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 출처 : 조선일보 https://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2/06/2020020600241.html
평안·함경 방언 망라한 3366개 詩語.. 백석의 시는 '우리말의 보고'
백수진 기자 입력 2020.02.06. 03:11
| [조선일보 100년 기획 - 말모이 100년, 다시 쓰는 우리말 사전]
| [20] '백석 사전' 편찬한 고형진 교수
| "째듯·죈두기송편·무르끓다.. 사전에 없는 새로운 단어 많아
| 백석의 시가 사랑 받는 이유? 가공되지 않은 순수한 자연어로 우리말의 매력 보여주기 때문"
우리말에는 '밝다'와 '어둡다' 사이에도 숨은 단어가 많다. 특히 백석의 시(詩)에서 명암을 나타내는 다양한 낱말을 찾아볼 수 있다. 등(燈)에서 뿜는 선명한 빛은 '째듯'하고, 저무는 저녁 해의 쇠약한 빛은 '쇠리쇠리'하다. 조금씩 번지는 어둠은 '어드근'하고 먼 곳까지 아득한 어둠은 '어득하다'고 말한다.
고형진 고려대 국어교육과 교수는 이러한 백석의 시어들을 모아 사전 '백석 시의 물명고(物名攷)'를 만들었다. 백석은 1935년부터 1948년까지 총 98편의 시에 3366개의 시어를 썼다. 다른 시인과 비교했을 때도 시어의 총량이 엄청나다. 고 교수는 "다들 백석 하면 평안도 방언만 쓴 줄 알지만 교사 시절 거주했던 함경도의 방언, 조선일보 기자로 일하며 썼던 표준어까지 활용해 우리말을 아주 다채롭게 구사한 시인"이라며 "이 많은 시어는 우리말의 언어 자원이 얼마나 풍부한지 보여준다"고 했다.
무려 3000개가 넘는 시어는 사람과 관련된 어휘뿐 아니라 의식주부터 세간, 사물과 동식물 등 각 분야를 망라한다. 음식 관련 낱말만 해도 203개. 시가 98편이니 거의 모든 작품에 새로운 음식이 등장하는 셈이다.
그래픽=박상훈·양진경·김하경
시 '고야'에는 명절을 앞둔 밤, 송편 빚는 풍경이 이렇게 그려진다. '방안에서는 일가집 할머니가 와서 마을의 소문을 펴며 조개송편에 달송편에 죈두기송편에 떡을 빚는 곁에서 나는 밤소 팥소 설탕 든 콩가루소를 먹으며 설탕 든 콩가루소가 가장 맛있다고 생각한다.' 고 교수는 사전에 없는 '죈두기송편'의 뜻을 '깍두기'와 유사성에서 찾았다. "깍두기의 '둑이'가 모양을 나타내는 말이니 죈두기는 주먹을 쥔 모양이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사전에 없는 단어들은 형태를 분석하고 그와 비슷한 단어들을 찾아 뜻풀이를 완성했죠."
음식이 많이 나오는 만큼 조리 동사도 풍성하다. 그는 '무르끓다'라는 단어를 예로 들었다. "명절날 부엌에서 '구수한 내음새 곰국이 무르끓고'라고 써요. 음식이 허물어질 정도로 끓는다는 뜻의 '무르끓다' 때문에 구수한 냄새가 생생하게 전달되죠. 영어로는 'boil' 하나뿐이지만 우리말엔 끓이다, 우리다, 졸이다, 무르끓다… 아주 다양해요."
고 교수는 "백석은 말소리에서 단어의 이미지가 떠오르는 우리말의 특성을 굉장히 잘 활용했다"면서 "그의 시를 읽으면 우리말이 사물의 특징을 얼마나 정확하게 나타내는지 알 수 있다"고 했다. "훈민정음 해례의 정인지 서문에 보면 바람 소리, 학 울음소리, 닭 홰치는 소리도 모두 이 글자로 적을 수 있다고 말하죠. 한글이 소리를 정확히 나타내기 위한 발음기호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우리말은 음상(音像)이 단어의 의미와 무관하지 않아요."
고형진 교수는 “새로운 시어를 최초로 쓴 시인과 작품을 추적하는 연구를 하고 있다”며, “10년 걸린 백석 사전처럼 시간과 싸우는 작업”이라고 했다. /이진한 기자
그래서 백석의 시는 단어만을 나열하는데도 장면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편지'라는 수필에서 백석은 정월대보름 밤 복을 맞기 위해 집 안 곳곳에 불을 밝힌 풍경을 이렇게 묘사한다. '육보름으로 넘어서는 밤은 집집이 안간으로 사랑으로 웃간에도 맏웃간에도 루방(다락방)에도 허텅(헛간)에도 고방(광)에도 부엌에도 대문간에도 외양간에도 모두 째듯하니 불을 켜놓고 복을 맞이하는 밤입니다.'
고 교수는 백석의 시가 오래도록 사랑받는 이유를 "단어가 가진 매력, 우리말의 매력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백석의 언어는 시적인 수사가 적고 가공되지 않은 순수한 자연어만을 썼는데도 호소력이 짙어요. 우리말의 특성을 정확히 파악하고 그것을 잘 살려 썼기 때문에 그의 시를 읽다 보면 우리말이 이렇게 매력적이구나 감탄하게 되죠."
연재 말모이 100년, 다시 쓰는 우리말 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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