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지역경제인
하상훈
'몹시 추운 어느날 아침 허겁지겁 등청하신 노옹(老翁). 땀이 비오듯 하다. 모자를 벗자 성긴 노발(老髮)
사이로 옥로(玉露) 같은 땀방울이 굴러 떨어질 뿐만 아니라 새하얀 김까지 무럭무럭 오른다. …본직인 인천곡물조합장을 제외하고도 인천시의회
부의장을 비롯해서 인천상공회의소 회두, 국민회 인천지부 참여, 그리고 무슨 조정위원, 관재위원 등 명예직이 거의 30개나 된다는 하옹(河翁)은
한참이나 손을 꼽다 말고 웃음으로 연막을 쳐버린다. “나는 인천에서 낳아서 인천서 생장하고 늙고 또 인천서 죽을 것이니까 인천을 위한 처사라면
신명을 아끼지 않겠소”'.
지난 1953년 신년을 맞아 '인천공보'가 행한 하상훈(河相勳) 인천시의회 부의장 인터뷰 내용이다.
'인천공보'는 1953년 당시 시장인 표양문(表良文)을 발행인으로 출범한 주간지이다.
당시 63세인 하상훈은 인천항 항만시설 확장에 큰
관심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나와 있다.
'대 인천 건설이란 항만시설의 확장, 특히 제2축 항의 준공을 빼놓고서는 운위(云爲)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이것만 이루어지면 인천의 발전은 물론이거니와 인천시민의 커다란 복리가 될 수 있으며 이어서는 이것이 곧 대한민국의
건전한 경제적인 발전책이 되리라는 것이 그의 신조이다'.
인천시사와 경인일보의 '격동 한세기 인천이야기'를 보면 하상훈의 약력이
자세히 소개돼 있다.
지난 1881년 태어난 하상훈은 동학 농민봉기 때 부친이 해주(海州)에서 옮겨와서 답동 터진개 근방에서 객주업을
시작, 번창시켰다. 영화초등학교 초기 졸업생으로 1920년대 인천물산객주조합의 부조합장을 맡았으며 초기 동아일보 제1대 인천지국장을
역임했다.
서병훈(徐丙薰), 이범진(李汎鎭) 등과 국악동호회인 '이우구락부(以友俱樂部)'를 조직해 활약했다. 1927년
민족운동단체인 '신간회(新幹會)' 인천지회장에 추대됐으며 일제의 탄압으로 해체되자 '신정회(新正會)'를 조직하고 그 회장을
맡았다.
8·15 광복 후 한국민주당 인천지부의 발기인이 됐으며, 1946년에는 인천상공회의소 초대 회장으로 선임돼 1952년
제3대까지 3차에 걸쳐 회장을 역임했다. 또한 1948년에 인천시 고문회장으로 추대됐으며, 1952년 초대 인천시의회의 부의장으로 선출됐다.
1960년 제2공화국 민주당 정권 당시 참의원(參議院) 의원으로 출마, 당선됐다. 1964년 작고하자 인천 최초의 사회장(社會葬)으로 장례가
치러졌다.
하상훈은 청년운동을 통해 신앙·봉사활동과 항일독립운동을 펼친다.
그는 1920년 감리교의 청년운동단체로 신앙운동과
사회봉사를 목적으로 하는 '엡윗청년회'의 남자 회장을 맡았으며, 비슷한 시기에 '이우구락부'에서 부장을 지냈다. 이 외에도 하상훈은 친목과
사회사업을 목적으로 조직된 '인천식산계'에서 평의원으로, 1927년 계급과 파벌을 타파하고 전인천적 집단체로 창립된 '신정회'의 위원장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하상훈은 6·25전쟁으로 북한군이 남침을 감행하자 정해궁(鄭海宮), 전두영(全斗榮), 이열헌(李烈憲), 한청
시단장 김득하(金得河), 검찰 인천지청장 오창섭(吳昌變) 등과 함께 비상시국 대책위원회를 조직, 당면한 긴급 행정조치와 후방 치안문제를
담당했다.
시인이자 인천 향토사 연구가인 조우성(광성고 교사)씨는 이와 관련된 에피소드를 풀어 놓았다.
“6·25전쟁으로
북한공산군이 인천에 들어오자 하상훈 선생은 인천을 지키기 위해 시청으로 갔습니다. 그가 시청에 도착하자 당시 공무원들은 다들 부랴부랴 도망가고
아무도 없었다고 합니다. 마지막까지 인천에 남아 있다가 사태수습이 여의치 않자 김동순씨와 피란길에 올랐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하상훈씨와 함께
피난길에 나섰다는 김동순씨는 2003년 7월 81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김씨는 부시장, 인천상의 사무국장, 초대 전국문화원연합회 인천광역시지회장
등을 지냈으며 그의 딸이 김성숙 시의원이다.
'인천상공회의소 120년사'를 보면 1946년 인천경제계의 대표적인 인물인 하상훈,
권정석, 조희순, 신언해, 이병균 등은 기회있을 때마다 인천상공회의소 설립문제를 거론해왔다. 그러던 중 같은 해 6월8일 인천의 회의실에서
하상훈, 문두호, 조희순, 김성국, 김원규, 이병균 등 인천 실업계를 총망라한 60여 명의 지도적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인천상의 창립위원회를
개최했다. 이후 8월10일 송학동 제2공회당에서 220명의 회원이 참석한 가운데 인천상의 창립총회가 열렸다. 인천상공업계의 총합적인 기관으로
발족한 인천상의는 1주일만인 8월17일 제1차 의원총회를 개최하고 임원진을 선출, 이 자리에서 하상훈이 회두에 뽑혔다. 그는 상공회의소법이
공포되고 제1대 의원이 선출(1954년 1월)되기 직전까지 8년 동안 회두를 맡게 된다.
천상의 120년사'를 집필한 김윤식
한국문인협회 인천지회장은 “하상훈씨는 바르고 꼿꼿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며 “많은 역할을 했지만 그에 대한 잡소리를 들어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는 또 “당시 객주·정미업을 한 지역거부(巨富)들이 돈을 벌면 학교·연극무대 등을 만들기도 했다”고 덧붙였다.
앞서 하상훈은
미군정인 1945년 지방의회의 전신인 고문회의 고문에 임명되면서 지역정치계에 발을 내딛는다. 그러나 고문회의는 형식적이며 실권도 없는 유명무실한
기구였을 뿐만 아니라 인천시민에 대한 허약한 대표성으로 인해 출범 때부터 여론의 비난에 직면했다고 '대중일보'(1945년 11월3일자)는 밝히고
있다.
이후 하상훈은 1948년 1월7일 시행된 인천부 고문회 선거결과 11표를 얻어 고문자로 당선된다. 그러나 그는 1948년
5월10일에 실시된 제헌국회의원 총선거에서는 조봉암에게 밀려 고배를 마셨다. 하상훈은 1952년 4월25일 실시된 역사적인 시의회 의원선거에서
당선된다. 인천시의회 '자치(自治)의 표정(表情)'을 보면 하상훈은 제5선거구에 나와 2만702표를 얻은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러나 당선자들이
평균 1천~2천표씩을 얻어 당시 기록이 잘못된 것이 아니냐는 지적도 있다.
이현주 국가보훈처 연구관은 “당시 기업인들이
사회·정치·문화를 주도했다”며 “인천은 공업·항만도시여서 기업인들이 더 많은 방면에서 활약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또 “초대 시의원에 추대된
인물을 보면 상당수가 기업인이었다”며 “일본에 협조한 사람도 없지는 않지만 다른 지역에 비해 친일이 많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하상훈은
같은 해 5월5일 소집된 제1회 인천시의회에서 부의장에 선출된다. '인천공보'는 그를 이렇게 평가했다.
'소위 찬탁 반탁의 의결에
앞에서 맹활동을 전개한 결과 드디어 42대 1이라는 절대다수로 반탁의 승리를 걷도록 진력했을 뿐 아니라 찬탁거두의 한 사람인 안모(安某) 대의원
면상에 잡히는 대로 금속재떨이를 내붙인 용맹으로 해서 일약 유명해진 일화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소신관철을 위해 이처럼 물불 가리지 않는 그것이
그의 기상이며 또한 정객으로서의 관록이다'.
하상훈은 1960년 7월29일 실시된 인천시의 민의원·참의원 선거 2부에서 참의원으로
당선됐으며, 1964년 노환으로 숨을 거뒀다.
인천시사 편찬에 참여한 김양수 선생은 “하상훈씨 자손 중에 아들이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며 “인물사를 편찬하면서 따님의 행방을 쫓았으나 전혀 찾을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이어 “인천인물의 후손들이 자료·기록을 갖고 있지 않은
것이 가장 큰 맹점”이라고 지적했다.
목동훈·mok@kyeongin.com / 경인일보 2006. 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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