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 출처 : 매일경제 https://m.mk.co.kr/news/culture/view/2020/02/118921/
한글은 세종대왕이 아들, 딸과 만들었다
입력 2020.02.05 15:01 | 수정 2020.02.05 16:18
[국보의 자취-26] 문화재 수장가 간송 전형필(1906~1962)은 수많은 자신의 수집품 중에서 훈민정음을 제일 아꼈다. 한국전쟁 피란길에도 행여나 흠집이 날까 품속에 품고 다녔으며 잘 때도 누가 훔쳐갈까 베개 속에 넣고 지켰다. 훈민정음은 광복 2년 전 서울의 기와집 10채 값인 1만원을 주고 구입했던 것이다.
1940년 어느 날, 안동 출신의 서예가 이용준(1916~?)은 스승이자 어문학자인 김태준(1905~1949)에게 놀라운 얘기를 전한다. "가문(안동시 와룡면 진성 이씨)의 선조가 여진 정벌에서 큰 공을 세웠습니다. 그 공로로 세종대왕에게 훈민정음을 하사받아 가보로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김태준과 이용준은 일제강점기 사회주의 지하조직이었던 경성콤그룹의 멤버였다. 북한 부총리를 지낸 박헌영,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 공산주의 운동가 이관술, 김삼룡이 주축이었던 단체였다.
김태준은 여기서 인민선전부를 맡았다. 이들은 활동자금이 필요했고 집안의 가보를 팔려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김태준은 훈민정음이 경성제대 도서관에 있던 세종실록에서 언급되는 그 해례본임을 확인했다. 이후 밝혀진 사실이지만 훈민정음은 진성 이씨가 소장하고 있던 것이 아니라 역시 와룡면에 소재한 광산 김씨 종택의 긍구당 소유였다. 이를 이 집안 종손의 사위였던 이용준이 빌려 갖고 있었다.
김태준은 평소 왕래가 잦았던 전형필과 접촉했다. 훈민정음의 존재를 알게 된 전형필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이관술을 필두로 이현상, 김삼룡, 김태준이 체포되면서 거래는 성사되지 못한다. 김태준이 병보석으로 석방된 1943년 전형필이 다시 그를 찾아온다. 김태준은 "소유주가 1000원을 달라고 한다"고 했고 전형필은 10배인 1만원을 건넸다. 고서가 서화나 도자기에 비해 헐값이어서 아무리 귀한 책이라도 100원 이상을 쳐주지 않았다.
전형필은 놀라는 김태준에게 "훈민정음 같은 보물은 적어도 이 정도 대접은 받아야 한다"고 말하면서 김태준에게도 사례비 1000원을 따로 얹어주었다.
국보 제70호 훈민정음 해례본. 간송미술관 소장. 1943년 인수 당시 앞쪽 2장이 찢겨 나가있는 상태여서 세종실록의 서문을 베껴 적어 복원했다. 세종대왕이 "나랏말씀이 중국과 달라…"로 시작하는 서문을 직접 썼다.
국보 제70호 훈민정음 해례본(간송미술관 소장)은 이렇게 세상에 나왔다. 한글은 대한민국 국민들이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문화유산이다. 전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이면서도 배우기 쉬운 문자로 칭송 받는다. 무엇보다 세계 문자 중 만든 사람과 반포일, 글자를 만든 원리까지 아는 유일한 문자이다. 2013년 새로 지어져 국보 자격 논란이 끊이지 않는 숭례문을 대신해 훈민정음을 국보 제1호로 지정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우리 국민들은 독보적인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1397~1450·재위 1418~1450)을 한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으로 추앙하고 있다.
훈민정음 해례본은 훈민정음의 한문 해설서이다. 한글을 만든 원리와 문자 사용에 대한 설명, 용례를 상세하게 밝히고 있다.
세로 23.3㎝, 가로 16.8㎝ 크기로, A4지 절반보다 조금 큰 크기이다. 3부 33장 1책의 목판본이며 1부는 훈민정음 본문, 2부는 해례, 3부는 정인지의 서문을 실었다. 그 끝에 '정통(正統) 11년(1446) 음력 9월 상한(上澣·상순)'이라고 적혀 있다. 1446년(세종 28)이 한글 반포의 해인 것이다. 한글날은 광복 후 해례본의 기록을 근거로 9월 상순의 마지막 날인 10일로 잡고 이를 양력으로 환산해 10월 9일로 정했다. 한글 반포는 1446년이지만 창제한 것은 이보다 3년 전인 1443년이다.
전형필이 인수했을 당시 앞의 2장은 찢겨 나가고 없었다. 훈민정음을 넘긴 이용준은 "언문책 소지자를 엄벌하던 연산군 때 부득이 첫머리 2장을 찢어버렸다는 가문의 전승이 있었다"는 말을 전했다. 다행히도 세종실록에 "나랏말씀이 중국과 달라…"로 시작하는 서문이 실려 있다. 세종대왕이 직접 썼다. 사라진 2장 자리에 실록의 내용을 베껴 넣어 복원했다.
일제강점기 승려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선 초 승려 신미가 한글 창제를 주도했다는 내용의 영화가 개봉된 바 있지만 실록은 세종대왕 혼자서 한글을 만들었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한글은 너무나도 체계적이고 독창적이어서 창제 주체와 유래를 놓고 의견이 엇갈린다.
일반적으로 집현전 학사들이 한글을 만든 것으로 알고 있지만 실록은 세종대왕의 작품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이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 28자를 지었다. 그 글자가 옛 전자(篆字·중국의 고대 서체)를 모방하고 초성, 중성, 종성으로 나누어 합한 연후에야 글자를 이루었다. 무릇 문자에 관한 것과 이어(俚語·표준어가 아닌 언어)에 관한 것을 모두 쓸 수 있고, 글자는 비록 간단하고 요약하지마는 전환하는 것이 무궁하니 이것을 훈민정음이라고 일렀다-1443년(세종 25) 12월 30일자 실록."
공부벌레였던 세종대왕은 학식이 웬만한 학자들보다 높았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혼자 힘으로 이런 위대한 업적을 남길 수 있었을까. 이 때문에 창제 과정에 다른 인물이 도움을 줬을 것이라는 추측이 끊이지 않는다. 대표적 사람이 조선 초 활동했던 승려 신미(1403~1480)이다.
영화에서도 다뤄졌던 소재이지만 일각에서는 신미에게 '도총섭 밀전정법 비지쌍운 우국이세 원융무애 혜각존자'라는 거창한 존호가 내려진 것으로 미뤄 훈민정음은 신미의 작품이라는 주장도 제시된다.
신미의 속명은 김수성으로, 세종 때 집현전 학사로 활동하고 세조 때 공조판서, 호조판서를 지낸 김수온(1410~1481)의 형이다. 영산 김씨 대동보에 "신미대사가 주지로 있던 복천암 사적기에 '세종은 복천암에 주석하던 신미대사로부터 한글 창제 중인 집현전 학자들에게 범어의 자음과 모음을 설명하게 했다'고 기술돼 있다"고 적혀 있다. 다른 곳에서는 그런 기록을 찾을 수 없다. 다만, 그가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 후 각종 불경 언해본을 발간하는 데는 적극 관여한 것으로는 짐작된다.
집현전 학사인 신숙주가 요동으로 유배 온 명나라 학자 황찬을 찾아가 훈민정음에 관한 비결을 전수 받았다는 견해도 거론된다. 그러나 이는 전혀 근거 없는 낭설이다. 1445년 1월 7일자 실록도 "집현전 부수찬 신숙주와 성균관 주부 성삼문을 요동에 보내 운서(韻書)를 질문하여 오게 하였다"고 했다.
그런데 그들이 요동에 가서 했던 일이 1487년(성종 18) 2월 2일자 실록에 잘 나와 있다. "세종조에 신숙주 등을 요동에 보내 황찬에게 음과 훈을 물어보게 하여 홍무정운(洪武正韻), 사성통고(四聲通考) 등의 책을 만들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에 힘입어 중국말을 대강 알게 되었다." 새로운 문자에 대해 물어본 게 아니라, 한자의 뜻과 음을 자문했다는 것이다. 더욱이 신숙주가 요동을 방문한 것은 한글이 탄생하고 2년 뒤인 1445년(세종 27)의 일이다.
최초의 한글 소설로 알려진 허균의 홍길동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세종대왕은 대신 아들과 딸의 도움을 받았다. 1444년(세종 26) 2월 20일자 실록에 의하면,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는 훈민정음 제작의 부당함을 알리면서 "공적 업무라면 세자가 세세한 일을 맡을 수 있지만 언문처럼 급하지도 않은 일에 시간을 허비하면서 걱정하느냐"고 따졌다. 세종은 "내가 나이 늙어서 세자에게 그 일을 맡겼노라"고 했다. 세종이 한글 제작의 상당 부분을 문종(1414~1452·재위 1450~1452)에게 일임했다는 말이다.
집현전을 책임졌던 최만리가 이처럼 세종을 공격한 것을 볼 때 과연 집현전 학사들이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했는지도 의심스럽다.
둘째 딸인 정의공주(1415~1477)도 아버지를 도왔다. 정의공주는 머리가 비상했다. 공주가 시집간 죽산 안씨 대동보는 "훈민정음을 창제할제 변음(變音)과 토착(吐着)을 다 연구하지 못하여 여러 대군에게 풀게 하였지만 답을 얻지 못하였다. 공주에게 내려 보내니 곧 풀어 바쳤다. 세종이 크게 칭찬하며 노비 수백 구를 하사하였다"고 서술돼 있다. 실록의 정의공주 졸기도 "성품이 총명하고 지혜로우며 역산(曆算)을 해득하여 세종이 사랑하였다"고 썼다.
기원을 놓고서도 발음기관을 본떴다는 발음기관 상형설, 창문 상형설, 고대 중국 문자설, 고대 한국 문자설, 고대 인도의 문자인 범자설, 몽골자설 등이 분분하다.
훈민정음 발굴에 결정적 역할을 한 김태준은 광복 후 남로당 핵심 간부로 활동하다가 1949년 7월 검거됐다. 그는 살고자 했다. 최후진술에서 "숱한 고전을 수집해 철저하게 고증하고 정리하고 싶다. 앞으로 용인된다면 학교로 돌아가 그런 일을 하면서 여생을 보내고 싶다"고 최후진술을 했지만 사형을 선고받아 총살됐다. 서예가 이용준은 남로당 활동을 하다가 월북했으며 아무런 족적을 남기지 못한 채 생을 마쳤다.
[배한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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