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 리포트/韓中 역사전쟁 제3탄!] 日 문헌에 나타난 고구려
‘三韓 일원’ 중국 속국 기록 없어 |
발해를 ‘신고구려국’으로 인식… 승려 日 파견기록도
고대 일본은 중국과 한국 문헌에는 왜(倭) 혹은 왜국(倭國)으로 기록돼 있다. 414년 만들어진 ‘광개토왕비’(廣開土王碑)에는 4세기 말부터 5세기 초에 걸쳐 고구려가 왜(倭)와 격렬하게 싸워 왜의 세력을 한반도에서 밀어낸 사실이 기록돼 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일본의 고대 문헌에서는 이 같은 싸움 기록을 찾아볼 수 없다. 일본 최초의 역사책인 ‘일본서기’(日本書紀)는 720년 완성됐는데 이 책에도 고구려와의 싸움 관련 기록은 없다. ‘일본서기’에서 가장 오래 된 고구려 관련 기록은 ‘신라 정토(征討)’ 부분에 나타나 있다. ‘일본서기’에 보면 신공황후가 신라를 정벌한 후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의 왕이 찾아와 ‘서쪽의 변방국으로서 앞으로 영원히 일본에 조공을 바치겠다’는 글이 있다. 고구려와 백제의 왕이 일본에 조공을 바치겠다고 한 것은 신라가 신공황후에게 항복한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문제의 임나일본부설로 비화한 대목이다. 이 글의 요지는 신공황후가 신라를 정벌할 것을 결심하고 병선(兵船)을 정비하고 병사를 훈련시킨 후 자신도 남장을 한 채 가시히노미야(日宮香椎廟)를 출발해 신라로 향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병선이 신라 연안에 도착했을 때 신라의 임금이 놀라 “저것은 일본의 신병(神兵)일 것”이라며 황후 앞에 나아가 항복했다는 것. 그리하여 황후는 전쟁도 하지 않고 신라·고구려·백제 삼국을 모두 정복하고 신라 임금에게서 빼앗은 보물들을 열아홉 척의 배에 싣고 돌아왔다고 ‘일본서기’는 전한다. 이처럼 고구려·백제 두 나라 왕이 일본에 조공을 바쳤다는 전혀 사실이 아닌 글들은 여러 형태로 ‘일본서기’를 통해 전한다. 이어 응신천황 7년 9월에는 ‘고구려인·백제인·임나인·신라인 모두 일본을 방문해 한인지역을 만들고 살았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이는 인명이나 지명 등 구체성이 없는 글이다. 이 같은 구체성이 빈약한 형식의 글은 이후의 문헌에서도 나타난다.(흠명천황 원년 8월 등) 응신천황 37년 2월 아지사주(阿知使主) 등은 고구려 왕이 붙여준 구례파(久禮波)와 구례지(久禮志)를 동반하고 중국 오(吳)나라에 가서 4명의 여자를 데리고 귀국했다고 한다. 여기서 고구려가 일·중 문화 교류의 다리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인덕천황 12년(324) 7월에는 고구려국이 일본에 철제 방패와 과녁을 바쳤다고 한다. 이러한 기록들은 ‘일본서기’를 편찬할 때에 만들어낸 사건일 것이다. 6세기 후반에 이르면 고구려인의 일본내 거주 사실들이 기록돼 있다. 흠명천황 17년(556) 10월에는 고려인이 전부(田部, 농민의 일종)로서 ‘대신협둔창고’에 배치되고 9년 후 고구려인 ‘두무리야폐’ 등이 산성(현재 교토의 일부)에 배치돼 거주한 사실이 기록돼 있다. 이는 기나이(畿內)에 거주하는 고구려인의 역사다. 흠명천황 31년(570) 4, 5월에도 고구려의 사자(使者)가 일본에 도착한 사실이 기록돼 있다. 이렇듯 일본과 고구려가 우호적 관계를 맺은 것은 가야를 흡수해 강성해진 신라를 견제하려는 외교적 포석으로 보인다. 더욱이 이 고구려 사자의 글은 백제계인 왕진이(王辰爾)가 해독했다고 전한다. 이렇게 시작된 고구려 사신의 일본 왕래는 훗날 발해국 사자가 내왕하는 것으로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일본서기’에 보이는 고구려의 모습은 다섯 개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고구려는 일본에 조공하는 나라로 묘사돼 있는데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둘째, 백제와 신라·가야의 상호 대립이 복잡해진 6세기에는 고구려가 가야에 정치적 압력을 주는 강력한 세력으로 기록돼 있다. 셋째, 고구려가 신라와 대립 관계에 있던 6세기에는 해로를 이용해 사자(使者)를 일본에 파견하고 있다. 넷째, 고구려는 외교 정책의 하나로 불교 승려를 일본에 보냈는데 이를 통해 일본에 문화를 전파한 것으로 보인다. 다섯째, 일본으로 이주한 고구려인들은 백제를 거쳐 간 것으로 나타난다. ‘속일본기’(續日本紀)가 완성된 797년은 이미 고구려가 멸망하고 발해국의 시대다. 발해국의 대무예(大武藝)가 일본에 최초로 사신을 파견한 727년 외교에서 발해는 고구려 후계자로서의 인식 하에 대일 외교를 추진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발해의 자기 표현은 일본측에서는 이미 멸망한 고구려의 ‘조공’이 부활한 것으로 간주해 관대하게 수용되었다. 발해국은 이른바 ‘신고구려국’으로 일본에 인식됐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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