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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한국어

훈민정음 반포

by 아름다운비행 2019. 10. 10.

o 출처 : Encyclopedia,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63XX66000043



[한국사를 움직인 100대 사건]

훈민정음 반포

백성을 위한 문자를 만들다



시대1446년

훈민정음은 1446년 9월에 반포한 한국의 글자이자 해설서의 이름이다. 언어와 문자가 맞지 않아 불편함을 겪는 백성들을 위해 제정한 것으로, 자음은 발음기관의 모양을 본뜨고, 모음은 천·지·인을 바탕으로 창제하였다. 이로써 백성들에게 문자를 널리 알리고 국가 정책과 통치 이념을 전달하고자 하였다.


배경

1428년 조선 통신사가 일본 교토에 파견되다.
1433년 세종이 훈민정음의 원안을 완성하다.
1445년 권제, 정인지, 안지 등 집현전 학자들이 세종의 명을 받아 《용비어천가》를 짓다.


설명

“너희가 운서(韻書)를 아느냐.” 1444년 2월 세종은 훈민정음(訓民正音) 창제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린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崔萬理) 등을 불러 물었다. 세종은 “사성칠음(四聲七音)에 자모(字母)가 몇이나 되는지 말해 보라.” 하고 거듭 다그쳤다. 반대 상소를 올린 일곱 명의 집현전 학사들은 답하지 못했다. 1446년 훈민정음이 반포되기 2년 전의 일이다.


세종이 1443년 극비리에 훈민정음의 원안을 완성해, 최종 보완 과정을 거칠 무렵 집현전에서는 찬반양론이 극명하게 엇갈렸다. 정인지(鄭麟趾), 최항(崔恒), 박팽년(朴彭年), 성삼문(成三問), 신숙주(申叔舟) 등은 세종의 뜻에 따라 훈민정음을 해설하고, 이를 반포, 시행하는 작업을 적극 돕는다.


반면 최만리를 비롯해 직제학 신석조(辛碩祖), 직전 김문(金汶), 응교 정창손(鄭昌孫), 부교리 하위지(河緯地), 부수찬 송처검(宋處儉), 저작랑 조근(趙瑾)은 반대 상소에서 훈민정음 창제의 부당함을 강한 어조로 역설한다. 이들은 상소에서 음을 쓰고 글자를 합하는 것은 모두 옛 것에 위반되며, 언문을 따로 만든 것을 중국이 알게 돼 비난을 받으면 대국을 섬기고 중화(中華)를 사모하는 데 부끄러운 일이고, 이는 조선이 중국을 버리고 스스로 오랑캐와 같아지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또 신라 설총(薛聰)의 이두(吏讀)를 쓰고 있는데 굳이 상스럽고 무익한 글자를 따로 만들 이유가 없고, 언문으로써 형벌의 억울함을 줄이고 옥사(獄辭, 판결문)를 공평하게 한다는 세종의 논리는 옳지 않다고 반박했다. 이어서 할 수 없이 언문을 만든다면 이는 풍속을 바꾸는 큰 일로, 마땅히 재상과 의논하고 백성들에게 충분히 인식시킨 다음에 선포해야 한다며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 및 반포가 독단적인 처사라고 비판했다.


이에 세종은 운서(언어학 서적)와 사성칠음 등 언어학적 소양을 동원해 최만리 등의 기세를 꺾고 “내가 운서를 바로잡지 않으면 누가 이를 바로잡을 것이냐. 내 뜻을 알면서도 신하로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옳지 않다.” 하고 일축했다. 세종이 당시의 쟁쟁한 유학자들을 언어학 지식으로 제압한 것은 6년이 넘게 홀로 훈민정음을 만들면서 중국과 일본의 운서를 두루 섭렵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세종은 이들을 모두 하옥시킨 뒤 이튿날에 풀어줬다.


다만 김문은 한때 “언문 제작에 불가할 것은 없다.”라고 했다가 말을 바꾼 죄로 장 100대에 처해졌으나 이를 벌금으로 대신했고, 정창손은 파직된 뒤 다시 복직했다. 세종은 일전에 정창손에게 “언문으로 《삼강행실》을 번역하여 민간에 반포하면 어리석은 백성이 모두 쉽게 깨달아 충신, 효자, 열녀가 많이 나올 것”이라고 했으나, 이날 정창손이 오히려 “사람이 행하고 행하지 않는 것은 사람의 자질 여하에 있으며, 어찌 꼭 언문으로 《삼강행실》을 번역한 뒤에야 사람이 모두 본받을 것이냐.” 하고 따지자 화가 단단히 난 것이다.


최만리 등의 반대 상소에서 보듯 훈민정음의 창제는 당시 한문을 사용하던 양반과 유학자, 지배층의 강한 반발을 불러왔다. 세종이 훈민정음 창제를 혼자 은밀하게 추진하고 기습적으로 원안을 내놓았던 것도 이 같은 반발에 훈민정음을 만드는 일 자체가 난관에 부딪힐 것을 의식한 때문으로 보인다.


이처럼 세종이 훈민정음 창제와 반포를 과감하게 밀어붙인 것은 무엇보다 일반 백성을 위한 문자가 절실하다는 인식에 따른 것이었다. 언어와 문자의 불일치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백성들에게 익히기 쉬운 우리 문자를 사용하게 하고, 이를 통해 국가의 정책이나 통치 이념을 직접 전달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세종의 생각이었다.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의미를 가진 ‘훈민정음’에서도 이 같은 의지가 드러난다.


    우리나라 말이 중국과 달라 한자와는 서로 잘 통하지 아니한다. 이런 까닭으로 어리석은 백성이 말하고자 하는 바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이를 가엽게 여겨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드니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쉽게 익혀 날마다 쓰는 데 편하게 하고자

    한다.                

      – 세종, 《훈민정음》 〈어제서문(御製序文)〉


    사방 각국의 풍토가 다르고 성음 역시 다르기 마련이니 중국 문자를 빌려 사용하는 데 마치 둥근 구멍에 모난 자루를 끼워 맞추는 것과 같아

    서로 맞지 않으니 어찌 막힘이 없겠는가. 설총이 이두를 만들어 오늘까지 민간에서 사용하지만 모두 한자를 빌려 쓰는 것으로 난삽하거나 막

    히어 만분의 일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다.

      – 정인지, 〈서(序)〉


이를 통해 훈민정음 창제에 민본 정신과 민족 주체성이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훈민정음 창제는 세계 언어학사에서 획기적이고 혁명적인 사건으로 기록될 정도로 뛰어난 업적이다.

국보 제70호인 《훈민정음》의 과학성과 체계성, 실용성은 전 세계적으로 평가를 받아 1997년에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기도 했다. 훈민정음은 모두 28자로, 초성(初聲) 17자와 중성(中聲) 11자로 이뤄져 있으며, 기본 초성 5자(ㄱ, ㄴ, ㅅ, ㅁ, ㅇ)와 기본 중성 3자(·, ㅡ, ㅣ)를 만든 뒤 나머지는 이들로부터 파생시켜 나가는 이원적인 체제로 만들어졌다. 또 하나의 음소(音素)를 하나의 기호로 나타내는 음소 문자이며, 모음인 중성을 매개로 자음인 초성과 종성을 조합하는 음절 방식의 표기 체제를 갖고 있다. 초성, 중성, 종성의 삼분법은 당시 음운학에서 전혀 새로운 개념이었다.


특히 발음기관(목구멍)과 천(天), 지(地), 인(人)의 모습을 본떠 기본 문자를 만들면서, 여기에 역철학(易哲學)의 원리까지 응용했다. 기본 자음인 어금닛소리(牙音, 아음) ㄱ은 혀뿌리가 목구멍을 막는 모양을, 혓소리(舌音, 설음) ㄴ은 혀가 윗잇몸에 닿은 모양을 각각 본떴다. 또 입술소리(脣音, 순음) ㅁ은 입 모양을, 잇소리(齒音, 치음) ㅅ은 이 모양을, 목구멍소리(喉音, 후음) ㅇ은 목구멍의 모양을 본뜬 것이다. 아음과 설음, 순음, 치음, 후음의 오음(五音)은 각각 오행(五行)의 목(木), 화(火), 토(土), 금(金), 수(水)에 해당한다.


이 기본 자음에 획을 더해 나머지 자음을 만들었다. 기본 모음 ·, ㅡ, ㅣ는 각각 하늘과 땅, 사람의 모양을 본뜬 것이며, 나머지 모음 역시 기본 모음을 조합해서 지었다. 땅 위에 태양이 있거나(ㅗ) 사람의 동쪽에 태양이 있는(ㅏ) 모습은 양성(陽性) 모음이 되고, 태양이 땅 아래에 있거나(ㅜ) 사람의 서쪽에 태양이 있는(ㅓ) 모습은 음성(陰性) 모음이 된다. 이로써 모두 28자가 만들어졌고, 세종은 이러한 제자(製字)의 원리를 《훈민정음》 〈해례(解例)〉에 담았다. 현재의 한글은 이 가운데 24자를 쓰고 있다.


세종은 훈민정음을 반포하면서, 모든 백성들이 이를 쉽게 접하고 익힐 수 있도록 다양한 정책을 시행했다.

우선 궁중에 정음청(正音廳)을 설치해 서적 편찬 등 관련 사업을 전담하게 했고, 일반 관리들은 의무적으로 훈민정음을 배우도록 했다. 백성들에게 형률을 적용할 때 그 내용을 훈민정음으로 알려주게 하고, 백성들이 관가에 제출하는 문건도 훈민정음으로 작성토록 했다. 궁중의 모든 여인들에게도 훈민정음을 익히게 했다. 이 같은 세종의 시책에 따라 훈민정음은 평민과 노비, 여성을 비롯해 한문에서 소외됐던 일반 백성들 사이에 급속히 전파됐다.


     용비어천가

     세종 때 훈민정음으로 지어 반포된 것으로, 목조부터 태조까지 조선 왕조 선조의 행적을 노래한 장편 서사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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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조의 창건을 합리화하는 내용의 장편 서사시인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와 장편 불교 서사시인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이 훈민정음으로 지어져 일반 백성들 사이에 보급됐고, 《석보상절(釋譜詳節)》, 《금강경언해(金剛經諺解)》 등 불교 서적과 《내훈(內訓)》 등의 계몽서도 훈민정음으로 나왔다. 행정 실무자들은 훈민정음을 이용해 백성들에게 국가 시책을 알기 쉽게 설명할 수 있게 됐고, 평민이나 여성층의 문자 생활이 갈수록 활발해져 문학을 창작하는 일도 가능해졌다. 16세기에는 사서(四書)를 비롯한 유교 경전이나 《농사직설(農事直說)》 같은 농업 관련 서적들도 훈민정음으로 쓰였다. 훈민정음의 창제로 말과 글의 불일치에서 벗어난 백성들은 실생활에서도 혁명적인 변화의 전기를 맞게 된 것이다.

 

이근호             

국민대학교 문과대학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국사학과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조선후기 정치사를 전공했으며, 현재 국민대학교에서 강의하고 있다.

박찬구             

부산 중앙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였다. 1991년 서울신문사에 입사하여 사회부, 정치부, 미래전략팀을 거쳤으며 현재 국제부에서 근무 중이다.

출처


한국사를 움직인 100대 사건 | 저자이근호 | cp명청아출판사 도서 소개 https://100.daum.net/book/660/toc

역사적인 사건들의 기승전결, 사건과 사건 사이의 인과관계와 상호작용을 추적하여 5천 년의 한국사를 복합적으로 이해한다. 고대, 고려, 조선, 근대, 현대로 한국사의 주..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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