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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3 - 인천 인물

[인물 35] 김병훈 - 사숙(私塾)이란

by 아름다운비행 2006. 1. 13.

 다소 생소한 의미의 '사숙(私塾)'은 지금과 같은 근대적 의미의 학교가 탄생하기 이전의 교육기관이다. 옛 중국의 제도를 받아들여 이뤄졌던 우리의 글방은 조선말까지 존속했었다. 이 글방은 한일합방 후에도 10여년간 지속됐으나 신식 과학 문명에 각성하고 중국의 위세가 축소되면서 자연도태됐다. 이 글방을 '서당' 또는 '사숙'으로 불렀다.

 성인들은 사숙에서 달마다 일정한 수업료를 내고 천자문에서 동몽선습 계몽편, 자치통감, 소삭, 사서오경을 배웠다. 따라서 사숙은 지금으로 따지면 과외나 사학의 개념과 비슷하다. 현재 서울에 있는 양정중고등학교의 시초는 사립법률대학격인 '양정의숙', 휘문도 '휘문의숙'으로 출발했다.

 사숙은 학과나 학년별로 나누지 않고 선생 한 사람이 두루 가르쳤다. 따라서 얼마되지 않는 월사금을 받아 수십명의 학생들에게 골고루 학문을 가르쳤다는 점에서 당시 선생의 능력은 탁월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특히 누추한 방에서 1년 중 3대 명절을 제외하고 연중무휴로 글소리를 내게 하는 혹독한 교육 훈련으로 '선생님 똥은 개도 안 먹는다'는 속담까지 낳았다. 일본에서도 막부시대 말에 길전이 '송하숙(松下塾)을 일으켜 명치유신의 걸출한 인물을 배출했고 경응의숙(慶應)이나 조도전(早稻田), 명치(明治)등은 지금도 민간 최고 교육기관으로 선망의 대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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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말년 시력잃고도 서재마련 청빈귀감 후학 늘 찾아와"

 

 "시조부 김병훈 선생에 대한 기억은 없지만 기품있는 선비였다는 사실은 시아버지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김병훈 선생의 증손주 며느리 홍사숙(77)씨는 집안 가풍에 대한 긍지가 남다르다. 대제원이라는 한의원을 운영했던 시아버지 상규씨는 늘 근엄하고 매사 정확한 사리로 아버지 김병훈 선생을 빼닮았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고 홍씨는 기억을 되살린다. 이같은 청빈한 삶의 자세를 후손들이 그대로 이어받아 단단한 가풍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김병훈 선생은 대제원 한쪽에 서재로 마련한 '지수제'에서 많은 후학들과 학문을 논했다고 한다. 특히 김병훈 선생은 말년에 백내장으로 시력을 완전히 잃고도 선비정신 만큼은 절대로 흐트러뜨리지 않을 만큼 꼿꼿하게 생을 마감했다는게 홍씨의 전언이다.

 홍씨는 “지금 집안 창고에 많은 서예작품 등이 있지만 아직까지 정리를 하지 못하고 있다”며 “김병훈 선생을 비롯, 가족들의 삶이 외부에 요란스럽게 노출되는 것이 부담스럽다”고 수줍어 한다.

 그녀는 특히 “최근까지 가족들은 3년 상을 치를 만큼 유교적 전통을 지켜왔다”며 “시집와서 늘 무릎 아래까지 내려 오는 한복에 버선을 신고 생활해야 할만큼 어른들이 엄했다”고 말한다. 특히 김병훈 선생의 말년에 인천지역의 최고 지식인들로 꼽혔던 후학들이 늘 '지수제'를 찾아와 자세를 가다듬곤 했다.

이희동·dhlee@kyeongin.com / 경인일보 2006. 1.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