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익, 월북에 묶여진 순수함
60여년만에 '어린이품으로'
<사진설명> 138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자 소개란에 실린 작가 사진(1월 7일자)
뛰어난 아동작가로 평가받고 있음에도 우리는 그를 냉전 이데올로기로 지난 70여년을 묻어 왔다. 작품의 모티브를 제공했던 인천도 숨가쁘게 달려온 지난 세월동안 작가 현덕을 외면했다. 좌익과 월북 작가라는 미명하에 그의 작품을 장농 한 편에 숨겨왔던 것이다.
그러나 최근 그의 동화가 세상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면서 현덕이라는 작가의 종적이 탐구되고 있다. 아무도 돌보지 않은 그의 인생 역정을 연구한 결과물이 최근 학계의 관심을 불러 모으고 있다. 또 '너하고 안놀아' 등 동화는 어린이들의 필독서로 큰 인기를 끌고 있고 연극 작품으로 재구성되기도 했다.
우리나라 최초로 현대적인 아동 캐릭터 '노마'를 만든 작가
'고양이' 속 주인공 노마를 통해 아동심리 섬세하게 그려
우리 동화에 '노마'라는 캐릭터를 처음으로 내놓은 현덕의 업적은 입이 닳도록 칭찬해도 아깝지 않다. 지난 1988년 정부가 월북 문인들에 대한 해금조치를 하기 이전까지 우리 사회는 현덕과 그의 작품을 금기의 영역에 가둬 놓았다.
그러나 지난 1990년대부터 카프 이후의 작가들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졌고 현덕의 아동문학 작품들이 새로 발굴 소개되면서 그에 대한 연구가 꾸준히 쌓여가고 있는 추세다.
부평여자공업고등학교 원종찬 선생은 지난 10여년동안 현덕 복원 작업에 매달린 끝에 인하대학교 국문학과 박사 논문을 제출했다. 그는 현덕이 그동안 남한에서 주목받지 못한 이유를 몇가지로 분석한다. 오랫동안 '레드 콤플렉스'의 덫이 그의 작품을 우리 사회에서 용인하지 않았고 그 영향으로 연구가 전혀 이뤄지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원인. 또 남한에는 그의 연고자들이 거의 없어 지금까지 생애조차 복원되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아동문학에 대한 관심과 이해가 부족했고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으로 대표되는 우리 문단의 대립도 현덕을 지워버리는데 큰 역할을 했다.
최근 현덕에 대한 기념비를 인천에 만들자는 움직임이 일부 작가들에 의해 거론됐으나 좌익과 월북이라는 그의 행적이 가로막고 있다. 그러나 지역 문학계는 냉전 이데올로기가 무너진 21세기에 그의 전력보다는 작품에 대한 올바른 평가가 이뤄져야 한다는 주장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서울 출생이지만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인천에서 성장한 탓인지 그의 작품 배경은 인천이 주류를 이룬다. 때문에 현덕이 인천에서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지역 문인들의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현덕의 본명은 현경윤이다. 현덕이라는 이름은 그가 문학작품을 쓰는 과정에서 쓰던 필명으로 추정된다. 그는 지난 1909년 2월15일 서울에서 아버지 현동철과 어머니 전주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 현흥택은 민영익 수하의 무관으로 주요 관직을 두루 거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친러시아파에 속했던 그는 대한제국이 일제에 의해 멸망한후 기록이 보이질 않는 점으로 보아 정치적으로 소외된 것으로 가늠할 수 있다. 현덕이 태어난 삼청동 별장은 조부 현흥택의 사교장소다. 때문에 현덕의 가계는 당시 상당한 재력을 축적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업을 하다 가산을 모두 탕진한 그의 부친 때문에 현덕은 어렸을적 생활이 고달팠다. 위세가 당당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그는 늘 자신을 밑바닥 인생으로 여기며 살았다고 한다. 그만큼 그는 아버지에 대한 콤플렉스가 컸고 그의 문학작품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모친이 어렵게 생계를 이으면서 그는 어린시절 대부도와 인천 등의 친척집을 떠돌아야 했다. 대부도 당숙 집에서 보통학교를 다니고 서울 집으로 옮겨 제일고보를 다니면서도 그는 한동안 인천을 오갔다고 한다. 인천 부두를 배경으로 쓴 그의 대표작 '남생이'와 안산 일대가 보이는 대부도 근방의 농촌을 배경으로 한 '경칩'은 당숙의 집에서 살았던 체험과 관련이 있다.
제일고보를 중퇴한 그가 힘겨운 청년기를 보내면서 위안이 됐던 것은 바로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이었다. 또 학교를 중도 포기하고 막노동을 하면서 떠돌던 때 김유정을 만나 문단에 발을 들이게 된 것이다. 그는 지난 1927년 한 신문사 주최의 독자공모에 '달에서 떨어진 토끼'로 일등 당선한다. 현덕이 세상에 본격적으로 알려진 것은 193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남생이'가 일등 당선하면서부터다. 이후 1940년까지 그는 열정적인 작품 활동을 벌이며 뛰어난 단편소설과 동화 등을 세상에 내놓는다. 해방 이후 그는 조선문학가동맹에 뛰어들어 진보적인 문학운동에 적극 가담하게 된다. 그러나 이승만 정부의 대대적인 좌익 색출을 견디다 못한 그는 지하로 숨어들어 문학운동을 벌인다. 6·25전쟁이 발발한 이후 월북하게 되고 숙청당한 지난 1962년까지 북한에서 작품 활동을 계속하다 사라진다. 지금도 현덕의 생사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현덕은 식민지와 분단으로 말미암은 파행의 근대성을 극복하지 못한 결과로 여전히 낯설다. 아직도 굳건한 이념의 틀이 현덕을 옥죄고 있는게 현실이다. 그러나 이제는 근대 문학의 양대틀인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합류 지점을 만들어낸 현덕에 대한 재평가가 시급한 시점이다. 사회의 통합과 건강한 문학의 토대를 만들기 위해서.
이희동·dhlee@kyeongin.com / 경인일보 2005-08-25
* 사진출처: 사단법인 어린이도서연구회, '작가들의 방'
(http://www.childbook.org/writer/03.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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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덕 [玄德] 1912 서울∼?
소설가·아동문학가.
서울에서 태어나 소년시절을 대부도(大阜島)에서 보내고, 중동학교를 거쳐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지금의 경기고등학교)에 입학했으나 중퇴했다. 화성군 발안(發安) 근방의 매립공사장에서 인부생활을 하다가 일본으로 건너가 교토[京都]와 오사카[大阪]에서 노동생활을 했다.
1938년 <조선일보> 현상공모에 단편 <남생이>가 당선되어 등단했였다. 해방 전까지 발표된 주요 작품으로는 <경칩>(1938), <총>(1938), <두꺼비가 먹는 돈>(1938), <골목>(1939), <잣을 까는 집>(1939), <녹성좌 綠星座>(1939), <군맹 群盲>(1940) 등이 있다. 아동문학에도 특별한 관심을 가져 <소년>지에 여러 편의 아동문학을 발표하기도 했다. <하늘 맑건만>(1938), <권구시합 拳球試合>(1938), <고구마>(1938), <군밤장수>(1938), <강아지>(1939), <삼형제 토끼>(1939), <두포전>(1930), <집을 나간 소년>(1939), <잃었던 우정>(1939) 등을 발표했으며, 해방 후에 이를 모아 동화집 <집을 나간 소년>(1946), <구슬과 포도>(1946), <토끼 삼형제>(1947)를 펴냈다. 해방 이후 서울에서 조선문학가동맹 출판부장직을 맡아 활동하였으며, 이 시기 소설집 <남생이>(1947)를 펴내고 월북했다. 월북한 이후에도 단편 <부싱쿠 동무>(1959), <싸우는 부두>(1961) 등을 발표했다.
스스로 도스토예프스키의 영향을 받았다고 말한 바 있는데(조광, 1939. 3), 그의 작품은 궁핍한 현실에서 생활하는 소작농들간의 미묘한 갈등과 그 근원을, 그리고 도시빈민의 애환을 잘 짜여진 구조와 서정적 문체로 섬세하게 그려냈다. 이근영·김유정·현경준 등 1930년대 후반의 여타 등단 작가들과 마찬가지로, 앞선 시기에 빚어지던 문학 이념의 극렬한 대립에 대해 비판적 안목으로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도, 당대 현실에 밀착하여 생활의 문제를 창작의 소재로 심도 있게 다룬 작가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참고문헌
- 수확의 날(1959), <실천문학> : 현덕, 실천문학사, 1998. 겨울호
- 한국근대민족문학사 : 김재용·이상경·오성호·하정일 공저, 한길사, 1993
- 북한문학사전 : 이명재 편, 국학자료원, 1995
* 출처 :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http://preview.britannica.co.kr/spotlights/nkorea/person/b25h0897n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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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10여년간 '현덕 복원작업' 펼친 원종찬씨
“현덕의 동화 속에서 나오는 노마는 한국문학이 창조한 가장 매력적이고 잊을 수 없는 캐릭터의 하나로 오랫동안 기억될 것입니다.”
현덕 연구에 지난 10여년을 보냈던 부평여자공업고등학교 원종찬(47) 교사는 이렇게 평가한다. 현덕의 뛰어난 동화를 추켜 세우는데 주저하지 않는 원 교사의 연구 결과가 세상에 나오면서 활발한 재평가 작업이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현덕을 연구하게된 계기는.
“현덕을 처음 알게된 것은 인천지역과 관련된 문학을 공부하고자 전교조 인천지부에서 마련한 인하대 최원식 교수의 강연에서죠. 당시 뛰어난 작가를 세상이 외면해 왔다는 사실을 접하고 충격과 동시에 부끄러움을 느꼈어요. 작가의 순결함이 그대로 묻어 나오는 현덕의 소설을 접하고 저도 한동안 접어뒀던 문학의 꿈을 다시 지폈습니다.”
-현덕을 연구한 과정은.
“정말 지난 10여년동안 그의 종적을 쫓아다니는데 어려웠습니다. 특히 그의 연고가 남한에 전무하다시피해 각종 자료를 확인하는데 어려움이 이만저만 아니었어요. 심지어 현덕이라는 인물의 종적을 찾다보니 본명이 다르다는 사실을 알고 허탈하기까지 했지요.
그러나 연구를 위한 자료와 씨름하다보니 그의 주옥같은 동화 작품들을 발견하게되는 뜻밖의 수확을 거두었어요.”
-현덕에 대한 평가는.
“그의 동화집이 새로 출간된 이후에는 아동문학쪽에서 현덕의 위치는 확고합니다. '노마'라는 캐릭터가 현재를 사는 아이들에게 순수함과 꿈을 불어 넣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려운 이웃들의 삶에 천착했던 그의 작품 활동은 이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진정한 가치가 무엇인지를 되묻고 있어요.”
이희동·dhlee@kyeongin.com / 경인일보 2005-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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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레아동문학연구회' 동화·동시 발굴 보급 및 연구활동 매진
원종찬 박사, 10년 동안 한국아동문학 연구 전념 외길
유뉴스 기자
unews@unews.co.kr
2005년 2월 17일 11:28
"10년간 함께 뛰어준 회원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졸업이 더없이 기쁩니다"
전국 4년제 대학교에 '아동문학'만을 공부하는 학부가 개설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10년을 하루 같이 한국아동문학 연구에 전념하여 박사학위를 받는 사람이 있어 화제다. 그 주인공은 24일 인하대(총장 홍승용)를 졸업하는 원종찬씨.
석사과정을 마치고 고교 교사로 활동하던 그가 아동문학에 전념하게 된 계기 또한 남다르다.
"1994년으로 기억돼요. 인하대 대학원에서 공부하는 일본인 학생(나까무라)이 한국 아동문학의 창시자이기도 한 방정환과 이원수를 연구했습니다. 우리는 거의 관심 밖인 아동문학을 일본 학우가 연구한다는 것이 한편으로 부끄러웠고 한편으론 자극이 되었습니다"
그 뒤로 원종찬씨는 일반문학이 아닌 아동문학 연구로 박사과정을 시작했다. 주위에서는 일반문학 연구에 매진해주기를 바라는 시선도 많았지만 그의 의지를 바꿀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불모지나 다름없는 한국 아동문학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당시 문학전공자가 '아동문학'을 한다는 것은 약간 무시되는 경향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동과 아동문학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하는 동료들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함께 대학원에 진학하여 연구도 하고 '겨레아동문학연구회'를 만들어 아동문학 관련 자료를 검토하면서 우리나라 아동문학도 세계 어느 나라에 뒤지지 않는, 바로 우리만의 토양에서 꽃필 수 있는 훌륭한 작품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아동문학의 학문적인 연구뿐만 아니라 어린이들이 읽어야 할 동화와 동시를 발굴 보급하기 위하여 겨레아동문학연구회를 만든 원 박사는 회원들과 함께 일제시대까지의 각종 자료를 검토하여 10권의『겨레아동문학선집』(보리)을 발간하기도 했다. 이 선집을 통해 우리가 알지 못했던 수많은 아동문학가와 작품을 발굴하는 성과도 거두었다.(수록 작품의 반수 이상이 발굴 작품)
아동과 아동문학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면서 연구자들 사이에서 인하대는 '아동문학의 메카'로 불린다. 현재 대학원에서 아동문학을 전공하는 학생은 10명(석사5, 박사6)이 넘는다. 또한 매학기 연구자가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모두가 '겨레아동문학연구회'의 핵심멤버로 활약하고 있다.
연구회의 창설자이자 리더인 원종찬 박사가 학위를 받는 논문은 '현덕 연구'.
현덕은 한국동란 때 월북해서 우리의 기억에서 사라진 작가이지만, 193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남생이>로 등단, 어린 '노마'의 시점을 빌린 독특한 소설로 주목받은 작가이다. 현덕은 또한 노마, 영이, 기동이, 똘똘이를 등장시켜 유년기 아동의 놀이세계를 담아낸 주옥같은 동화를 30여편 썼다. 작가는 잊혔어도 그가 창조한 주인공 '노마'는 동화를 읽은 이라면 결코 잊을 수 없는 캐릭터다. 원씨의 박사학위논문은 바로 노마의 작가 현덕을 되살려낸 논문이다.
이러한 연구와 자료발굴에 따른 성과로 그는 이원수와 이오덕을 잇는 아동문학 비평계의 독보적인 존재가 되었다. 그는 지금까지 2권의 평론집(『아동문학과 비평정신』『동화와 어린이』 창비사)과 2권의 월북 작가 시인의 아동문학 작품집(현덕 동화집 <너하고 안놀아>, 윤복진 동시집 <꽃초롱 별초롱>)을 엮어내었다. 또한, 범람하는 아동도서를 선별, 어린이들뿐만 아니라 학부모에게도 유익한 정보를 제공하기 위하여 중앙일보에 ‘원종찬의 아동문학 길라잡이’ 꼭지를 한동안 연재했고 한겨레신문사에 운영하는 한겨레문화센터의 ‘아동문학작가학교’에서 10년간 강의를 해오는 등 아동문학의 연구와 보급에 힘쓰고 있다.
한편, 원씨의 이러한 활동은 아동문학 연구자뿐 아니라 점점 관심의 폭이 넓어지고 있는 아동문학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는 또한 아동문학 비평을 전문으로 하는 잡지(『창비어린이』창작과비평사) 창간에도 일조하게 되어 현재 편집위원으로 활약하고 있기도 하다.
원 박사는 앞으로 "민족분단으로 인해 소홀히 다뤄진 월북 및 실종 아동문인을 포괄하는 한국근대아동문학사를 쓰는 일에 몰두"하여 또 하나의 이정표를 남기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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