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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정부 관료들이 `독도 편입원' 제출 사주
日학자 "외무성 간부 등 3명이 주도적 역할"
(서울=연합뉴스) 김용수 기자 = 1905년 단행된 일제의 독도 자국영토 편입은 러일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당시 일본 정부 요직에 있었던 관료들이 한 어업인을 사주해 꾸며낸 것이라는 사실이 일본 학자의 연구를 통해서도 구체적으로 확인되고 있다.
특히 이들 관료는 독도가 한국 영토라는 사실을 익히 아는 위치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독도를 시마네(島根)현으로 강제 편입하는 `공작'을 벌였던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나이토 세이추(內藤正中) 일본 시마네(島根)대 명예교수는 26일 연합뉴스와 가진 인터뷰에서 "1905년 일본의 독도 편입에는 당시 외무성의 야마자 엔지로(山座円次郞) 정무국장, 농상무성의 마키 보쿠신(牧朴眞) 수산국장, 해군성의 기모쓰케 가네유키(肝付兼行) 수로부장 등 3명이 중심 역할을 했다"면서 "당시 이들은 모두 독도가 한국땅이라는 사실을 모를 리 없었던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나이토 교수에 따르면 이들 3명은 1904년 독도에서 강치 잡이를 하기 위해 한국측에 대하원(貸下願.독도 이용청원)을 하려던 나카이 요사부로(中井養三郞)라는 어업가를 꼬드겨 그의 `대하원' 신청을 독도 `영토편입 및 대하원'으로 바꿔 일본정부에 접수토록 하는 등 독도 영토편입을 유도해 가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 후 일본 정부는 나카이의 이같은 신청을 앞세워 1905년 1월28일 각의 결정을 통해 독도를 일본 영토로 강제 편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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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토 교수는 지방 고문헌 등을 토대로 독도 문제를 오랫동안 연구해온 사학자로,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에는 문제가 있다고 지적해온 대표적인 일본 학자다.
그는 "나카이는 독도를 한국 영토로 알고 한국정부에 대하 청원을 하러 도쿄에 왔으나 `독도는 한국보다 일본에 가깝다'는 기모쓰케 수로부장 등의 말을 듣고 당초 계획을 바꿔 `영토편입 및 대하원'을 1904년 9월29일 일본정부에 제출했다"면서 "이 과정에서 기모쓰케는 독도까지의 거리를 언급하면서 속임수를 썼다"고 지적했다.
나이토 교수에 따르면 기모쓰케는 독도까지의 거리를 당연히 한국은 울릉도로부터, 일본은 오키(隱岐)섬으로부터 따져야 하는데도 각각 두나라의 본토로부터 따져 독도가 거리상으로 한국보다 일본에 가깝다고 기만했다.
이와 함께 나이토 교수는 독도 영토 편입에 관여했던 마키 수산국장과 야마자 정무국장이 당시 일본인들이 한반도에 진출할 때의 필수 지침서로 독도가 한국 강원도에 속해 있는 한국땅이라고 쓰여 있는 한해통어지침(韓海通漁指針.1903년)과 최신한국실업지침(最新韓國實業指針.1904년)에 각각 서문을 썼던 장본인이라는 사실도 밝혀냈다.
나이토 교수는 "야마자는 외무성 정무국장이 되기 전에 서울에서 근무했던 한국통으로 1900년 대한제국이 칙령을 통해 독도 영유권을 확인한 사실을 모를 리가 없으며 기모쓰케도 바다 항로를 잘 알고 있어 당시 독도가 어느나라 땅인지 알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고 설명했다.
특히 야마자 정무국장의 경우 자신이 서문을 쓴 책에서는 독도를 한국땅이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서문 집필 직후인 1904년 7월 자신을 찾아온 나카이에게는 "시국(러일전쟁)이 시국인 만큼 (독도를) 영토로 편입해야 한다. 망루를 건축하고 무선 또는 해저 전선을 설치하면 적함을 감시하기에 매우 좋지 않겠는가. 신속하게 청원서를 보내도록 하라"고 영토 편입원 제출을 종용했다.
yskim@yna.co.kr / 2006년 10월 27일 (금) 14:04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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