부분이다. 그러나 발해라는 국호를 당에서 받았다는 주장은 무리가 아닌가 한다. 발해는 개국 때부터 ‘진국’(震國) 또는 ‘발해’라는 이름을 썼다. 말갈이라는 비칭의 국호를 사용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판단된다. 말갈에서 발해로 국호를 바꾸어 부른 것은 당나라의 현실적 판단에 따른 일방적 외교 행위였다는 것이다. ‘비로소 발해를 비칭의 말갈이 아닌 발해로 정식으로 부르기 시작했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당나라가 발해를 ‘말갈’로 불렀던 것은 그들의 일방적 호칭이었던 것이지, 발해인들이 스스로 그렇게 부르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발해는 국제적이며 선진적이었던 당나라 문화에 대하여 적극적인 수용 의지를 가졌던 것으로 판단된다. 조공사(朝貢使)의 빈번한 파견이 그러한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행정과 학문·교육을 위해서는 한문 서적 등이 필요하였을 것이고 도자·공예미술과 같은 귀족적 문화는 당풍(唐風)의 것도 상당히 많이 수용했던 것으로 확인된다. 그러나 보수성이 강한 풍속과 주거 문화는 고구려의 것을 대체로 그대로 계승하고 있었다. 발해와 당나라 사이에 있었던 책봉과 조공은 비록 그 주도권이 당나라에 있다고 할지라도, 중앙과 지방 정권 사이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엄연히 왕조와 왕조 간에 이루어진 국제 외교 행위였다. 발해는 또한 황상(皇上)을 자칭하는 황제국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정혜공주 묘비(780년)와 정효공주 묘비(792년)에는 두 공주의 아버지인 문황(文王)이 ‘대왕’(大王)·성인(聖人)·황상(皇上) 등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것으로 볼 때 발해는 황제를 칭하는 자주적 왕조였다는 것이다. 발해는 또한 당나라와 전쟁도 치를 만큼 자주적 국가 운영을 하였다. 예맥·부여 계통의 고구려인 발해는 종족적으로 예맥(濊貊)·부여(扶餘) 계통의 고구려인들이었으며, 이들은 기록에서 속말말갈·백산말갈 등으로 불리기도 했다. 문화적으로도 석실묘와 석곽묘를 사용하던 고구려 지배층의 고분을 축조했고, 온돌도 사용했다. 말갈은 당·송대인들이 동북방 주민들을 범칭하거나 비칭했던 종족명이었고, 고구려의 피지배 주민들의 비칭이었다. 말갈을 피지배 주민들에 대한 비칭으로 보는 견해는 ‘삼국사기’에도 반영되어, 중국측 기록과 달리 동명성왕대에까지 말갈이 등장하는 결과를 낳았다. 따라서 한국 및 중국사에서 ‘말갈족’의 존재를 ‘고구려’와 따로 구별해 인정하는 것부터 문제가 된다고 할 수 있다. 만주 지역에서 스스로 왕조를 만들어 국호를 선포하였던 고조선·부여·고구려의 종족명은 그 이름대로 불러야 하고, 왕조 개창에 성공하지 못했던 흑수인들의 경우만 ‘말갈’ 또는 ‘흑수말갈’로 부르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그렇더라도 동양사에서 이미 일개 종족명으로 그 시민권을 획득한 ‘말갈’을 존중한다면 ‘고구려말갈’(속말말갈과 백산말갈 등과 같이 고구려 주민이자 고구려계인 말갈)과 ‘흑수말갈’(고구려계가 아닌 말갈)로 나누어 부름이 타당하리라고 본다. 부연한다면 고구려의 ‘말갈 지배’는 중앙의 지방 통제라는 의미에 불과할 뿐, 이것이 고구려인의 이민족 지배라는 뜻은 아니라는 얘기다. 이는 언어·문화적 측면에서도 입증이 가능하다. 발해가 고구려와 풍속이 같았다는 구당서의 기록은 같은 종족임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발해어는 부여·고구려계로, 발해는 고구려말을 주로 쓰는 국가였다고 판단된다. 아울러 발해어의 잔재가 가장 많다고 할 수 있는 만주어가 숙신어보다 예맥계의 부여·고구려어의 잔재가 더 많으며, 한국어와도 친연관계에 있다는 것이 국어학계의 주장이다. 이와 함께 온돌 장치가 발해 유적에서 발견되는 점은 문화적으로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였다는 방증이다. 한국의 역사 연구 분위기는 그것의 시비(是非)를 떠나 매우 다양하다. 심지어 한국사가 아니라는 주장까지 있으며, 이들은 한국사적 발해사를 주장하는 사람들을 국수주의 내지 왜곡된 민족주의 사학자로 치부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견해는 발해사가 지금까지 ‘지배층은 고구려 유민, 피지배층은 말갈’이라는 견해를 일반적으로 수용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위에서 얘기한 대로 말갈에 대한 인식을 바로 한다면, 말갈로 불렸던 사람들도 대부분 고구려인이었을 것으로 인식하게 되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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