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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3 - 인천 인물

[인물 31] 장발 - 일제의 '조선미전' 맞서 목일회등 새 전기 마련

by 아름다운비행 2005. 11. 26.

 

 

 “장발 선생은 근대 미술교육의 골격을 다졌고 기독교 미술의 질과 양에서 현격한 발전을 보이는데 선구자적 역할을 하셨지요. 그런 점에서 그가 미술계에 미친 영향은 매우 크다고 봅니다.”
 미술평론가인 이경모 인천대 겸임교수는 장발 화백에 대해 “장발 선생은 여러 가지 제약이 따르는 가톨릭 성화에 집착했을 뿐만 아니라 미술이론, 교육, 행정에 치중해 작가로서의 한계를 드러냈다”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나라 근·현대 미술에서 그의 족적은 그 누구보다도 크기 때문에 이러한 한계는 금방 상쇄되고도 남음이 있다”고 했다.

 “인천의 유력한 가정에서 태어나 동경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공부하다 최초로 미국에 유학하고 귀국한 후 한국 미술계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특히 미술교육자로서 서울대학교에서 미술대학을 설치해 우리 근대적 미술교육의 틀을 짜는 한편 서구의 이론서들을 번역 소개함으로써 이론부재의 한국미술계를 자극했지요.”

 이 박사는 “일제 강점기에 장발 선생은 일인들이 주관하던 조선미전에 출품하지 않는 대신 네모듬회, 목시회, 목일회 등을 주도하며 엘리트미술가들의 결속을 다짐으로써 조선미전에 주도되던 일제시대 우리 화단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며 “이는 민족의식의 발로였으며 미국 유학 화가로서의 자존심을 반영하는 행동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장발 선생은 기독교미술뿐만 아니라 추상미술에도 관심을 보여 6·25전쟁 이후 수많은 추상회화를 남겼다”며 “서양 모더니즘 운동을 피상적으로 습득하고 외형만 배워왔다는 평가를 받으며 큰 주목은 받지 못했다”고 했다. 그 원인에 대해서는 “장발 선생의 정서가 치열함과 높은 감수성을 요구하는 추상미술을 받아들이기에는 쉽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했다.

 장발이 작가와 미술교육·행정가로서의 평가가 엇갈리는 부분에 대해서는 “당시로서는 초유의 구미 유학생이라는 신분에도 불구하고 단지 화가라는 (당시로서는) 보잘 것 없는 사회적 지위를 가질 수밖에 없는 점이 장발을 갈등케 만들었을 것”이라며 “그가 귀국 이후 점차적으로 미국유학생이라는 카리스마를 가지고 작가보다는 교직이나 미술행정, 단체결성, 고위공무원 등 다양한 직업을 찾아 나선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교수는 “해방 이후 미국에 의해 주도된 국내의 여러 사회적 여건과 맞물려 그의 선구자 신화는 확대재생산되고 이는 한국미술계에 커다란 영향으로 작용했다”며 “여러 연구자들의 평가에도 불구하고 장발 선생이 근·현대 미술계에 많은 업적을 남긴 것은 분명하다”고 말했다.

 

이진호·provin@kyeongin.com  / 2005. 10.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