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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3 - 인천 인물

[인물 26] 조봉암 탄신 100주년 기념 학술 대토론회

by 아름다운비행 2005. 9.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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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지난 1999년 여름(23)호 계간 『황해문화』에 발표되었던 것입니다.)

 

심포지엄 지상중계/  좌파와 우파를 넘어선 길
- 죽산 조봉암 탄생 100주년 기념 학술토론회

- 바람구두

 

  난 3월 25일 국회 의원회관 대회의실에서 '죽산(竹山) 조봉암(曺奉岩)선생 명예회복 범민족 추진 주비위원회(이하 주비위원회)'가 주최하는 <죽산 조봉암 선생 탄신 100주년 기념 학술 대토론회>, '죽산 조봉암 선생의 평화통일론과 개혁론의 재조명'이라는 주제 하의 심포지엄이 개최되었다. 죽산 조봉암에 대한 논의 자체가 금기시되어 오던 현실에서 그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열린 이번 행사는 죽산에 대한 최초의 공개 행사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국민의 정부라는 현정부의 대북 햇볕정책 혹은 대북포용정책이라는 시대적 흐름과 함께 동서간 냉전이 공식적으로 종결된지 10여년만에 남북으로 분단된 한반도 내에서 금기시되어 오던 한 인물의 역사적 재평가 내지는 학문적 복원이라는 측면에서도 그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지난 1959년 7월 31일 자신의 환갑을 불과 두 달 남짓 남겨놓은 상태에서 제1공화국에서 함께 토지개혁을 추진했던 이승만 대통령의 손에 의해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야 했던 조봉암의 사망 주기 역시 올해로 40주기를 맞이하고 있다. 그의 묘지는 서울의 동쪽 끝 망우리 공동묘지에 있는데 현재까지도 그의 묘비에는 '죽산조봉암선생지묘(竹山曺奉岩先生之墓)'란 비문만 새겨 있을 뿐 그의 행장(行狀)이나 사망일, 탄생일 조차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의 묘지에서 바라보면 언덕 아래로 한강이 굽이쳐 그의 고향인 강화와 황해에 이른다.  그러나 조봉암의 묘지가 이곳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한민족의 반쪽이자 냉전의 다른 한 축을 이루고 있는 북한의 평양직할시 신미리에 있는 '애국열사릉'에는 시신없는 그의 묘가 하나 더 있다. 애국열사릉이란 북한이 일제 시대의 독립운동가와 해방 후 북한에서 활동하던 중요인물 250명의 묘와 묘비를 만들어놓은 곳이다. 그곳엔 조봉암 이외에도 우사(尤史) 김규식(金奎植), 조소앙(趙素昻), 벽초(碧初) 홍명희(洪命喜), 백남운(白南雲) 등이 함께 자리를 하고 있다. 이런 사실은 고르디오스의 매듭 같은 우리 역사 속에서 그가 어떤 위치를 점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게 하는 사실이다.

 

  지금까지 우리의 역사가 남과 북으로 갈려 진행되어 온 것은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식민지하의 근대사와 해방정국의 현대사를 바라보는 시각까지도 냉전 이데올로기에 의해 재단되어왔다. 편협한 방식으로 기술되거나 아예 그 대상조차 될 수 없었던 현실에 비추어 보아 조봉암에 대한 재평가 작업은 그 자체가 냉전이데올로기의 마지막 전장(戰場)으로 남아있는 우리 한반도에 해빙의 단초를 제공할 것이다.

 

 

조봉암을 기억하는 사람들

 

  포지엄은 크게 3부로 나뉘어 진행되었다. 1부는 죽산에 대한 추모시 낭송 등 그를 기리는 자리였고, 2부는 강만길, 김학준, 조영건 교수의 논문 발표, 3부는 이에 대한 토론으로 이어졌다. 

 

  이 심포지엄의 주최측으로 인사말을 한 주비위원회 신창균 대표는 항일독립의 혁명투사이자 건국의 공로자였던 죽산을 기리고 그를 희생시켜야 했던 민족적 과오를 반성하자는 것으로 말문을 열었다. 학술 토론회를 5년 전부터 준비하고 있었으나 시기의 성숙을 기다려야했다는 경과보고를 통해 조봉암이란 한 인물이 역사적으로 복원되기에 앞으로도 얼마나 더 먼길을 가야할지 느껴졌다. 뒤이어 이강훈 전()광복회 회장, 백범의 수행비서로 평양에 다녀왔고 죽산과 진보당 활동을 했던 심창균, 제2건국위 상임의장인 변형윤 교수 등의 축사와 기념사가 이어졌다. 백발이 성성한 이들의 기념사와 축사를 들으며 느낀 소회(所懷)는 '일모도원(日暮途遠)'이란 말이었다. 그동안 가슴에 담아두었으나 하지 못했던 말들이 그들의 벅찬 음성을 통해 전달되는 순간 장내는 숙연해졌다.

 

  죽산은 생전에 1남3녀를 두었는데 그의 첫 부인 김이옥은 죽산이 상해에 있는 동안 함께 지냈고 첫 아이를 상해에서 얻어 상해의 고명(古名)인 호( )를 따 이름을 호정이라 지었다. 그 후 김이옥은 죽산이 신의주 감옥에 있을 때 병사했다. 행사는 유가족들을 소개하고 본격적인 심포지엄 행사로 진행되었다.

 

 

현대사 속에서의 조봉암 재조명

 

  포지엄 사회를 맡은 최상용(崔相龍: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개회에 앞서 이번 학술토론회를 조봉암에 대해 공개적인 행사로는 최초로 행해지는 대단히 역사적인 자리라고 자평했다. 1부 행사가 추모 분위기의 다소 들뜬 분위기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강만길(姜萬吉: 고려대 명예교수) 교수는 "먼저 이런 토론회는 기념사업회 보다는 학자들의 모임인 학회가 주최를 해야 더욱 객관적인 것이 될 터인데 우리 나라의 많은 학회가 아직도 이런 학술회의를 할만한 의식이 미치지 못하는 것 같아 유감" 이라며 말문을 열어 분위기를 가라앉혔다.

 

  강 교수는 해방 후 민족사회가 분단됨으로서 남쪽에서는 좌익노선이 북쪽에서는 우익노선이 그 역사적 위치를 인정받지 못하게 되었으며 그런 경향은 6.25 전쟁 후 더욱 심화되어 갔으나 최근의 추세는 "민족해방운동사에서 좌우익 통일전선 노선이 새롭게 발굴되고 주목되어 그 역사적 중요성이 인정되어 가고 있는 중" 이라고 역사학의 새로운 경향을 전했다.

 

 

일제 강점시대의 활동에 대한 재조명

 

  봉암은 우리 나라 초기 사회주의 운동에 참가한 사람 중에서 해외활동, 그 중 특히 코민테른에서의 활동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는 1922년 베르흐네우진스크 대회에 참가했으며 그때 모스크바에서 시작된 '카우트브(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들어가 공부하기도 했다.

 

  강 교수는 일제 강점시대 사회주의 운동이 민족 부르주아지와의 통일전선운동을 전개한 것은 코민테른의 노선에 의한 것이기도 했지만 현실적으로 불가피한 일이었다고 지적하며 그 이유로 첫째 유럽사회주의 운동에서와 같은 사회민주주의 세력이 제대로 성장하지 못한 조건에서의 통일전선은 비타협적 민족 부르주아지와의 협동전선이 될 수밖에 없었으며, 자본주의적 발달이 늦은, 따라서 노동자 . 농민의 양적 . 질적 . 계급적 성장이 늦은 일제 강제 지배 아래서의 조선의 경우, 지식인 중심의 사회주의자와 민족 부르주아지와의 통일전선이 지향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임시정부가 침체되고 민족세력의 우파가 타협주의 노선으로 돌아선 1920년대 후반기부터 중국 관내지역을 시작으로 좌우합작의 유일당 운동이 전개되어 만주지역에서는 참의부 등 3부 통일운동이 전개되었고, 국내에서는 신간회 운동으로 나타났다. 강 교수는 1920년대 후반기 조봉암이 상해에 있는 코민테른 극동부 조선대표로 있었다면 조선공산주의 운동의 최좌익에 있었다고 할 수 있는데 그런 그가 이 시기에 민족유일당운동에 적극 참가하고 있는 것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가 생긴다고 자문했다.

 

  자신이 제기한 의문에 답하기 위해 강 교수는 첫째 1920년대 코민테른 노선이 아시아지역 식민지 내지 반식민지 사례의 경우 중국 국공합작노선에서 보는 것과 같이 사회주의 세력만의 민족해방운동이 아닌 민족부르주아지와의 통일전선을 지향했고, 조봉암의 경우 이 같은 코민테른 노선에 충실한 것으로 볼 수도 있으며, 둘째 정태영이 지적한 것과 같이 "조봉암은 코민테른 노선에 충실했지만 1928년 조선공산당 해체를 전후해서 여운형과 같은 민족노선의 경향"을 띠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강만길 교수의 지적 중 두 번째 이유가 좀더 타당성 있게 느껴지는 것은 중국의 경우 국공합작 노선은 코민테른의 지시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사실상 중국공산당의 독자노선에 가깝고 코민테른의 경우엔 오히려 장개석의 국민당 정부를 지지하거나 이삼립(李三立)주의를 지지하는 등의 판단착오를 빈번하게 일으키는 상황에 있었기 때문에 코민테른이 당시 일제 강점하의 조선에 대해 바른 정세판단을 할 수 있었는가 하는 의문이 남는다. 이런 이유들이 죽산이 후에 공산당을 이탈하는 계기가 되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강 교수는 민족유일당 운동이 사실상 와해된 후 조봉암이 상해의 프랑스 조계에서 1932년 9월 체포되어 신의주 지방법원에서 7년 선고를 받고 복역하게 되어 민족해방운동전선에서의 활동은 일단 마감하게 된다. 하지만 그의 이때 체험은 후일 해방 정국에서 미 . 소에 의해 남북이 분단되고 좌 . 우익으로 분열되어 우익은 극우화되고 좌익은 극좌화되는 상황에서 중도 내지 제3전선을 형성하여 통일민족국가 수립노선으로 나아가게 되는 기반이 되었다고 해석했다.

 

 

공산당에서 이탈하는 과정에 대한 재조명

 

  산이 공산당에서 이탈하는 과정에 대해서 강만길 교수는 조봉암의 글을 인용하여 "우리 한국 청년의 대부분이 3 . 1운동 이후로 많이는 사회주의자가 되고 혹은 공산당을 조직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대부분은 한국독립을 위한 사회주의고 한국 독립을 위한 공산주의자였습니다. 한국 민족을 버리고 한국 독립을 불고하고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를 생각한 일은 없습니다"라고 서두를 열었다.

 

  해방 직후 조봉암의 정치적 견해를 알 수 있는 최초의 자료로는 「존경하는 박헌영동무에게」가 있는데 해방 전 이미 중국에서 좌우익 통일전선운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한 바있는 죽산이 해방 직후 공산당 활동보다는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건준)와 좌익중심의 통일전선체인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 활동에 보다 적극적이었다. 1945년 1월에 일본헌병사령부에 검거되었던 조봉암은 8.15해방까지 감옥에 있었다. 위의 글에서 조봉암은 박헌영에게 통일전선체인 민주주의민족전선에 공산당원이 다수를 차지하여 헤게모니를 장악하려는 박헌영의 시도를 비판하여 -"민주주의민족전선은 잘된 줄 아오 마는 역시 통일전선으로서는 너무 우리 당원이 과대히 침투했기 때문에 비당원 군중의 능동적 활동을 스스로 제약시키고 있다고 보오. ...... '지방에서는 당원이 절대다수를 차지하여야 된다' 등의 지령은 과오로 생각되오"-결국 1946년 6월 출당 처분을 받게 된다. 그는 출당 처분을 받기 전까지 공산당 인천지구당 위원장과 민주주의민족전선 인천지구 의장을 지냈다.

 

  이후 1946년 6월 11일 인천의 미군방첩부대에 연행되었다가 풀려난 다음날인 23일 인천에서 여운형, 이강국, 김원봉, 성주식 등이 참가한 '미소공위 촉진 시민대회'가 열렸고 죽산은 이 대회에 참가했다. 여기에서 조봉암은 "우리는 노동계급의 독재나 자본가 계급의 전제를 반대한다" 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그는 이 일을 계기로 공산당과는 완전히 결별하게 되는데 이후 여운형 등이 선언한 조선인민공화국과 민주주의민족전선은 조선공산당이 독점하게 되고 통일전선체적 성격을 잃게 된다.

 

  강 교수는 "남북에 분단국가가 성립되고 그것이 원인이 되어 민족상잔의 전쟁을 겪은  지 반세기가 된 지금에 와서야 '해방공간'에서의 통일민족국가를 수립하려는 노선이 옳았는가 아니면 단독정부를 수립하는 노선이 옳았는가 하는 문제를 조금더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한다. 결국 38선이 확정되고 미 . 소 양군이 분할점령 한 현실적 조건 아래서 남북을 통한 통일민족국가를 건설할 수 있는 길은 대외적으로는 친미반소노선도 아니며 반대로 친소반미노선도 아닌 국가가 될 수밖에 없으며 대내적으로도 순수 자본주의체제도 아니고 순수 사회주주의 체제도 아닌 국가를 건설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강만길 교수는 조봉암의 공산당 이탈에 대한 요인은 해방 이전부터 싹터왔다고 할 수 있으며 또 공산당 내부의 역학 관계가 작용했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통일민족국가 수립을 위한 현실적 방안과 관련되어 있다고 말한다. 즉 미 . 소 양국이 분할 점령한 상태에서 좌익 세력이 극좌화하고, 우익 세력이 극우화하는 대립 상황에서 어느 한 쪽 일방의 주도에 의한 통일국가 건설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밑받침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부분은 실제로 조봉암이 쓴 「평화통일에의 길」을 보면 잘 나타나 있다. 6.25전쟁 후 불과 3년만에 진보당을 창당하면서 '평화통일론'을 다시 공론화하여 그것이 정착되는 단초를 열었던 것이 결국엔 그의 목숨을 앗아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단선 . 단정 참가 과정에 대한 재조명과 조봉암에 대한 평가

 

   교수는 공산당을 떠나서 통일민족국가 수립운동을 펴던 조봉암이 남한 단독정권에 참여한 일에 대해 후대의 해석이 두 갈래로 나왔는데, "그 중 하나는 정태영의 것으로 김규식을 중심으로 한 남북협상파들이 남한 단독선거에 참여했더라면 이 선거에서 승리하여 과반수 의석을 차지할 수도 있었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이승만 독재정권의 출현을 방지하는 동시에 보수적 반동이 아닌 혁신정권을 수립할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보수와 혁신의 연립정권이 설 수 있는 상황이었다면 좌우합작운동이 왜 실패했겠는가 하는 의문이 남는다고 지적하고 있다. 다른 하나는 박태균의 것으로 "조봉암은 단정 수립에 참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으며 결과적으로 이후 그의 정치활동에 오점으로 활동을 제약했다는 주장"에 대해 강 교수는 미군정에 뒤이어 친일 경찰과 관료층 등을 기반으로 한 이승만 정권은 정통성 문제에 큰 취약성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런 점에서 민족해방운동전선에 참가했던 조봉암이 이승만 단독정권에 참여함으로서 그 정권의 명분을 높여주는 역할을 했다고 해석했다. 결국 공산당을 이탈한 조봉암으로서는 북쪽 정권에 참여할 수 없었으며, 남쪽에서 한독당의 김구나 민족자주연맹의 김규식 등과 행동을 같이 할 상황이 못 되었던 터라 정치 생활을 포기하지 않는 이상 김약수 등 일부 온건좌파세력과 함께 결국 단선단정에 참여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강만길 교수는 우리 현대사에서 조봉암의 업적은 그의 대통령 선거 출마와 진보당 결성을 통해 뚜렷한 것이 되었고, 남북분단과 6.25전쟁을 통해 흩어졌던 중도파 세력 및 온건좌파 세력을 규합하여 사회민주주의 노선 세력으로 발전시킨 일이며 동란 이후 이적론(利敵論)으로 간주되었던 평화통일론을 다시 공론화했다는 데 있다며 말을 마쳤다.

 

 

죽산 평화통일론의 재조명

 

  학준(인천대 총장, 정치학) 교수는 '진보당 평화통일노선의 재평가'와 '조봉암의 정치이념의 형성과정 및 내용과 관련하여'란 소주제를 가지고 발제하였다. 그는 먼저 죽산에 대한 기존의 연구들에 대해서 "1959년에 '북한간첩'으로 처형된 그와 1958년에 불법화된 진보당은 지난 날 냉전체제적 제약 아래서 자연히 객관적 연구 대상으로 금기시됐기에 오직 그와 진보당에 대해 비판적인 책만이 출판될 수 있었거나 외국에서의 학위논문"에서만 다뤄질 수 있었다고 전제하고, 최근 해빙 무드를 타고 진행되어 온 그에 대한 연구를 정리했다.

 

 

일제 치하에서의 독립운동 또는 공산주의 운동

 

   교수는 죽산의 이념형성과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전기(轉機)로 그가 스무살 무렵이던 1919년에 일어난 3 . 1 만세운동을 주목하고, 죽산이 강화에서 3 . 1운동에 참여했다가 서대문형무소에 1년 동안 투옥된 시기가 그를 항일민족운동의 투사로 변모시켰다고 말한다. 그 후 그는 YMCA 중학부에 입학했다가 YMCA를 중심으로 항일운동을 일으키려 했다는 혐의로 곧바로 일경에 체포되어 2차 투옥 된다.

 

  1921년 조봉암은 "호랑이 굴에 들어가는 심경으로" 동경으로 건너갔다. 김학준 교수는 죽산의 동경 생활은 그의 이념 형성에 김찬(金燦)을 비롯한 항일 투사들을 만나게 되어 그들과 함께 사회주의 서클을 조직하게 된 것과 광범위한 독서 가운데 사회주의를 받아들이게 된 것이 이후 그의 행적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고 보았다. 죽산은 아나키즘에 경도되어 흑도회(黑濤會)를 조직하는 일에 참여했으나 아나키즘은 현존 체제의 파괴만을 염두에 두는데 반해 볼셰비즘은 현존 체제의 파괴 이후 사회주의의 건설을 지향한다는데 착안하여 볼셰비즘에 기울게 된다.

 

  김 교수는 죽산이 볼셰비즘을 받아들이게 된 것은 1917년 러시아 혁명을 성공시킨 혁명가들이 볼셰비키였다는 사실과 그들이 모든 종류의 제국주의를 반대하여 조선 혁명가들을 지원한다는 사실이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았다. 죽산은 '사회주의 혁명가이며 독립을 위한 실제적인 일꾼'을 자처하며 국내는 물론 소련과 중국에서 활동하던 조선인 공산주의자들과 긴밀히 연락하는 가운데 항일독립운동에 깊이 간여하게 되었다. 이 시기의 국내 사회주의 운동 또는 공산주의 운동은 여러 갈래로 펼쳐지고 있었는데 코민테른은 1국 1당의 원칙을 앞세워 이들의 통합을 유도했다. 부하린(Bukharin)등이 중재하려 했으나 각 파벌은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위해 치열한 암투를 벌였을 뿐 실질적인 통합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조봉암은 1923년 9월말 서울에 도착하여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라는 합법적 지위를 확보한 뒤 김찬 및 김재봉(金在鳳) 등과 손을 잡고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서 동문수학한 박헌영을 휘하에 두고 기존의 사회주의 계열 서클들 및 단체들을 통합시키는 작업에 몰입하게 된다. 김 교수는 이 시기 조봉암의 조직 통합작업 중에 적지 않은 적을 만들게 되고 이는 이후 그가 활동하는데 장애가 된다고 보았다. 조봉암의 국내외적 위상에 대해서 김 교수는 1925년에 창당된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동맹의 두 조직 모두에서 중앙위원으로 선출된 사람은 조봉암과 김찬 두 사람뿐이었다는 점, 죽산이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동맹의 코민테른 승인을 위해 모스크바를 방문할 무렵 코민테른 극동국 중국위원이 중국공산당 초대당수인 진독수(陣獨秀)였고, 극동국 일본위원이 일본공산당 창당원이었고 이론지도자인 사노마나부(佐野學)이였음을 고려할 때 조선 공산주의 운동계에서 그가 얼마나 큰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고 평가한다.

 

  김 교수는 조봉암의 자전을 인용하여 그가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를 받아들이고 있는 동안에도 '조선의 독립을 위한 사회주의'였고, '조선의 독립을 위한 공산주의'였다고 회고하면서 "내 나라 내 겨레는 잊어버린 채 소련의 이익을 위해 일하는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는 생각해 본 일이 없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조봉암의 사상적 전환이 이루어진 시기와 이유에 대해 죽산이 신의주에서 7년간 투옥된 시기였다는 주장(曹敏;민족통일연구원 연구위원)은 이런 주장을 뒷받침해줄 만한 자료는 아직 발견되고 있지 않지만 죽산이 코민테른 노선과 볼세비즘 노선에 대해 회의를 점점 더 많이 품게 되었으리라는 짐작은 충분히 가능하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해방공간에서의 정치활동

 

   교수는 전후의 냉전질서가 만들어낸 한반도의 분할점령은 조봉암의 정치노선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하며 다음과 같이 그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해방과 동시에 남한 정계에 가장 먼저 등장한 지도자는 죽산과 상해에서 함께 일하는 등 친분이 있었던 여운형이었다. 여운형은 조선총독부로부터 권력을 일부 이양받아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을 조직하고 전국 각처에 인민위원회 또는 치안유지회를 발족시켰다. 그러나 박헌영을 중심으로 재건된  조선공산당은 건준에 침투하여 이 기구를 조선인민공화국(인공)으로 변모시킨다. 그러나 조봉암은 이런 인공에 참가하지 않고 인천으로 내려와 인천치안유지회를 조직하여 인천의 산업시설을 보호하고 치안유지에만 힘썼다. 김 교수는 이런 사실들이 "조봉암이 여운형의 노선에는 찬동했으나 공산주의운동과는 이미 일정한 선을 긋고 있었다"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렇게 행동한 이유에 대해 죽산은 1941년 출옥이후 해방되기 까지 4년간 공산주의 혁명가로서 아무런 활동도 하지 못했던데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조봉암이 1945년 1월에 일본헌병사령부에 재검거되어 8.15해방 때까지 감옥에 있었던 점으로 미루어 일본의 패전을 예상하여 모종의 행동을 준비하고 있었거나 또다른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는 추측도 가능할 것 같다.

 

  김 교수는 조봉암이 그가 조선공산당과 결별하게 된 이유를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일으켜서 대중적 동원운동을 하는 중에 소련 정부의 지시라 해서 신탁통치 반대대회를 열어놓고 신탁통치 찬성결의를 하게 한 것 같은 일은 전혀 한국 사람의 상식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어리석은 짓일 뿐 아니라 민족을 배반하는 폭거"였다고 말한 조봉암의 회고를 빌어 이런 시점(1946년 3월 무렵)에 「존경하는 박헌영 동무에게」라는 사신을 쓰게 되었다고 보았다.

 

  이 사신은 뒷날 미군 방첩대(CIC)에 빼앗기게 됐고 일부 신문에 의해 1946년 5월 7일 게재된다. 이 사신에서 조봉암은 "나 자신이 좋은 볼셰비키가 되는 유일한 방법으로" 이 편지를 쓰게 됐다고 밝히고 있다. 실제로 그는 이 사신이 공개된 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자신은 조선공산당원이므로 당이 어떤 제재를 가한다고 할지라도 받아들이겠다고 말하고 있다. 조봉암은 그 후 40여일 이 지난 1946년 6월 23일에 각 신문에 「공산당과 그 지도 아래 있는 모든 정치활동을 부인하는 성명서」를 발표함으로 해서 공산주의와는 완전한 결별을 선언한다.

 

  그러나 김 교수는 이 시기의 조봉암이 공산주의와 완전한 결별을 선언한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해서 그가 흔히 공산당에서 이탈한 다른 이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전향한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위의 성명서를 자세히 살펴보면 죽산의 사상적 입장을 이해할 수 있는데 그가 공산주의를 부인하기는 했으나 '민주의원의 독점 정부'에 대해서도 반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대소 의존 일변도의 노선을 배격했지만 연합국이라는 테두리 내에서 소련을 의식하고 건국을 위해 소련과 협력해야 할 것은 협력해야 한다는 믿음을 표시했고, 그 스스로는 이런 모습을 '사상적 성숙' 또는 '이념적 발전'이라고 표현하고 '전향'으로 말해지는 것을 싫어했다고 한다. 조봉암이 공산주의를 버린 후 참여한 정치운동은 좌우합작운동에서 시작해 민전으로 이어졌고 민족자주연맹으로 귀결됐다. 이 세 운동은 모두 하나의 동일한 궤 위에 있는데 그것은 극좌도 아니고 극우도 아닌 중간노선이었다. '제3의 길'이라고 할 수 있는 중간노선을 바탕으로 그는 '비미비소(非美非蘇)의 민족자주노선'을 걷는 정당을 창당하려 했다는 것이다.

 

 

대한민국 제1공화정 아래서의 정치활동

 

  1948년 5월 31일 제헌국회가 열리고, 조봉암은 6월 1일 한국민주당을 중심으로 우익에 비판적이거나 반대하는 무소속 의원들을 중심으로 결성한 6 . 1구락부와 비슷한 성향의 무소속 의원들의 결집체인 민우(民友)구락부를 통합시켜 무소속구락부를 발족한다. 당시 무소속 구락부에 속한 의원은 72명으로 이것은 제헌의회 의원 207명 가운데 35%에 해당하는 규모였다.

 

  김 교수는 조봉암이 당시 원내 세력을 정치적 성향에 따라 세 그룹으로 나눴는데 미 . 소 양군 철수와 남북협상에 의한 남북통일 이전에 정부를 세우는 데 반대하는 제1그룹, 미국과 국제연합 및 이해 당사국들의 입장을 고려하면서 신중히 정부를 세워야 한다는 제2그룹, 내전이 일어나건 말건 즉각 정부를 세워야 한다는 제3그룹이 그것이었다. 조봉암은 제1그룹은 극소수이고 한민당 계열이 제3그룹, 자신이 속한 무소속구락부는 제2그룹에 속한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무소속구락부는 그가 해방 이후부터 계속 추진해온 중간정당의 출범 기반이 될만했으나 정부 출범 이후 정파사이의 이해관계가 엇갈리면서 무소속 구락부는 해체되고 만다.

 

  김 교수는 정부수립 전후의 정치 정세를 조봉암의 말을 빌어 위와 같이 설명하면서 제1공화정 당시의 통일관은 통일이라는 목적을 절대시하고 당위시하는 주장에서 출발하고 있기 때문에 그 성격이 어떤 타협과 절충을 거부하는 것이었으며 그 윤리성과 도덕성을 강조하는 이상주의적인 것이었다고 보고 있다. 김 교수는 당시의 이런 통일지상론의 의식 바탕에는 첫째, 남북한의 상호보완성. 남한은 농경지대이고 북한은 공업지대이므로 남북한이 통일함으로써 상호보완성을 높일 수 있다. 둘째, 북한 주민을 해방시켜야 한다는 자유십자군적 인식. 북한은 악마가 지배하는 곳인 만큼 굶주림과 학정에 시달리는 북한 동포들을 하루빨리 해방시켜야 한다는 의식이다. 셋째, 월남민(越南民)들의 애향심이 그 밑바탕에 깔려있는데 이런 통일론은 북한부인론(北韓否認論)과 같은 맥락이었다고 설명한다.

 

  당시의 국민 의식은 북한 정권이 소련의 위성국가이며 괴뢰도당이므로 북한의 정치적 실체는 전혀 인정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80년대 초까지 이런 식의 사고는 사라지지 않고 반복되어 왔던 것이 사실이다.

 

  진보당은 창당선언문에서 "민주적 국토통일을 평화적으로 실현할 것"을 다짐한 데 이어 강령을 통해 "우리는 안으로 민주세력의 대동단결을 추진하고 밖으로 민주우방과 긴밀히 제휴하여 민주세력이 결정적 승리를 얻을 수 있는 평화적 방식에 의한 조국 통일의 실현을 기한다"고 선언했고, 정책을 통해서는 "대한민국 주권 하에 유엔을 통한 민주적이고 평화적인 조국통일을 추구한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김학준 교수는 당시는 불온하게 여겨졌던 진보당의 이런 평화통일론이 국민들에게 어떻게 수용되었는지를 말해주는 경험적 자료들은 거의 발견하기 힘들지만 1956년 5월 15일에 실시된 제3대 정.부통령 선거에서 평화통일론을 비롯한 혁신적 정책들을 표방하고 출마한 진보당 창당준비위원장 조봉암이 무려 2백16만 3천8백8표를 얻음으로써 유효 투표의 22.5%를 차지했다는 것은 평화통일론이 국민들 사이에 어느 정도 호의적으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한 징표로 풀이될 수 있다고 해석했다.

 

  김 교수는 진보당이 표방한 평화통일론은 당시 대한민국 정부의 공식적인 통일론인 무력통일론과는 정면으로 대치될 수밖에 없었으며 그 근저에는 북한을 대하는 인식의 태도 차이가 깔려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1948년 8월 15일 국제연합의 뒷받침 아래 탄생한 대한민국은 자신이 한반도에서 유일한 합법 국가이며 북한의 김일성 정권은 반()국가단체라는 법적 입장을 지니고 있었다. 이런 입장의 대한민국에서 남 . 북한의 통일이란 결국 반국가 단체가 불법적으로 점령하고 있는 북한 지역을 해방하여 대한민국의 주권이 실질적으로 미치게 하는 것을 의미"했다. 이에 반해 진보당의 평화통일론은 "때마침 강대국들의 평화적 공존 분위기와 함께 남 . 북 관계의 평화적 공존의 길을 찾으려는 모색" 속에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1958년 당시 검찰이 조봉암을 기소할 때 "우선 북한 괴뢰 집단이 서기 1954년 4월 24일 소련의 지령에 의하여 남 . 북한의 통일방안을 제시한 것을 보면 ...."으로 시작하는 공소장을 살펴보면 진보당과 죽산의 이런 평화통일론을 문제의 핵심으로 제기하고 있다. 법원은 정부당국의 이런 주장을 면밀히 검토하고 위헌성 여부를 살폈으나 이 부분에 대해서는 무죄 판결을 내렸다.

 

  김 교수는 조봉암의 평화통일 노선은 민족독립운동가로서의 그의 이념과 투쟁 경력의 산물이라고 한다. "진보당의 평화통일 노선은 민족자결주의에 입각해 평화적이면서 민주적으로 통일을 성취해야 한다는 국민적 여망을 담은 선각자적 노선으로 냉전적 대결구도의 시대를 앞선 것이었다"고 평가하며 이는 뒷날 역대정권이 모두 그의 평화통일 노선을 뒤따른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게오르그 짐멜의 표현을 빌려 조봉암을 "세계 역사상 공통적으로 나타난 선두주자에게 가해지는 매"를 맞은 사례라고 말하며 그는 결코 '이념의 인간'이 아니었으며 '행동의 인간'이었다고 결론 내렸다.

 

 

죽산 사상과 개혁론 재조명

 

  영건(曺永建. 경남대) 교수는 죽산의 생애와 그의 사상 형성에 관한 발제에서 20세기를 '극단의 시대'라 했던 에릭 흡스봄(Eric Hobsbawm)의 말로 극우와 극좌 양쪽을 다 배제하고 중도의 길을 걸으려 했던 조봉암이 살아야 했던 시대를 상징적으로 표현했다.

 

죽산이 스스로의 일생에 대해서 간단하게나마 자전해놓은 것으로는 「내가 걸어온 길」(1957년 『희망』 2,3,5,월호)과 「나의 정치백서 - 투표에 이기고 개표에 지고」(『신태양』 1957년 5월호 별책)이 있다. 조 교수 역시 이 두 자료를 중심으로 논의를 진행했다.

 

 

인간 죽산과 그의 사상

 

  1899년 9월 25일 지금의 인천광역시 강화군에서 태어난 죽산의 6-7살 무렵은 일본이 대한제국을 강점해오는 시기였다. 1904년엔 러 . 일 전쟁이 일어났고 그 이듬해인 1905년엔 제2차 한일협약 일명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었다. 강화공립보통학교와 농업보습학교를 졸업한 죽산은 강화군청 고용원으로 면서기, 대서보조원 등으로 일하다가 1919년 3 . 1 만세운동을 맞이하게 된다.

 

  조 교수는 이 시기의 죽산에게 고향과 지역공동체는 그의 인간적 성장과 사상적 태동을 위한 넉넉한 보금자리였으며 죽산이 열살 무렵에 감리교인으로 세례를 받았다고 한다. 그런 까닭이었는지 1959년 7월 31일, 그 전날의 재심기각이 있고서 하루만에 전격적인 사형집행 직전 조봉암은 목사에게 예수가 빌라도의 법정에 섰을 때의 성경구절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했느냐, 나는 그의 죽을 죄를 찾지 못하였나니 내려서 놓아라 한데 ... 저희가 큰 소리로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 박기를 구하니 저희의 소리가 이긴지라"를 읽어달라고 했다고 한다.

 

  죽산에게 사형선고가 내리자 그는 "법이 그런 모양이니 별수가 있느냐. 길가던 사람도 차에 치어 죽고 침실에서 자는 듯이 죽는 사람도 있는데 60이 넘은 나를 처형해야만 되겠다니 이제 별수가 있겠느냐, 판결은 잘됐다. 무죄가 안될 바에야 차라리 죽는 것이 났다. 정치란 다 그런 것이다. 나는 만사람이 살자는 이념이었고 이 박사는 한 사람이 잘 살자는 이념이었다. 이념이 다른 사람이 서로 대립할 때에는 한쪽이 없어져야만 승리가 있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중간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이 편안하게 되는 것이다. 정치를 하자면 그만한 각오는 해야한다."라는 말로써 그가 이미 오래전부터 죽음을 초월한 생사관을 가지고 있었으며 죽음을 예비하고 있었다고 설명한다.

 

  조 교수는 죽산 사상의 제1기는 죽산사상의 맹아기로 당시 시대상황의 요구에 부응하는 안티 테제로서의 사회주의 사상, 민족해방투쟁의 가장 적의한 수단으로서 혁명적 실천론이었다면 제2기는 죽산 사상의 성숙과 심화기로, 제3기인 죽산 사상의 완성기는 건국과정과 분단 지양의 통일과정 그리고 수구와 시폐(時弊)를 혁파하는 시기로 구분지을 수 있다고 말한다.

 

  조봉암에 대한 앞서 강만길 교수와 김학준 교수의 발제와는 달리 인간 조봉암에 대한 논의가 주조를 이루는 관계로 조영건 교수의 발제는 다소 격한 감이 있었다. 조봉암이 3 . 1 만세운동을 겪으며 사상적 전기를 마련하고 동경 유학을 떠나 그곳에서 사회주의를 접하게 되긴 했으나 그 무렵의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그러했듯이 조봉암 역시 사회주의 그 자체를 위한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라기 보다는 독립운동을 위한 이론적 토대로서 사회주의를 받아들였다는 것이 조 교수의 주장이었다. 조 교수는 "이데올로기는 종속변수일 수밖에 없고 당시 동아시아의 사회경제적 발전 단계와 변혁론은 공산주의의 기계론적 투입으로 도출되는 것은 아니었다"고 말하고 그런 점에서 조봉암이 공산주의와 결별하게 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고 보았다.

 

  조 교수는 죽산 개혁론의 실체를 실학에서 찾고 죽산 개혁론의 요체는 실사구시(實事求是) 이용후생(利用厚生) 경세치용(經世致用)이며 이런 그의 개혁론은 사상의 진화와 객관적 시대상황의 변천에 따라 그 내용이 채워지며 연속적으로 발전하여 1950년대 의회활동과 대선과정에서 표출되었다고 말한다. 끝으로 조영건 교수는 오늘날 죽산이 남겨준 유산은 미완의 혁명이라고 일컬어지는 4월 혁명의 테제 자주, 민주, 통일의 종국적 완성의 대도(大道)를 그어주는 것이고, 그것은 민주주의, 개혁, 사회진보의 대도를 그어주는 것이라고 보고, 그것은 통일과정과 통일 이후의 우리 민족사회의 현대적 모형을 제시해주는 것임으로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고 평가했다.

 

 

마치며

 

  만길 교수의 발제에 대한 토론자로 박태균(朴泰均, 서울대 강사)과 유재일(劉載一. 대전대) 교수, 김학준 교수의 토론자로 이문승(李文勝. 연합통신 전 논설위원 고문)과 조민(민족통일연구원 연구위원), 조영건 교수의 토론자로 유종완(柳鍾完. 전북대 명예교수, 한국사회경제학회 명예회장), 김진균(金晉均. 민족통일연구원 연구위원)이 나섰다. 발제가 끝나고 이에 대한 종합토론이 이루어졌으나 지면관계상 모두 수록하기 어려운 관계로 다음 기회를 기약해본다.

 

  이번의 심포지엄은 조봉암 사후 최초로 행해진 공개적 행사라는 측면에서 그 의의는 매우 크다고 할 수 있으나 몇 가지 점에서 안타까움을 남기고 있다. 우선 기존의 연구 성과들을 넘는 새로운 주장이 나오지 못했다는 것과 앞서 강만길 교수도 지적했듯이 학회에 의해 진행되지 못하여 객관적인 연구성과를 토론하는 분위기보다는 추모 분위기에 휩쓸린 느낌이 그것이다. 조봉암이 제1공화정에 참여하여 초대 농림부장관으로 재직하며 기초를 다진 주요 성과인 토지개혁은 6.25 전쟁 중 농민의 좌경화를 막은 중요한 사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토론이 부족했던 점과 조봉암의 죽음과 관련된 미국의 역할에 대한 논의 부족도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었다.

 

  이제는 돈만 있다면 금강산의 비경을 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10년 전만 하더라도 꿈도 꿀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현재의 남북한 분위기로는 통일도 그다지 멀지 않은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이번 심포지엄을 보면서 느낀 것은 통일에 대한 준비는 단순히 정치적인 것만 아니라 학문적 영역, 역사적 영역 등에서도 이루어져야 하며 통일이란 것의 사전적 의미가 "나누어진 것들을 몰아 하나의 완전한 것으로 만듦"이란 뜻이 맞다면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통일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둘로 나뉜 민족의 운명이 하나의 역사 안에 채워지기에는 아직도 비어있는 공간이 너무나 많은 것이다.

 

  "우리가 독립운동을 할 때 돈이 준비되어서 한 것도 아니고 가능성이 있어서 한 것도 아니다. 옳은 일이기에 또 아니하고서는 안 될 일이기에 목숨을 걸고 싸웠지 아니하냐." 망우리 공동묘지의 조봉암 묘역임을 표시하는 비석에 새겨진 그의 말이다. 우리는 목숨을 걸고 대의를 위해 싸운 이들을 너무 쉽게 잊는 경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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