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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4 - 인천 개항기15

[해방기 격동의 현장 인천] 4. 패배자 일본, 그 끝없는 오만함 ▶ 인천에 있던 일본인들은 해방 직후에도 국가기간 시설이라고 할 수 있는 인천 앞바다의 등대를 폭파하는 범죄행위를 버젓이 저질렀다. 일본인들이 만든 우표에 담긴 이 사진은 폭파직전의 소월미도 등대의 모습. 등대를 인천의 명소라고 한 점이 이채롭다. /인천학연구원 제공 >4< 해방직후도 .. 2005. 10. 25.
[해방기 격동의 현장 인천] 패망 앞두고도 극심한 수탈 지난 1945년 해방을 전후해 강화와 수봉산, 남동구 논현 지역이 굴절된 역사현장의 중심이었다는 사실이 당시 기록에서 증명되고 있다. 〈관련기사 14면〉  조선총독부 기관지로 발행되던 매일신보의 1945년 1월부터 8월까지의 기사에는 거의 매일 강화지역 기사가 빠짐없이 등장하고 있다. 1945년 8월.. 2005. 9. 20.
[해방기 격동의 현장 인천] 3. 해방의 아침 ▶ 일본의 항복문서 서명식.  1945년 8월 15일. 인천은 특별한 아침을 맞았다. 해방과 함께 인천은 가장 먼저 치안자치회를 독자적으로 구성하는 등 발빠른 대응에 나섰다. 그러나 일본인들의 본거지 역할을 해 온 인천은 독립이나 해방에 걸맞는 행보가 부족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인이나 다름없는 .. 2005. 9. 20.
[해방기 격동의 현장 인천] 2. 1945년 광복즈음의 표정 ▶ 인천항 잔교에 첫발을 딛는 미 진주군선발대의 모습.    1945년 8월의 인천의 표정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1883년 인천항 개항 이후 외국인 거류지인 조계가 설정되는 등 인천의 중심부라고 할 수 있는 만국공원(현 자유공원) 일대는 일본인들을 비롯한 외국인들이 점령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식.. 2005. 8.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