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의 인성여고 체육관 자리에 있었던 인천공회당. 진우촌은 인천의 대표적 노동단체의 하나인 인천소성노동회에도 가담했다.
>33< 극작가 진우촌
인천시 중구 경동 238에 위치한 애관극장. 지금은 5개관 860석 규모의 멀티플렉스 영화관으로 재개관했지만 1920년대 이곳에서는 '칠면구락부' 즉 우리나라 연극사에 한 획을 그은 극작가 진우촌(1904~?)과 함세덕, 그리고 연출가 정암을 배출한 곳으로 유명한 곳이다.
인천의 소중한 문화인물인 극작가 '진우촌(秦雨村·1904~?)의 본명은 종혁(宗爀)이다.
한국 근대연극사에서 '특이한 극작가'로만 기억되고 있는 진우촌.
1920년대 인천지역 문화운동을 이끈 인물중의 한 사람인 진우촌은 인천지역 배재학교 출신들의 모임인 인배회는 물론 경인기차통학생회, 제물포청년회 등의 당시 젊은이들의 모임은 물론, 노동단체의 하나인 인천소성노동회와 카프의 문예노선을 따르는 유성회에도 참여했다.
또 진우촌은 시, 소설, 희곡 등 다양한 장르의 문필활동을 하면서 한편으로 '칠면구락부'와 같은 연극모임을 만들어 작품을 상연했으며 '습작시대' 1923년 '개혁'과 '시드러가는 무궁화'가 동아일보의 현상공모에 연속으로 당선되고 이어서 1925년 '조선문단'에 '구가정의 끝날' 등의 작품을 발표했다.
진우촌은 1904년(광무 8년) 7월22일 부친 풍기 진씨 수와 모친 경주 김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래로 11살 터울의 정옥과 18살 터울의 문옥이 있었으며 서매(庶妹) 정희와 문길도 있었다. 진우촌의 초명은 태원(泰源)이었으나 1919년 종혁(宗爀)으로 개명했고 우촌(雨村)은 필명으로 '구가정의 끝날'을 발표할때부터 사용했다.
그의 보통학교 재학기록은 현재로서는 찾을 수 없지만 14세 되던 1918년 서울 배재학당의 4년제 본과에 입학했고 1922년 졸업했다. 1923년 인천에서는 인천에 거주하는 배재학생들의 모임으로 인배회가 결성됐고 이에 앞서 경인기차통학생 친목회가 활동하고 있었다. 1920년을 전후로 시작된 이들 경인기차통학생 친목회는 이후 한용단, 제물포청년회 등의 설립으로 이어지면서 이때의 구성원들이 인천의 문화운동을 주도했다.
진우촌은 경인기차통학생회와 인배회는 물론 1923년에 결성된 제물포청년회에도 속해있었다. 이들 단체들은 각종 연예 대회의 개최 등 주로 문화활동에 중심을 두고 활동하고 있었으며 그중 소인극 공연은 매우 중요한 사업 중 하나였다. 또 진우촌은 인천의 대표적 노동단체의 하나인 인천소성노동회(仁川邵城勞動會)에도 가담했다. 1923년 창립된 인천소성노동회는 인천의 무산 대중을 중심으로 활발한 사회·문화 활동을 전개해 창립 1년만에 회원 1천200명을 자랑하게 됐으며 1924년 4월 인천공회당에서 총회를 열어 노동총동맹회로 조직이 개편된다. 여기에서 진우촌은 3명의 선전부 위원 중 하나로 선출됐다.
그리고 등단 후인 1925년 12월 진우촌은 이비도, 박형남 등과 인천유성회를 조직한다. 조직 강령에 '본 회는 민중예술을 본위로 하되 더욱 푸로 문학의 건전을 도모한다”고 한 것으로 봐 1925년 결성된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APF)의 문예노선을 따르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진우촌은 그다지 두드러지는 활동은 펼치지 못한 것으로 보여진다. 1926년 진우촌은 정암, 원우전 등 연극인으로 유명한 이들과 칠면구락부를 결성해 골즈워디의 '승리자와 패배자' 등의 작품을 상연했고 1927년에는 문예지 '습작시대'의 편집 및 발행 책임을 맡는다. 인천 지역에서 발간된 최초의 문예지인 '습작시대'의 창간호에는 주요한, 김동환, 박팔양, 엄흥섭 등 이 시기의 주요 문사들의 글이 실려있다. 이를 보면 1920년대 진우촌은 인천에서 활발하게 활동했음을 알 수 있다.
1923년 5월 진우촌은 동아일보 일천호 기념 작품 공모에 '개혁'이 당선돼 등단한다. 이때 동화부문에 '의조혼 삼남매'도 아울러 당선됐고 이어서 9월 물산장려운동의 일환으로 동아일보에서 실시한 작품 공모에 '시드러가는 무궁화'도 당선된다. 1925년 2월에는 초기 작품중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구가정의 끝날'을 발표했고 1926년 5월31일과 6월3일 이틀간에 걸쳐 동아일보에 '보옥화'라는 동화를 게재했으며 1925년 7월에서 1926년 10월에 이르는 기간동안 14편의 시를 동아일보에 발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진우촌은 1929년 인천에서 발간된 문예지 '습작시대' 이후 근 10년동안 활동을 보이지 않는다. 진우촌이 다시 나타난 것은 1928년. 극단 낭만좌는 셰익스피어 '햄릿' 1막을 각색한 '묘지'로 동아일보 주최의 제1회 연극경연대회에 참가했는데 이때 이 작품을 각색한 사람이 진우촌이었다.
낭만좌가 해산된 이후 진우촌은 1943년 동양극장에서 '왕소군'을, 1994년 현대극장에서 '뇌명'을 상연했고, 이는 현대극장의 후신 극예술협회에서 1948년 다시 상연된다. 1946년에는 극단 청탑에서 '보검'이란 작품을 상연하기도 했다.
해방후 진우촌은 동양극장의 청춘좌와 좌파성향의 자유극장에 가담한다. 자유극장은 개관작으로 진우촌의 '망향'을 상연했고, 이는 '두뇌수술'로 개제돼 '신문예 창간호(1945.12)'에 실렸다. 그리고 1946년 3월 전조선문필가협회가 결성되고 그 대회를 공지하는 기사의 추천회원 명단에는 진우촌의 이름이 올라있다.
그러나 진우촌의 1950년대 이후의 행적은 베일에 가려져 있어 그 이후 진우촌이 어떤 작품활동을 했는지 어디에서 사망을 했는지 알 수 없는 상태다.
윤진현 박사는 “진우촌은 인배회를 비롯해 경인기차통학생회, 제물포청년회 등 당시 젊은이들의 모임은 물론이요 노동단체의 하나인 인천소성노동회와 카프의 문예노선을 따르는 유성회에도 참여했다. 또 진우촌은 시, 소설, 희곡 등 다양한 장르의 문필활동을 하면서 한편으로 '칠면구락부'와 같은 연극모임을 만들어 작품을 상연했으며 '습작시대'등의 잡지 편집에도 관여하면서 의욕적으로 활동했다. 진우촌이 인천지역에서 활동하면서 남긴 가장 큰 업적은 바로 이 '활동'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라고 진우촌의 인천지역활동을 평가했다.
자료협조-윤진현 박사(문학박사, 전 인하대 한국학연구소 연구원, 현 민예총 인천지회 정책위원장)
김신태·sintae@kyeongin.com / 2005. 11. 10
출처 : www.kyeongin.com/main/view.php?key=241143
진우촌과 항도 인연은
윤진현 박사는 진우촌이 인천지역에서 활동하게 된 배경을 이렇게 밝히고 있다.
1904년 7월22일 출생한 진우촌이 인천 출생인가에 대해서는 아직 확정지을 수 없는 부분이 있다. 다만 진우촌의 재종조부이며 동아일보 초대 기자로서 일제 강점기 중요한 언론인이었던 진학문의 아버지 진상언이 인천 감리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어 인천과 진씨 일가의 인연은 짐작보다 오랜 것일 가능성이 있다. 다만 진우촌의 제적등본에는 다이쇼 4년(1915년) 12월5일 인천부 율목리 180번지에 이주한 사실이 밝혀져 있고 이어 208번지로 이사한 사실도 기록돼 있으나 그 이전의 기록은 찾아 볼 수 없다.
이 집안의 제적등본에 따르면 율목리와 내리, 송현리 등으로 자주 이사를 다녔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진우촌의 아버지 진수(秦秀)는 세창양행에 근무했다는 기록이 있는 바, 시기는 불확실하지만 부친이 여기에 근무하면서 인천으로 이주하게 됐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이주한 인천에 정착해 유년을 보내고 서울로 진학한 이후에도 인천을 중심으로 활동했으며 이는 1920년대 내내 지속됐다. 따라서 인천 출생 여부와 무관하게 진우촌을 '인천인', 한 시기를 열심히 살았던 자랑스러운 '인천 사람'으로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진우촌 일가는 1942년 서울 부암정으로 이주했으며 그 후 무연고 호적으로 현재에 이르고 있다.
경인일보 / 2005. 11. 10
출처 : www.kyeongin.com/main/view.php?key=24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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