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 3 - 인천 인물

[인천인물 100인] 35. 김병훈 - 한국근대예술 '혼' 불어넣다

by 아름다운비행 2006. 1. 13.

 

▶ 김병훈 선생의 자취가 남아있는 지수제 목각과 수판.


 인천의 마지막 선비 김병훈 선생의 존재는 최근까지 묻혀 있었다. 그러나 김 선생은 인천을 넘어 한국 근대 예술사의 큰 획을 그은 후학들이 최근 집중 조명을 받으면서 그의 존재가 새롭게 부각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꼽히고 있는 그의 후학들은 한국미학의 선구자 고유섭 선생을 비롯, 법조인 조진만 선생, 한국 근대 서예의 혈맥 박세림, 유희강, 고일 선생 등이다. 이들에게 지고지순한 예술혼을 가르쳤던 인물이 바로 그다. 따라서 그는 한국 근대 예술의 뿌린 셈이다.

 

   그러나 인천을 빛낸 후학들의 명성에 비해 그는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해 왔다. 따라서 일제치하 근대교육이 도입되기 직전에 '의성사숙(意誠私塾)'이라는 마지막 글방을 운영하며 동시대 선각자들에게 추앙받는 인물이었다는 점에서 그의 족적을 되짚어 보는 일은 큰 의미가 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인천시 중구 경동 232 신신예식장 입구 4층짜리 건물은 김병훈 선생을 비롯, 5대째 자손들이 살고 있는 곳이다. 현재 이곳에는 그의 손주 며느리 홍사숙(77)씨가 홀로 고즈넉이 집을 지키고 있다. 집 구석구석에는 김병훈 선생의 묵은 자취가 곳곳에 남아 있다. 그가 평소에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손때 묻은 옛 수판과 탁자 등을 가족들이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홍씨는 “거실에 걸려 있는 호랑이 그림은 시조부께서 일본인 화가와 맞바꾼 작품”이라고 설명한다.

 그녀는 “시아버지(김상규)로부터 전해들은 시조부는 말그대로 엄격하고, 정확하고, 단정한 분이었다”며 “이런 영향을 받아서인지 시집을 와 문밖엘 제대로 나가질 못할 만큼 절제된 생활을 해야 했다”고 회고한다. 그녀는 또 “10살 적에 창녕초등학교에 다닐때 가끔 서당 훈장 선생님 복장을 한 근엄한 할아버지를 자주 목격했었다”며 “그런데 시집와서 그 분이 시조부였다는 사실을 알고 놀란 적도 있다”고 일담을 전했다.

 이처럼 엄한 집안 내력 때문인지 김병훈 선생의 아들 상규씨는 한약방 대제원을 운영했고 가업을 이어받은 손자 태진씨는 초대 대한한의사회 회장을 역임하는 등 후손들이 가풍을 잇고 있다. 이어 증손자 성한씨도 할아버지의 예술혼을 이어받아 서예작품으로 국선에 수차례 입상하는 등 예술적 잠재력을 발산하고 있다. 홍씨는 바로 최근 유명을 달리한 태진씨의 부인이다.

 그러나 현재 김병훈 선생에 대한 기록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손주 며느리 홍씨에 따르면 지난 1950년 6·25전쟁 당시 집으로 쓰던 목조건물이 완전히 소실되면서 김병훈 선생의 작품과 초상화 등을 모두 잃었다는 것이다.

 

   지난 1915년 조선총독부의 '인천향토사료조사사항'에는 김병훈 선생이 1863년 충북 단양군에서 태어난 것으로 적혀 있다. 그는 아홉살때 경기도 양근에 거주하는 이석재에게 한문과 화도를 배웠다. 그는 26세가 되면서 한양으로 와서 수륜원(현재 농수산행정 관련 부서) 주사가 돼 수년간 근무하다가 1908년 인천에 이주해 한문선생이 됐다. 이 당시에 그가 지금의 금곡동 창영학교 현 강당 서쪽에 지은 것이 '의성사숙'이다. 사숙은 규모가 작은 마을의 종합학교다. 조선시대 말까지 있었던 글방(서당)과 비슷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제자 고일 선생은 지난 1955년 쓴 '인천석금'에서 자신의 스승을 “지조가 높고 청빈한 양반으로 박학 다재하고 강직 청렴한 인격자”로 평했다.

 인천석금에는 “김병훈 선생이 머리에 관을 쓰고 단정히 앉아 등나무로 만든 긴 회초리로 학동들을 다스렸다”며 “또 중국의 유교 철학을 통해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고 선악을 판단할 수 있는 지혜를 가르쳤는가 하면, 매란국죽과 산수 풍경을 그리는 동양화도 지도했다”고 적고있다. 특히 고일 선생은 “고인향무군자 즉여산수위우 이무군자즉이난죽위우 좌무군자 즉이금주위우(古人鄕無君子 則與山水爲友 里無君子則以蘭竹爲友 座無君子 則以琴酒爲友=옛 사람들은 마을에 군자가 없으면, 산수와 더불어 벗을 삼고, 이웃에 군자가 없으면 난과 죽으로써 벗을 삼고, 자리에 군자가 없으면 술로써 벗을 삼았다)의 경지로 선비의 처세를 지켰다”고 스승을 추켜세웠다.

 특히 그의 교습법은 특이해서 새벽에는 글을 해석하고 설명해 암기시켰으며 글씨 내기를 권장해 스스로가 분발하고 격려하는 경쟁심을 갖게 했다. 그는 의성사숙을 그만둔뒤 아들이 운영하는 한의원 한켠에 '지수제(芝壽齊)'라는 서재를 마련하고 후학들과 학문을 논했다고 한다. 손주 며느리 홍씨는 “시조부는 말년에 내동 집과 지수제를 오가며 학문을 연구했다”며 “시조부가 돌아가신 뒤에도 고일 선생 등이 지수제에 찾아와 시어버지 상규씨와 스승을 회고하는 모습을 종종 목격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말년에 그는 백내장으로 시력을 완전히 잃고 청빈한 말년을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인천석금'에는 의성사숙에서 한학을 배우고 전문대학을 마친 대표적 수재를 조진만, 고유섭으로 꼽고 있다. 또 인천의 서예가로 이름이 높은 박세림, 장인식, 유희강도 김병훈 선생의 수하에서 예술혼을 갈고 닦았다.

 김병훈 선생의 새로운 발굴은 인천지역사에서 남다른 의미로 평가받고 있다. 인천 근대사에서 예술계를 풍미했던 인물들의 배경에는 마지막 선비 김병훈 선생이 그림자처럼 버티고 서있기 때문이다.


 인천학연구원 김창수 박사는 “인천의 근대 예술사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바로 김병훈 선생의 가치를 확인했다”며 “이번에 그의 족적이 확인된 것은 지역 예술계 연구에 있어 의미있는 일”이라고 말했다.

 이희동·dhlee@kyeongin.com / 경인일보 2006-01-05 

출처 : www.kyeongin.com/main/view.php?key=241304

 

 

 

[인천인물 100人·35] 김병훈선생 증손주 며느리 홍사숙씨

"말년 시력잃고도 서재마련 청빈귀감 후학 늘 찾아와"

이희동 기자 / 발행일 2006-01-05 제0면 

 

 

“시조부 김병훈 선생에 대한 기억은 없지만 기품있는 선비였다는 사실은 시아버지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김병훈 선생의 증손주 며느리 홍사숙(77)씨는 집안 가풍에 대한 긍지가 남다르다. 대제원이라는 한의원을 운영했던 시아버지 상규씨는 늘 근엄하고 매사 정확한 사리로 아버지 김병훈 선생을 빼닮았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고 홍씨는 기억을 되살린다. 이같은 청빈한 삶의 자세를 후손들이 그대로 이어받아 단단한 가풍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김병훈 선생은 대제원 한쪽에 서재로 마련한 '지수제'에서 많은 후학들과 학문을 논했다고 한다. 특히 김병훈 선생은 말년에 백내장으로 시력을 완전히 잃고도 선비정신 만큼은 절대로 흐트러뜨리지 않을 만큼 꼿꼿하게 생을 마감했다는게 홍씨의 전언이다.

홍씨는 “지금 집안 창고에 많은 서예작품 등이 있지만 아직까지 정리를 하지 못하고 있다”며 “김병훈 선생을 비롯, 가족들의 삶이 외부에 요란스럽게 노출되는 것이 부담스럽다”고 수줍어 한다.

그녀는 특히 “최근까지 가족들은 3년 상을 치를 만큼 유교적 전통을 지켜왔다”며 “시집와서 늘 무릎 아래까지 내려 오는 한복에 버선을 신고 생활해야 할만큼 어른들이 엄했다”고 말한다. 특히 김병훈 선생의 말년에 인천지역의 최고 지식인들로 꼽혔던 후학들이 늘 '지수제'를 찾아와 자세를 가다듬곤 했다.

<이희동기자·dhlee@kyeongin.com>

출처 : www.kyeongin.com/main/view.php?key=241302

 

 

 

[인천인물 100人·35] 사숙(私塾)이란

근대적학교 이전 '글방'… 천자문등 가르쳐

경인일보 / 발행일 2006-01-05 제0면 

 

▲ 의성사숙이 있었던 금곡동 창영초등학교 현 강당모습.

다소 생소한 의미의 '사숙(私塾)'은 지금과 같은 근대적 의미의 학교가 탄생하기 이전의 교육기관이다. 옛 중국의 제도를 받아들여 이뤄졌던 우리의 글방은 조선말까지 존속했었다. 이 글방은 경술국치 후에도 10여년간 지속됐으나 신식 과학 문명에 각성하고 중국의 위세가 축소되면서 자연도태됐다. 이 글방을 '서당' 또는 '사숙'으로 불렀다.

 

성인들은 사숙에서 달마다 일정한 수업료를 내고 천자문에서 동몽선습 계몽편, 자치통감, 소삭, 사서오경을 배웠다. 따라서 사숙은 지금으로 따지면 과외나 사학의 개념과 비슷하다. 현재 서울에 있는 양정중고등학교의 시초는 사립법률대학격인 '양정의숙', 휘문도 '휘문의숙'으로 출발했다.

 

사숙은 학과나 학년별로 나누지 않고 선생 한 사람이 두루 가르쳤다. 따라서 얼마되지 않는 월사금을 받아 수십명의 학생들에게 골고루 학문을 가르쳤다는 점에서 당시 선생의 능력은 탁월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특히 누추한 방에서 1년 중 3대 명절을 제외하고 연중무휴로 글소리를 내게 하는 혹독한 교육 훈련으로 '선생님 똥은 개도 안 먹는다'는 속담까지 낳았다.

<이희동기자·dhlee@kyeongin.com>

출처 : www.kyeongin.com/main/view.php?key=4179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