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블로그, 오현기님의 "Let it be......"의 '틈새뉴스'중에서 옮겨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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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한국전쟁 직후인 1953년 조선일보 홍종인 선생이 독도를 다녀와서 조선일보에 게재한 독도 기행칼럼(1-4회) 입니다. 1954년도에도 독도문제로 한국과 일본이 첨예하게 부딪힌 일이 있었고, 당시 한국정부는 독도우표를 발행 하기도 했었습니다.
-독도에 다녀와서(1) 홍종인記 <53.10.23 조선일보(2)>
제1차는 상륙실패, 표식(標識)없는 일본 경비선 근해에 출몰
동해바다 한가운데 있는 '울릉도'의 부속 도서(島嶼)인 독도(獨島)에 대한 한국산악회의 울릉도 독도학술조사단에 의하여 해군 함정의 편을 얻어 지난 11일부터 1주간동안의 임무를 마치고 돌아왔다.
일행은 측지반(測地班),촬영반,등반대(登攀隊)를 주도한 25명으로 작년이래의 숙망을 달성했다. 조사단의 일원으로서 현지 보고를 대략 적어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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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마선(傳馬船)을 내리우고 동도(東島)일각에 하륙작업을 시작하다가 부득이 단념하고 일단 울릉도로 회항키로 했다. 작년 9월에도 동조사단일행이 외국군의 폭격연습으로 두차례나 상륙을 실패했던터에 이번에 다시 상륙이 여의치 못했던 것은 조사단일행을 위하여 커다란 시련이 아닐 수 없었다.
울릉도까지 48마일 거세인 서북풍을 정면으로 안고 달려야 하는 난항(難航)이었다. 독도로부터 수마일 떨어졌을 때 우리 뒤로 기선 한척이 나타났다. 거리가 멀고 또 비에 가리워 상대방의 정체를 알아낼 수 없었다. 설마 그것이 일본 경비선일 줄이야 알았으랴.
하오 두시반경 기선은 우리 함정에 많이 접근했다. 선원들이 모자를 벗어서 흔드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배에는 하등의 국적(國籍)의 표시가 없는 것이 수상했다. 우리함정 905호의 정장 26세의 서덕균(徐德均) 대위는 곧 전투배치를 하는 동시에 국제신호로써 상대방의 국적을 묻고 선박의 행로와 임무를 묻는 한편 정선(停船)을 명했다.
상대방은 곧 정선하고 배꼬리를 우리편으로 돌리면서 그때야 비로소 일본기를 올렸다. 배꼬리에는 일본글자로 '나가라'(250t)라고 씌워있고 그들은 답신하기를 "우리는 일본경비선으로 일본정부의 명에 의하여 죽도(竹島)방면을 순항차입니다"고 했다.
독도를 일본 영토라고 주장하는 그들은 독도방면의 우리측 행동을 부단히 살피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경비선은 '해다'장치도 있는 쾌속선이었다. 그때 우리편 정장은 곧 저편에 대하여 "리 라인밖으로 곧 철퇴하라"고 신호하니 그들은 곧 회답키를 "건전한 항해를 빕니다"고 하여 공손히 돌아갈 태도를 보였다.
그래서 우리 함정으로부터 정선명령의 '케'기(旗)를 내리우자 그들은 곧 뱃머리를 동남방으로 돌렸다.
다음날 정오의 일본 측 방송에 의하면 이배에는 일본국회의 중의원(衆議院)의원이라고 우리 측과 소위 해상회담을 하겠다고 독도방면으로 왔던 것임을 알수있다. 그들의 방송은 최초에는 대략 사실을 그대로 보도했었다.
즉, 독도부근에서 한국군함을 발견하고 접근하였으나 '리 라인'밖으로 철퇴하라고 했고, 또 풍파가 심하여 더 접촉할 수 없었다고 했다. 그러나 세시간후의 일본 방송은 말을 고쳐서 "11일 부산방송에 의하면 한국측에서 지리학자 등 20여명이 독도에 온다고 해서 가보았더니 한국군함을 발견했다. '리 라인'밖으로 철퇴하라기에 우리는 '리 라인'을 인정치 않는다고 하고 한국측의 요구를 거부했다"고 했던 것이다.
국적표시도 없이 항해하다가 정선명령을 받았던 그
사람들의 거짓말을 우리는 동해한가운데서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날 밤 울릉도에 귀항한 것은 밤 9시 경이었다.(계속)
-독도에 다녀와서(2) 홍종인 記 <53.10.23일
조선일보(2)>
뜻 않은 "전파"의 격려, 해가 뜨며 본격적인 작업을 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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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날은 개인다고해도 계절풍(季節風)이 시작되는 때요 겸하여 바다가 거칠기로 유명한 동해인 만큼 전단원의 안전과 건강을 위하여 조심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15일은 오전1시에 출항키로 하고 단원일동은 저녁후에 미리 배에 올랐다. 바다에는 오징어잡이 배가 수백척 멀리 오리나 십리밖까지 울릉도를 둘러싸고 있다.
쪽박같은 배에 몸을 싣고 밤새 넘나드는 물결에 흔들리우며 '카바이트'등불밑에 오징어를 낚는 울릉도 어민들은 단순히 그들 자신의 생활을 위한 생업에 힘쓰고 있다기 보다도 동해의 울릉도를 항공모함(航空母艦)이나 다름없는 하나의 부성(浮城)으로 삼고 망망한 동해바다를 지키고 있는 호국(護國)의 척후병(斥候兵)의 임무를 다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가을밤 맑은 하늘도 바다위의 별빛은 유난히도 육지에서 볼 수 없는 영롱(玲瓏)한 빛을 내고 있는 것이었으나 출렁거리는 파도사이로 감실거리는 오징어 배의 등불도 울릉도가 아니면 볼 수 없는 찬란한 광경임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독도에 도착한 것은 오전5시반경 아직 해뜨기 전 바다는 비교적 고요하다. 동해 바다전폭을 뒤덮은 듯한 붉은 노을 밑에 우리들은 동도와 서도사이 남쪽으로 배를 대이고 상륙을 시작했다. 모두가 초반전이다. 약간의 비상식(非常食)만을 가지고 상륙하는대로 조사작업을 개시키로 했다.
최대한도로 시간을 절약하여 될 수 있다면 해지기 전 까지 일을 끝마칠 수 없겠느냐하는 예정이었다. 이유는 천후가 역시 염려되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측지반을 선두로 곧 두척의 전마선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때 바로 우리가 본부기지(基地)로 한 동도의 서편 기슭에서 약3백m되는 서도 한 모퉁이의 소위 '가재'바위에는 가재(海로)가 수십마리 올라앉아 우리를 불의의 손님에 향하여 고개를 돌리고 있는 것이 자세히 보였다.
측지반이 접근하자 "응아 응아"하며 누런 놈, 검은 놈, 큰 것은 송아지만큼 하고 적은 놈은 중개만큼씩한 놈들이 물로 덤벙덤벙 뛰어들었다. 우리나라에서 가재가 서식하는 곳이 독도뿐인 점에서도 독도의 가재는 천연기념물(天然記念物)로 지정하여 보호되어야 할 가치를 가지는 것이다.
또 뒤에 발견된 것이지만 비난추니(새매)와 그 외의 수개종류의 매(鷹)와 같은 맹금류(猛禽類)와 희귀한 몇가지 적은 새가 깃들이고 있는 것도 독도의 생물로서 특이할 바라할 것이다.
조사 작업은 아침해가 높아가면서 본격적으로 바뻐졌다. 측지반이 서도의 남쪽으로 바다위의 바위를 징검다리삼아 측량판을 들고 이동하고 있을때 등반대(登攀隊)는 동도의 봉우리를 찾아서 표식(標識)을 세우는 일이 가장 어려운 일이었다.
등반이 어려운 이유는 산이 모두 절벽으로 되어있는 험악한 암석투성이 인데다가 화산재(火山灰)가 풍화(風化)된 것이어서 돌부리를 면밀히 하나하나 망치로 뚜드려보지 않고는 손발을 붙일수가 없었다.
등반대는 한국산악계의 유일한 '호프'인 암벽(岩壁)등번의 젊은 '알피니스트'들이다. 그러나 금강산이나 북한산 등지의 화강암등의 절벽에서 경험한 어려움의 비교가 아닌 것을 새로 경험케 되었던 것이다.
허리에 '자일'을 매고 '하겐'을 박아가며 실로 한치 두치를 새겨가면서 기어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는 동안 동도와 서도 측지반과 등반대 그리고 우리의 함정 905호와 조사단본부와의 연락은 미리 준비해 가지고 갔던 휴대용 무선전화기를 통하여 몹시 바뻤다.
그런데 이날 무선전화로 서로 바쁜 연락을 하는 동안 우리들에게 뜻밖의 흥분을 느끼게 한 것은 정오 이후로부터 그 조그마한 전화통으로 멀리 부산(釜山)의 '60만 어민대회'에서 '일본 어선의 침범을 물리치고 우리의 해양주권선(海洋主權線)인 평화선을 지키라'고 외치는 대회 중계방송 전파(電波)가 망망한 바다를 건너 가칫가칫 우리고막에 울려 왔던 것이다.
그 소리는 간신히 들을 수 있는 정도였으나 열성에 넘치는 그 결의 표시의 전파는 절해고도의 벼락턱에 매달려 있는 우리들의 조사 작업을 무한히 격려해 주는 그 소리로 들렸던 것이다.
즉, 평화선을 지켜야 할 것이라는 우리 어업계의 외침은 곧 '독도를 지켜라'하는 외침에 다름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동해 한끝의 평화선은 독도로부터 바로 10마일 동남쪽으로 그러져 있는 것이다.
이같이하여 독도에 상륙한 그날 조사 작업에 열중하고 있는 그시작에 우리들에게 격려를 보내는 어민대회의 그날이었던 것은 뜻하지 않은 가운데 깊은 뜻이 숨어 있음을 느끼게 했던 것이다.(계속)(사진은 독도의 일부)
-독도에 다녀와서(3) 홍종인 記 <53.10.26일 조선일보(2)>
'로빈손 쿠르소'도 될 뻔,
15일 밤엔 고도(孤島)서 막영(幕營)
15일은 날씨가 그대로 계속해서 좋았다. 측지반은 오전 오후로 서도(西島)의 약 4분의3가량 측량을 마치고 다시 동도(東島)로 이동해왔으나 이미 시간은 저물어 해지기 전에 측량을 끝낼 도리가 없었다. 등반에도 동도의 등반을 끝내고 다시 서도(西島)로 이동키에는 시간의 여유가 없었다. 이때까지의 천기상황은 대체로 보아 16일 오전까지 큰 변동 없을 듯싶었다. 905호의 정장과 의논한 결과 정장은 말하기를 다소의 풍파가 일어나도 조사단원을 무인도에 버리고 돌아가지는 않을 것이니 16일 오전 중으로 기어코 소기의 목적을 달하도록 하라고 하면서 함정은 섬밖에서 표박(漂迫)하고 있을 터이라고 했다. 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풍파가 심하면 조그마한 종선을 섬에 붙일수 없다. 열이면 아홉, 암석에 부딪쳐 부서지게 되는 것이다. 물론 큰배는 섬에 접근할 도리가 없다. 최후의 수단이 있다면 종선을 파선시킬 작정하고 '라이프 짜겟'과 '로프'의 결사적 작업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13일의 상륙은 실패했으나 그날 만일에 한시간 전에만 도착하여 상륙작업을 개시 했었던들 5~6명내지 8~9명은 독도에서 한 이틀동안 현세의 '로빈손 쿠르소'가 되지 않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독도의 동도에서 하루 밤 천막을 치기로 했다. 그대신에 불필요한 인원은 될 수 있는 대로 함정으로 돌려보냈다. 저녁 햇살이 서쪽 바다위를 벌겋게 물들이고 있을때 단원들은 모두 본부기지로 집결 되었다. 함정으로부터는 우리들의 작업의 편의를 위하여 식사를 만들어 날라 주었다. 동도와 서도사이로 왔다갔다 하며 섬을 지키며 우리 일행을 호위해 주는 함정! 태극기가 펄럭거리는 우리해군 함정이 우리와 지척사이에 유유히 해상을 만보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들에게 무한한 미더운 느낌을 가지게 했다. 단원들은 단 하루의 작업이었지만 상당히 피곤한 모양이다. 아무리 바다가 고요하다고 하지만 바닷가로 몰자면 배를 탓건 암벽(岩壁)에 불어들건 물결을 뒤집어쓰지 않을 수 없다. 대부분의 아랫도리는 젖어 있었다. 또 등반대는 육체의 피로도 대단커니와 정신의 피로가 더 심하다. 그리고 바위를 타고 기어다녀야 하는 때문에 손끝이 모두 솔갑고 또 팔다리에 약간한 상처는 피하기 어려웠다.
넓이 두자가량, 높이 자가웃에 부피한자 조금 못되는 장방형(長方形)의 묵직한 것이다. 바로 동도 서쪽에 경상북도에서 세운 1948년6월의 "독도어민 조난자 위령비"에서 조금 떨어져 나란히 세웠다. 정면에는 우리 국문으로 '독도'라고 크게 쓰고 한자로 '獨島', 또 불란서 말로된 'LANCOURT'이라고 새겼다. 뒤에는 "한국산악회 울릉도 독도 학술조사단"이라고 새겼다. 다시 측면에는 세운날짜를 써넣었다. 무인고도의 밤이라고 하지만 조금도 외로울바 없었다. 물결소리 출렁거리는 기슭에는 캠프화이야(營火)가 밤새피어 오르고 하늘에는 반달이 찾아 든다. 레디오로는 서울서 부산서 또 일본말 중국말, 영어, 로시아말 등등 각가지 방송이 들린다. 그런중에도 우리가 이 고도에 와서 방송을 들으면서 절실히 느낀 것은 우리나라 방송의 전력(電力)이 다른나라의 그것보다 대단히 약하다는 것도 한가지 크게 섭섭히 생각된바 이만 그보다도 우리나라 방송이 여러종류의 전파로 대단한 방해를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육상에서 들을때 보다도 본토와 뚝떨어져 있는 외로운 섬에와서 내고장 전파를 잡아보려고 할때 중국말, 일본말 그리고 북한괴뢰 등의 강력한 방해를 받고 있음을 볼때 이는 단순히 방송하나만의 문제가 아니라 실로 우리나라의 통일발전의 사업이 얼마나 어렵다는 그것에 비길만 하다고 느껴졌다. 그런데 밤이 깊어서 우리 막사에는 일대환성(歡聲)이 일어났다. 다름아니라 천막가까이 물오리 한 마리가 찾아 들었던 것이다. 진객을 맞이한 우리들은 모두다 어린아이들처럼 어쩔줄 모르고 기뻐 뒤떠들었다. 무엇을 대접할까 저녁밥이 남았나? 사과? 아니 커피를
한잔 끓일까?고 야단법석이었다. 그때 특히 새의 생태(鳥類生態)에 전문적 지식을 가진 촬영반의 이군은 '아니야 저 물오리가 병이 들어서…무슨
병인지 모르지만 중태인걸…'의학반의 조박사도 여기는 하는 수가 없었다. 아침에 보니 그 물오리는 바위틈에 쪼구리고 앉은 채 왕생(往生)을 했던
것이다. (계속=사진은 독도에 상륙하여 표석을 세우는 산악회원) 독도의 '캠핑'은 시간도 짧지만 경험키 어려운 장소인 터이라 우리들은 밤이 깊도록 시간을 아껴가며 즐겼다. 그러나 다음날의 작업을 생각하고 또 천후가 결코 안심되지 않는 것을 생각하여 모두가 좋은 꿈을 꾸기는 했든 것이다. 그런데 아직 동이 트기전 천막이 펄럭거리는 소리에 잠이 깼다. 천막을 들치고 나오니 물소리도 높고, 구름이 앞뒤를 가리우고 있다. 때는 다섯시 전원 기상(起床)신호에 선잠을 깨친 듯 자리를 걷었다. 바람이 어떻게 불던 나머지 일을 끝마치어야 할 것은 우리들의 최대의 책임이다. 해뜨기를 기다려 기슭에 걸어 올렸든 배를 내리우고 작업 준비에 착수하는 동안 우리의 905호 함정은 슬며시 나타난다. 전화연락으로 아침 인사를 바꾸고 천후를 다짐했다. 오전중 크게 염려될 것은 없으니 오후1시 까지는 출범하도록 재촉이 있었다. 아침햇살을 따라 가재가 바위틈으로 어슬렁거린다. 바로 우리 본부기지 앞으로도 짝을 지어 뛰어놀고 있다. 운수가 좋다할까 해가 퍼지면서 구름이 걷히고 바람도 다소 잔잔해 진다. 측지반은 동도 앞 코숭이로 몰기로 하고 등번대는 서도로 달라붙었다. 서도는 동도의 비교가 아닌 칼날 같은 산이다. 높이가 백30m가량의 험악한 돌뿌리의 산이다. 등번대는 남쪽 안측으로 올르기로 했다. 다섯명의 일대가 전후 3시간이나 절벽에 붙어서 싸워보았으나 도저히 약4분의1정도의 중턱에 가서는 더 올라가기 어려웠다. 그렇다고 절대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시간에 한정이 있고보니 무리하게 자행할 수 없었다. 등반대가 절벽에서 싸우고 있는 동안 본부기지의 전화통은 쉴새없었다. 단원들의 시선은 전혀 등번대에 집중되어 있었다. 이때 산마루위에는 ‘비난추리가 ‘제트’비행기 모양으로 수십마리가 얼기설기 뒤지고 재치며 날고 있는 것도 장관이었다.
예정된 시간을 어김없이 일행은 0시30분까지에 전원이 함정으로 돌아갔다. 함정의 엔진소리가 귀가며 발걸음이 빨라질때 단 하루 밤의 꿈을 맺은 곳이라고 하지만 작별임에는 틀림없고 겸하여 몇해를 두고 벼르고 애써오던 조사단의 임무를 인제서 일단락을 짓고 다시 찾을 날의 기약없이 작별케되니 작별느낌도 새롭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의 함정이 울릉도 저포(苧浦)로 돌아간 것이 6시. 약간의 파도는 있었으나 이제는 대개가 파도에 엔간이 익숙해졌다. 그뿐아니고 그밤으로 16일 밤 9시 취항예정이라 바쁜 시간에 육지로 향하는 기분이 단원들을 긴장케 했다. 이같이하여 오징어잡이 등불이 섬을 둘러싸고 성을 치고 있는 울릉도를 밤으로 작별했다. 모두가 년래의 무거운 짐을 내리운 듯 뱃전에 나와서 울릉도야 잘있거라 바람부는 밤물결 거친밤 자지않고 밤새와 바다를 지키는 울릉도 여러분 잘있으시요…하고 마음으로 건강을 축복하며 작별을 아꼈다. 이튿날 17일 부산도착은 오후6시. 전후 왕복일주간에 항해시간은 60시간 만 이틀반이었다. (사진은 독도를 측량하는 측지반원)-끝- -----------------------------------------------------------------------------------------------------------------------------------------------------
1954년 독도(獨島)분쟁
소사(小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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