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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3 - 인천 인물

[인천인물 100人] 34. '묵헌' 김정렬 前인천시장

by 아름다운비행 2005. 12. 29.

 

 >34< '묵헌' 김정렬 前인천시장

지난 1996년 6월10일 오후 인천시 남구 숭의동 수봉공원에서 최기선 시장을 비롯, 신맹순, 김동순, 심정구, 문병하, 이기상, 강부일, 민봉기, 곽재영 등 인천 지역의 정·관·재계 인사 300여명이 한 자리에 모였다.
사법(司法), 행정(行政), 입법(立法)의 3부(三府)를 두루 거친 묵헌(默軒) 김정렬(1907~1974) 전 인천시장의 '송덕비' 제막식을 갖기 위해서다. 고인이 된지 22년만의 일이다.

묵헌의 큰 아들 한경(82)씨는 "2년여동안 제막식을 준비한 터라 참석자들의 얼굴은 고무돼 있었다"고 회고했다. 이날 행사는 '고 김정렬 전 시장 송덕비건립추진위원회(위원장·고 김은하 전국회부의장)'가 주관하고 지역인사 120여명이 추진위원으로 참여해 뜻을 모았다.

"서울 지방법원 인천지원장을 거쳐 1954년 시의회 간접 선거에서 제2대 민선시장에 선출되신 후, 58년 시행된 첫 직선제 시장 선거에서는 무투표 당선의 영예를 차지하였다. 선생은 민심을 모아 시 행정에 반영하여 더불어 함께 사는 시정에 전념하였으며 지방자치단체장으로서는 유일하게 3·15 부정선거 획책에 정면으로 맞서 항거함으로써 행정 최일선에서 민주 질서를 지키는데 솔선수범하였고 시민으로 부터 청백리로 추앙받았다(생략)….”(수봉공원 송덕비 비문중 일부)

한경씨와 고인이 된 김동순 전 인천문화원장 등에 따르면 1960년 1월 중순 인천시장 집무실에선 김 시장과 당시 최인규 내무부장관, 도경 및 일선 경찰서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3월 정·부통령 선거를 앞둔 대책회의가 열렸다고 한다. 회의 주재는 자유당 후보의 득표율을 80% 이상 높이고, 이를 지키지 못하면 사표를 받겠다는 집권당의 압력이었다. 당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장관의 명령에 항명을 하기란 보통 배짱으로선 엄두도 내지 못하는 일이다.

그러나 김 시장은 달랐다. 당시 묵헌은 “선거권은 주민의 고유한 권한으로 시 당국으로서도 어쩔 수 없다”며 지시를 거부했다. 묵헌의 비서관을 지낸 정구열씨는 “항명 이후 경찰이 시장님의 집무실 출입을 금지시키고, 시장에게 부시장과 총무과장 등이 업무보고 하는 것 조차 막았다”며 “이 소식을 전해들은 시민들과 공무원들은 소신 있는 시장님의 결정에 박수를 보냈다”고 적힌 지면을 소개하기도 했다. 김 시장은 1956년에도 자유당의 압력을 무시한 채 혁신당 대통령 후보인 조봉암씨의 후보등록을 받아주는 소신을 보였다.

묵헌은 인천과 경기도 접경인 소래(시흥)에서 1907년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원래 이름은 영복(永卜)이었으나, 17세 되던 해(1923년)에 정렬(正烈)로 개명한 것으로 호적부에 기록돼 있다. 왜 이름을 바꿨는지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는 성균관 주사 김동일(金東一)과 어머니 김해 김씨의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적지는 경기도 부천군 소래면 무지리 438(현 시흥시 무지내동 428)이다. 묵헌은 고향에서 천자문·중용·맹자 등 한학과 사서삼경을 배운 뒤 서울로 올라가 27세때 보성전문학교 법학과를 나왔다. 그뒤 그는 39세때인 1945년 광복이 되자, 서울지방법원 판사로 임용돼 위조지폐사건, 학원통합연맹사건, 교련사건 등 정치적 사건을 원만히 처리했다.

는 44세가 되던해 인천지원판사와 인천시선거관리위원장, 서울지방법원 부장판사 겸 인천지원장에 부임하게 된다. “아버지는 고향에 대한 애착이 대단하셨습니다. 고향에 판사로 부임하면서 어떻게 봉사할 지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장남 한경씨의 회고)

고향에 부임한 그는 체육회, 로타리클럽 등지에서 많은 활동을 벌였다. 그는 고향에서 공직생활을 하면서 자신은 물론 가족들에게 까지 소박과 청빈을 강조했다. 한경씨는 “판사시절 닭 두마리가 집에 선물로 들어온 적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뇌물은 반드시 사건이 묻어 들어온다며 아버지의 엄명으로 되돌려 보냈다”고 당시를 기억했다. 묵헌은 소박과 청빈함이 지역 사회로부터 인정을 받으면서 몇몇 정치인들의 권유로 지난 1954년 나이 48세때 정치와 인연을 맺는다.

원만한 인격과 청렴한 기질, 성실한 직무열을 높이 산 몇몇 시의회 의원 등의 노력으로 묵헌은 제1차 인천시의회에서 제2대 민선시장에 임명됐고, 이후에는 인천시교육위원회 의장, 인하공과대학후원회장, 인천체육회장으로 당선된다.
그는 또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인천지부 위원장, 인천정악원(仁川正樂院) 2대 위원장, 인천유도회 초대회장, 그리고 1958년 직선시장에 출마해 전국에서 유일하게 무투표 당선된다. 강인한 업무추진력과 청빈함 등이 시민들부터 높게 평가된 결과였다.

묵헌은 시장으로 재임한 7년간 배다리철문확장, 동원교, 인천교, 인천역사(仁川驛舍) 등 지역사회 발전에 큰 획을 긋는 역사를 펼쳤다. 특히 그는 인천시편찬위원회를 발족하는 등 인천뿌리찾기에도 정열을 쏟았다.


풀뿌리 민주주의 기초를 다지던 그에게 시련이 닥친 것은 1960년 3·15부정선거시 항명사건이었으며 부도덕한 정권의 서정쇄신에 희생된다. 이후 그는 무죄가 인정돼 심계원(현 감사원)차장 겸 고등고시 전형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는 정치에 끈을 놓기 힘들었던지 1960년 12월 경기도지사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이후 묵헌은 변호사 활동을 하면서 1966년 서울 제2변호사회 회장으로 일하다 1967년 제 17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시 류승원 후보를 893표 차로 누르고 당선돼 정계에 다시 투신했다. 국회에서도 그는 소양강댐 공사비리, 이수근 사건, 향토방위법 등을 처리하고 신민당내 내무·법무 탄핵심판위원을 지냈다. 1974년 의원 임기 1년여를 남겨둔 채 칩거생활에 들어간 이후 지병인 심장병이 악화돼 남구 주안동 408 자택에서 68세로 타계했다. 그가 별세하자 인천시는 그의 공훈을 기려 하상훈에 이어 두번째로 향토사회장으로 치러 숭고한 뜻을 기렸다.


■ 김정렬 前인천시장 이력.
▲1907년 10월29일생
▲1930년 서울양정중학교 졸업
▲1933년 서울보성전문학교 법학과졸
▲1945년 서울 지방법원 판사
▲1950년 서울 지방법원 인천지원장
▲1954년 제2대 민선 인천시장 당선
▲1954년 인천체육회장
▲1958년 제3대 민선 인천시장 투표당선(직선)
▲1960년 심계원(현 감사원) 차장 및 고등고시 전형위원
▲1960년 경기도지사 출마 낙선
▲1961년 변호사 개업
▲1966년 서울 제2 변호사회장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당선
▲1974년 2월 19일 타계

 

송병원·song@kyeongin.com / 2005-12-08 

출처 : www.kyeongin.com/main/view.php?key=2411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