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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3 - 인천 인물

[인천인물 100인] 39. 이옥녀 - 박창례의 '평생단짝' , 학교 설립 때부터 든든한 후원자

by 아름다운비행 2006. 2. 28.

 

 

이옥녀(1910~1987년) 선생은 박창례 선생과 늘 함께했다. 박 선생이 처음 보각선원 강당에서 야학을 열었을 때부터 이들은 함께였다.


이 선생에 대해선 알려진 게 거의 없다. '여장부'로 통했던 박 선생과는 달리 조용한 성격인 데다 늘 학교에 남아 박 선생의 교육사업을 뒷바라지했기 때문이다.

이 선생은 1910년 강화에서 태어났다. 이후 인천시내로 와서 1929년 인천영화여자보통학교(현 인천영화초등학교)를 졸업했다.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학업을 중도포기했던 박 선생과는 달리 그는 비교적 부유한 환경에서 자란 것으로 알려졌다. 동명초교에 남겨진 기록에 따르면, 그는 1934년 일본 조도전대(현 와세다대) 고등여학교를 졸업했고, 1937년에는 경성보육학교를 졸업했다.

박 선생과 이 선생의 만남은 유년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의 제자 김상열(75·여)씨는 “박 선생님과 이 선생님은 한 동네에서 학교(인천보통공립·영화여자보통학교)를 다녀 오래 전부터 친구사이였다고 하셨다”며 “그 때부터 두분이 평생지기로 지내셨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이 선생은 글솜씨가 뛰어났다. 그는 1946년 동명학원이 6년제 국민학교(현 초등학교)로 승격된 뒤 교가를 직접 작사하기도 했다. 작곡은 경성보육학교 재학 당시 은사였던 홍난파가 했다. 매사에 꼼꼼한 성격인 이 선생의 존재는 박 선생에겐 특별했다. 박 선생이 대외적으로 활동을 벌이며 학교 발전을 위한 여러 사업들을 끌어오면, 이 선생이 이를 분석하고 사업성공을 위한 최대 공약수를 내놨다고 한다.

박 선생이 제자들에게 아버지와 같았다면, 이 선생은 어머니였다.
그는 교감으로 재직 할 당시 박 선생에게 혼쭐이 난 교사들에게 “너희가 잘 되라고 하시는 거니 너무 서운해 하지 말아라”며 다정한 말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그도 평생 결혼을 하지 않았다. 동명초교 뒤편 방 한칸에서, 박 선생의 방 옆에서 혼자 살았다. 늘 정갈한 옷차림에 교양있는 말투로 여 학생과 여 교사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고 한다.
대한적십자사에서 오랜기간 봉사활동을 한 그는 1982년 경인일보사로부터 '경인봉사상'을 받기도 했다.
평생을 함께 한 친구였기에 박 선생의 죽음은 그에게 너무나 큰 충격이었다.

이 선생은 박 선생이 죽음으로 학교를 비운 뒤 동명초교 이사장직을 맡던 중 1987년 7월 심장마비로 쓰러져 숨졌다.
박 선생이 작고한 뒤 교장직을 맡은 나찬원(75) 전 동명초교 교장은 “이 선생님도 박 선생님 못지않은 훌륭한 교육자이셨다”며 “만인평등교육을 실천하신 두분 선생님께 깊은 존경을 표한다”고 말했다.

김장훈  cooldude@kyeongin.com / 2006.2.9

 

 

* 출처 : www.kyeongin.com/main/view.php?key=2413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