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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3 - 인천 인물

[인천인물 100인] 32. 서양화가 장발 - 근현대 미술 '격동의 중심'

by 아름다운비행 2005. 10. 25.

 

 지난 2001년 4월8일 인천 출신의 장발(張勃) 화백이 미국 피츠버그 자택에서 100세의 나이로 타계한 직후 미술계와 학계에서는 그에 대한 연구작업이 활발히 이루어졌다.

 지금도 학자와 비평가 사이에서는 연구자의 처지와 관점에 따라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장발 화백이 민족사적 수난시대를 겪어오면서도 한국 화단과 미술교육계에 엄청난 영향력을 미쳤다는 점과 미술협회 분할과 '국전(國展)'파동을 주도함으로써 한국 미술계의 건전한 발전에 제약을 가하는데 일조했다는 대조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
 근·현대 미술계에서 독보적인 존재였던 장발 화백에 대한 평가는 작가로서, 미술교육·행정가로서의 평가가 엇갈리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장발은 우현 고유섭보다도 5년이나 앞서 한국의 화가 중 최초로 미국에 유학해 콜롬비아대학교 사범대학 연구(미술이론)과정을 수료한 뒤 귀국해 서울대 미술대학 초대 학장을 역임하면서 미대 학제를 만들고, 교수진을 구성했다. 그런가 하면 종교미술(가톨릭)의 효시를 이루고, 대한미협에서 한국미협을 분리시켜 리더로 활동하는 등 해방 이후 한국 미술계에 가장 많은 영향을 미쳤다. 민족수난 시대와 해방 이후 격동기를 보내는 동안 그가 학계와 미술단체에서 보였던 행동은 지금도 학자와 비평가 사이에 논란 거리로 남아 있다.

 

▲ '성인 김대건 안드리아'. 캔버스에 유채, 서울 절두산 순교 기념관 소장

 

 장발은 1901년 인천에서 태어났다. 가톨릭 집안인 장기반의 3남4녀 중 둘째 아들인 장발은 형 장면(張勉)박사와 막내인 장극(張剋)박사와 함께 모두 자신의 분야에서 최고를 이룬 인물이다.

 큰형인 장면박사는 60년 민주당 정부의 초대 내각수반을 역임했고, 막내인 장극박사는 항공공학의 세계적인 석학으로 '유동의박리'를 저술하기도 했다. 이런 집안 내력 탓에 장면은 해방 이후 화가로서 교육가로서 국내에서 쉽게 입지를 굳힐 수 있었다고 한다.
 장발은 휘문고등학교 재학시절부터 그림에 두각을 나타냈다. 당시 매일신문은 서울의 고등학교 연합학생미술전을 열었음을 보도하면서 장발의 재능을 남달랐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가톨릭 신자인 그는 그림을 그리는 처음부터 성화(聖畵)에 뜻을 두었다. 휘문고등학교 졸업 이후 장발은 1920년 일본으로 유학해 동경미술학교에서 미술을 전공한다. 이 곳에서 서양화의 기초적 실기를 익히고 중도(1922년)에 미국 뉴욕으로 가서 콜럼비아대학에서 미학·미술사학을 공부한다.

 그의 미술적 이론의 근거는 동경미술학교 시절에 근간을 이룬다. 당시 독일 뮌헨의 기독교 미술협회 회원으로 가입해 매월 발행하는 기관지인 '기독교 미술'을 정기 구독해 엄격한 보이론(Beuron)풍의 성화기법에 관심을 갖는다. 콜롬비아대학에서 미학·미술사를 공부한 것도 당시로서는 매우 이례적이고 독보적인 일이다. 비록 2년 과정의 비정규코스였지만 이는 인천 출신의 고유섭보다도 5년 빠른 '근대 미술이론 연구자'라는 연대기적 의미를 갖고 있다.

 그는 귀국 후 인천에서 머물면서 주로 가톨릭 성화를 그리는데 주력한다. 이 때 그린 그림이 '성인 김대건', '성녀 김골놈비와 아그네스 자매' 등이다.

 

▲ '성녀 김골놈바와 아그네스 자매'. 캔버스에 유채, 서울 절두산 순교 기념관 소장.


 그러나 모교인 휘문고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장발은 작가로서보다는 미술교육자로서, 순수화가로서보다는 성화가로서 활동을 벌인다. 하지만 그의 작품활동은 많지 않았다. 당시 비평가들은 장발의 작품을 대해볼 기회가 없다고 지적하면서도 예술을 종교적 경지로 끌어올린 것에 대해서는 높이 평가했다. 이를 보면 장발은 작품을 발표하지 않았음에도 당시에 이미 한국을 대표하는 성화가로서 확고한 입지를 굳혔음을 엿볼 수 있다.

 1945년 해방은 장발이 화가에서 미술교육가로 변신하는 계기가 된다. 장발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는 것도 이 시점을 기준하고 있다.


 장발은 서울대학교 예술대학 미술학부의 창립멤버로 참가하면서 이어 미술대학 학장에 임명된다. 이 때부터 그는 자신의 역할을 작가로서보다는 교육자, 미술행정가, 이론가에 치중하게 되며, 실기지도보다는 이론 강의에 전념했다.

 학장 재임기간 중 대한미술협회에서 한국미술작가협회를 분리시켜 리더로 활동하게 되는데 여기에서 그의 보수적이고 독선적인 평가가 지적되고 있다. 당시 작가로 활동하려면 '국전(國展)'에서 입상해야 하는데 그의 고교 스승인 윤호중(당시 홍대 미술학부장)이 이끄는 대한미술협회가 이를 주도함으로써 홍익대 출신들과의 대립각을 세웠던 것이다. 이 대립은 오늘날까지도 거론되는 '서울대파'와 '홍대파'라는 파벌의식을 낳는 계기가 됐다고 한다. 1956년 대한미협의 국전 보이콧 사건이 터지면서 미술계는 이전투구의 장으로 변질됐다. 이후 박정희가 정권을 잡으면서 두동강이가 난 미술계는 다시 하나로 합쳐지게 된다.

 1960년 4·19 학생의거로 친형인 장면 민주당 정권이 등장한 직후에는 이탈리아 전권대사로 임명돼 외교관으로 전직할뻔 했으나 이듬해인 1961년 5·16군사혁명으로 부임도 못한 채 해임되고 만다. 그로 인해 장발은 1962년 미국으로 출국해 세인트 빈센트대학 명예교수로서 미술사 강의 등을 하며 지내다 다시 붓을 잡아 추상화와 성화작업에 몰두하면서 미국에서 여생을 보냈다.


 장발은 1996년 서울대학교 개교 50주년 행사 때 '자랑스런 서울대인'으로 선정됐으며, 서울대는 교내에 그의 동상을 세웠다.

 

이진호·provin@kyeongin.com / 2005-10-20

출처 : www.kyeongin.com/main/view.php?key=2410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