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이 세상에서 제일 하고 싶었던 일은 교육학 박사학위를 받고 초등학교
교장을 하는 것이었던 때가 있었다. 결국 공대를 다녔고 지금은 전혀 먼 자리에 와있지만. ^^
그래서 모 교대를 지원했다가 수학 때문에
낙방. ^^
전과목을 봤는데, 내 계산으로 하면 과락 때문에. ㅋ~
1.
문과에서
공대로의 진학
그리곤 재수하면서 계속 문과 공부를 하다가
도저히 아니다 싶어 공대를 다니던 선배와 몇 차례 상담을 한 끝에 과감하게 이과로 돌린 것이 체력장 끝난 다음 날이니까, 9월말 경이다.
그때부터 수Ⅱ 보랴, 물리Ⅱ, 화학Ⅱ,
생물Ⅱ 보랴.. 좀 정신없이 지냈다.
그 때는
'Ⅰ'은 문과용, 'Ⅱ'는 이과용이었던 시절이다.
수학은
1학년 땐 공통수학, 2학년부터는 문과는 수Ⅰ,
이과는 수Ⅱ.
물리,
화학, 생물은 무조건 'Ⅰ'은 문과, 'Ⅱ'는
이과였다.
예비고사(지금의 수능 격이지요)는 그렇다 치고,
본고사까지는 불과 3개월여.
지나고 생각해 보면 다소 당돌한
선택이었다고도 생각되지만,
어려서부터의 꿈이 과학자가 되는 것이었고
중학교 시절 학생과학 이라는 잡지책을 창간호부터 그 당시 나온 최신간까지 다 보고나니
그 책에선 더 이상 볼 게 없어
고1
때부턴 전자과학이라는 잡지를 헌책방에서 사서
한 권을 다 읽고 나면 다른 헌책을 보곤
했던 경력이 있었던 나였기에
그런 다소 무리하다 싶은 선택을 할 수
있었다.
그 당시 그래도 마음 한켠엔 다소 미더운
것이 있었던 것이,
문과이면서도 난 1학년 때부터 참고서는 전부 이과용인 'Ⅱ'를 사서 봤었다.
'Ⅰ'에 해당하는 부분만 보면 되었으니까.
그 당시의 난, 수학을 너무 못해 월말고사.. 아마.. 6과목쯤 봤던 것으로 생각나는데,
그런데선 수학에서 평균 몇 점씩을 깍아먹는
실력이었으니까. ㅎㅎ~~
그랬다가 전과목을 보는 중간고사, 기말고사에서 겨우 만회를 하곤 하는
아주 기막힌 수학실력자(?)인 나였다. ^^
그랬던 내가 재수를 하고 입시원서 쓴다고
나타나선
"공대"를 간다니까
다들 한다는 말이,
"야,
너 진짜 공대갈 수 있어?" ^^
심지어는 선생님께서도
"정말 공대 갈거야?"
"너는 교대가면 딱 맞는데.." 이렇게 한 말씀들 하셨으니까. ㅎㅎ~~
어쨌든 이과로 바꾸고 3개월동안엔 죽어라고 이과 공부만 했는데,
문과로 다시 바꿀 수도 없거니와,
공대,
그중에서도 전자과가 내 선택이었다.
그리고 전기전자계열에 합격했다.
2.
전공의
선택
본고사 후 면접을 보는데,
난
1지망 전기전자, 2지망 기계, 3지망이
화공계열이었다.
당시 우리 학교의 커트라인 순은
기계-전기전자-화공 순이었다.
면접을 보는 교수님께선
"지망을 이렇게 쓰면 1지망에서 떨어지면 2지망은 당연히 안되는거고,
3지망엔 그 쪽을 1지망한 학생들이 있어 거기도 안될 수 있는데 잘못 선택한 거 아니냐?"
고 물어 보신 분도 있었다.
그래도 난 죽어도 전기전자 아니면 안되는데
모.
난 전자과를 가서, 장거리 통신(tele-communications)을 전공하고
싶었다.
진짜 하고 싶은 건 전자재료 쪽 - 나중에 '반도체'라고
불리던 쪽, 그 당시엔 '반도체'라는 말보다는 '전자재료'라는 말을 더 일상적으로 쓰던 시절이었다 - 을 하고 싶은데,
우리나라의 전자과 시절이나.. 그런 걸 생각할 때 전자과를 가면 안되고 물리를 해야 하는데,
내
머리에 무슨.. 물리 씩이나. ^^
그래서 차선책으로 택한 것이 장거리
통신이었다.
그중에서도 장거리 무선통신 쪽을 하고
싶었다.
대륙간,
그리고 더 나아가선 위성통신 쪽을.
꿈이야 야무졌지요 그 땐. ^^
그런데,
문제는 대학 입학 후였다.
난 진짜 재수할 때는진짜 열심히
했다.
학원 갈 여력은 안되었고, 나 혼자서 했기에 더 열심히 해야만 했고,
수학 때문에 또 떨어질 수는 없다고 이를
악물고 했고,
본고사
3개월 남기고 이과로 바꿨기 때문에 한 번 더 악물어야 했다.
그렇게 재수까지 하고 입학을 했는데,
이건 뭐 공부하는 분위기가 전혀
아닌거야, 세상에..
이런 데가 대학이라면 뭐하러 내가 그 고생을
하고 들어왔나 싶고..
거기에 더해
재수말기부터 몸이 않좋으시던
어머님께서 1학기말 고사 직전에 돌아가셔
한동안 난 정신적인 지주를 잃고 방황을
했다.
그러느라 가고 싶은 전자과는
멀어지고,
2순위이던 전기과는 가기 싫고
그래서 밀려서(?) '응용물리'라는 과를 가게 되었다.
그래서 그 때부턴 다시 전자재료 쪽을 파기
시작했다.
대학에 들어와서 비로소 '반도체'라는 말에 익숙해 질 수 있었고
밀려 온 과지만 난 만족했다.
성적은 마냥 별루였지만. ^^
그래서 난 그 어렵다는 '물리'를 하게 되었다.
지금이야 뭐 머리 속에 남은 거 하나도
없지만. ^^
3.
사족
대학 졸업 후, 내 전공을 살려 어디를 들어가긴 참 어려웠다.
물리를 했으면 적어도 석사 이상은 가져야
어디가서 물리했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그러다 첫 직장에서 하게 된 것이
유학대행업무.
난 준교육자라는 생각으로 열심히 오는
손님(학생)들을 대했고,
이과 쪽은 내가 상담을 했다.
그러다가 올림픽조직위로 공채시험을 거쳐
옮겼다가
올림픽 끝난 후 지금의 회사로 왔다.
전혀 알지도 못했던, 들어보지도 못했고 하는 일도 감이 안잡히는 그런 회사로.
그렇게 들어와 지금까지 있다.
여기선 사무직으로.
좀 복잡하다면 복잡하게 살아왔다.
마음 한켠엔 아직도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이 아스라히
남아있고.
대학시절 난 일부러 교직과목을 듣지
않았다.
준교사 자격증을 따게 되면 난 당연히
교직사회로 발을 디딜 것이 거의 확실했으니까.
그래서 그 길을 원천봉쇄(?)했다.
'난 교직으로 가지 않는다.'
'한 번 다른 길로 간다고 생각했으면 접어버린
것에는 미련을 두지 말자.'
그 이후 난 한 번도 그 길을 가지 않은
것에 대해 후회 내지는 미련을 둔 적은 없다.
그래도 나이가 들어가면서도 아직도 저 깊은
곳에 殘雪처럼 남은 한 가지.
교육자의 길.
그래서
DAUM에서 기획한 세계의 초등학생 씨리즈를 여기 옮겨 적어 놓는다.
가지 않은 길
프로스트( Robert Lee Frost, 1876-1963)
노란 숲 속에 길이 두 갈래 갈라져 있었습니다.
안타깝게도 나는 두 길을 갈 수
없는
한 사람의 나그네로 오랫 동안 서서
한 길이 덤불 속으로 꺾여 내려간 데까지
바라다 볼 수 있는 데까지 멀리 보았습니다.
그리고 똑같이 아름다운 다른 길을 택했습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풀이 더 우거지고 사람이 걸을 자취가 적었습니다.
하지만 그 길을 걸음으로 하여
그 길도 거의 같아질 것입니다만,
그 날 아침 두 길에는 낙엽을 밟은 자취 적어
아무에게도 더럽혀지지 않은 채 묻혀
있었습니다.
아, 나는 뒷날을 위해 한 길은 남겨 두었습니다.
길은 다른 길에 이어져 끝이 없었으므로
내가 다시 여기 돌아올
것을 의심하면서.
훗날에 훗날에 나는 어디에선가
한숨을 쉬며 이 이야기를 할 것입니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갈라져 있었다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고,
그것으로 해서 모든 것이 달라졌다라고.
The Road Not Taken
Two roads diverged in a yellow
wood,
And sorry I could not travel both
And be one traveler, long I stood
And looked down one as far as I could
To where it bent in the
undergrowth;
Then took the other, as just as fair
And having perhaps
the better claim,
Because it was grassy and wanted wear;
Though as for
that, the passing there
Had worn them really about the same,
And both
that morning equally lay
In leaves no step had trodden black
Oh, I kept
the first for another day!
Yet knowing how way leads on to way,
I doubted
if I should ever come back.
I shall be telling this with a
sigh
Somewhere ages and ages hence:
Two roads diverged in a wood, and I --
I took the one less traveled by,
And that has made all the
difference.
Robert Lee Frost
로버트 프로스트 기념관에 있는 詩를 새긴 기념판 사진
(Picture Of plaque at Robert Frost Memorial.)
위 좌측 사진은 로버트 프로스트와 그의 아들. 위 오른쪽은 40대 후반의 로버트 프로스트.
아래 중간은 캐빈디쉬 캠프에서의 로버트 프로스트.
photo by Karsh
(*cnfcj: http://www.poets.org/poet.php/prmPID/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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