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인들을 피해 미대사관으로 가보려 했지만 문이 굳게 잠겨 있었다. 어쩔 수 없이 깔멜수도원으로 찾아가 친교가 있던 원장의 도움으로 숨을 수 있었다.”
9개월이라는 짧지만 소중한 민주주의 경험을 맛 봤던 제2공화국 총리 장면에게 '무능'과 '나약'이라는 평가가 따라붙게 된 결정적 사건이다. 이런 꼬리표는 어쩌면 1960년 4월 '피로 쟁취한 자유'를 제대로 지켜내지 못한 데 대한 우리의 원망과 질책을 그에게 돌려버린 탓일 것이다.
수녀원으로 몸을 피했던 운석은 정치정화법에 엮여 구속된 뒤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으나 곧 형집행 면제로 석방됐다. 그후 신앙생활에 전념하다 1966년 6월 4일 간암으로 서울 명륜동 자택에서 숨을 거뒀다. 그리 길지는 않았지만, 분명 굵었던 생애를 마감한 것이다.
운석연구회에서 운석 재조명 연구에 몰두하고 있는 경희대 허동현 교수는 “수도원으로 몸을 숨긴 운석이 그 곳에서 미국측에 쿠데타 세력의 진압을 요구했다는 사실이 최근 속속 드러나고 있다”며 운석을 '무능한 정치인'으로 만든 것은 군사쿠데타를 정당화하기 위한 왜곡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민주주의 실현' '언론 자유' '지방자치 실현' 등 숱한 성과에도 장면 정부에 대해선 늘 상반된 평가가 나온다.
신·구파간의 끊이지 않는 정쟁, 눈만 뜨면 벌어지는 데모, 주체할 수 없는 언론자유, 유약한 정부 등 '혼란·무능'으로 대표되는 이미지. 또 한국정치사에서 읍·면·이장까지 선거로 뽑는 어느때보다 민주주의가 꽃핀 시기였다는 게 또 하나다. '무능한 정치인'과 '민주주의를 중시한 지도자'란 엇갈린 평가를 받고 있는 이유다.
그렇다면 정체성이 흔들리는 오늘 우리사회의 모습을 반성하는데 장면 정부가 주는 의미는 어떤 것인가?
단순히 세월이 흘렀다고 해서 다시 조명하자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인천이 낳은 한 정치인의 뒤틀려진 평가를 밝혀내고 이제는 바로 잡아야 한다는, 역사적 의식의 발로라는 접근이 타당하다.
운석의 고향은 인천부 다소면 화촌동(현 인천시 동구 화수동→광복후 1946년 동명을 화수동으로 부르게 되었다).
외가가 있는 서울 적선동에서 태어났지만 곧바로 인천으로 옮겨와 청소년기를 보냈다. 그는 1906년 인천성당 부설 박문학교에 입학해 천자문, 동몽선습, 소학, 대학, 동감 등 한학과 신학문을 두루 배웠다.
박문학교 고등과와 서울대 농과대학의 전신인 수원고등농림학교를 졸업한 운석은 YMCA기독교 청년회관 영어학과에 진학, 3년간 수학했다. 이어 1920년 미국으로 건너가 맨해턴대학과 시튼 홀 대학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에 돌아온 그는 천주교 학교를 중심으로 서울 동성고등학교 교장(당시 동성상업학교) 등 20여년간 교육사업에 열정을 쏟았다.
운석의 후손인 춘천교구장 장익(71) 주교는 “아버님은 추운 겨울이면 학생들이 추위에 떨 것을 걱정해 등교 1시간 전에 교실을 돌며 장작불을 펴놓을 정도로 학생들을 끔찍이 사랑하셨다”며 “정치활동을 하면서도 마음은 언제나 젊은이들 곁에 계셨다”고 선친을 회고했다.
운석은 해방 이듬해인 1946년에는 미군정청 자문기관인 민주의원(民主議院)과 입법의원에 잇따라 뽑혀 정치인으로 새로운 삶의 길을 걷게 된다. 1948년 유엔총회에서 한국 정부의 국제 승인을 얻어냈고, 6·25 발발 후 미군과 유엔군을 파병토록 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이후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국무총리에 임명됐다.
이때부터 독재를 일삼던 이승만 대통령에 항거, 1956년 “못살겠다. 갈아보자”라는 구호를 내세워 부통령에 당선됐으나 민주당 정권은 4·19혁명으로 얻어 낸 자유를 지키지 못하고 5·16쿠데타 세력에 정권을 넘겨주고 말았다.
허동현 교수는 “민주주의 원칙을 중시한 장 총리가 4·19로 얻은 자유를 지키지 못한 게 제2공화국 총리로서 강력한 권력의 체취도, 카리스마도 느껴지지 않는 지도자로 평가받게 된 계기”라며 “하지만 당시 쿠데타를 막지 못한 것은 국민 모두의 책임”이라고 운석을 달리 평가한다. 고려대 조광 교수 역시 “운석은 탁월한 종교·교육 운동가인 동시에 특출한 외교관”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쿠데타를 일으키고 한국형 경제성장 신화를 이뤘던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도 장면 정부가 뿌리였다는 역사적 아이러니가 알려진 것은 얼마되지 않은 일이다.
운석 탄생 100주년 기념학술회에서 순천향대 김기승 교수는 “장면 정권이 추진했던 국토개발사업,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등은 박정희 정권에 계승되었다. 이는 당시 경제난 해결이란 시대적 과제를 위해 전력을 다한 장면 정권의 의지가 담긴 작품이었다”고 운석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이런 공과를 토대로 무능한 정부로 인식되어 온 제2공화국과 장면의 재평가 움직임이 활발하다. 1999년 9월부터 가톨릭계를 중심으로 창립된 '운석기념회'와 '운석연구회'가 다양한 연구활동과 기념사업에 나서고 있다.
운석의 정치적 역정은 좌절과 실패로 끝났으나 민주주의에 대한 그의 신념과 실천의지는 오늘 우리를 반성하고 되돌아보는 숙제로 남아 있다. 격동의 시대를 살면서 국가와 민족을 위해 힘을 쏟았던 장면의 인생역정은 곧 질곡의 한국현대사를 되새기게 하는 교본(敎本)이 아닐까.
[인터뷰] 운석연구회 허동현 교수
운석(雲石) 재조명 연구단체 운석연구회(회장·조광 고려대 교수)에서 활동 중인 경희대 교양학부 허동현 교수.
수원캠퍼스 연구실에서 만난 그는 “한국정부의 유엔 승인과 한국전쟁시 유엔군 참전을 이끌어낸 외교적 성과 그리고 민주당 창당 이후 야당 지도자로서 보여준 반독재 투쟁 등을 다시 평가해야 한다”는 말부터 꺼냈다.
“한국은 유럽국가에 무비자 입국이 가능한 몇 안되는 아시아국가로 시민들이 제 목소리를 내는 시민사회로 압축성장을 해왔어요.”
오늘 우리사회에서 깊숙이 자리매김한 언론의 자유, 지방자치 실현 등의 뿌리는 '자유와 민주주의 실현'을 중시한 제2공화국 시절로 봐야 한다는 설명이다.
경제정책 분야에 무능했다는 운석에 대한 부정적 평가에도 그는 제2공화국에서 추진한 국토개발사업과 경제개발5개년 계획을 박정희 정권이 이어받아 추진한 점을 들어 장 총리가 경제개발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그에 맞는 개발전략을 제시했다는 사실을 잘 알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동안 학계의 연구는 정치가 장면의 어떤 점이 5·16쿠데타를 촉발했는가라는 결과론적 시각으로 접근하려는 경향이 지배적이었어요. 하지만 운석은 다원화한 시민사회의 확립, 민간주도의 경제발전, 대화의 정신, 국제사회에서의 위상 제고 등 보편적인 방향과 원칙 아래서 실천에 앞장선 이상적, 선각적 정치가였습니다. 그런데도 무능한 정권이라는 평가가 나온 것은 군사정권이 그를 왜곡했기 때문일 겁니다.”
늦게나마 운석연구회를 중심으로 장면 박사의 재조명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는 것은 '장면 정권이 무능하고 부패해서 더 이상 나라를 맡길 수 없었다'는 5·16쿠데타 세력의 그늘에서 한국 현대사가 서서히 벗어나고 있다는 징후라고 강조했다.
“양심적인 교육자며 탁월한 외교관, 권모술수를 버리고 정도(正道)를 걷던 보기 드문 선각자입니다. 지금 우리 정치인에게서 이런 모습을 찾을 수 없어 아쉽습니다.” 운석 탄생 100주년을 맞아 1999년 발족한 운석연구회 활동에 정성을 쏟고 있는 허 교수는 감춰진 역사의 진실을 밝혀내는 연구에 푹 빠져 있었다.
이우성·wslee@kyeongin.com / 2004. 10. 7
* 옮기면서 시리즈 기획물 세번째인 장면선생에 관한 기사를 누락시켰기에 늦게나마 옮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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