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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굳세어라 금순아’는 , 부산이 아닌 대구 교동시장 강산면옥 앞길을 걸으며 만들었다

by 아름다운비행 2012. 6. 30.

* 영남일보 |  이춘호기자  2012-06-29 08:08:39

  http://v.daum.net/link/31071309?srchid=IIM/news/55399171/567b1b763bde150881e5f0bd51b3f18e#A191E35383588258AB5402D

 

 

 

6·25 大邱스토리 - 전쟁 속의 낭만

 

 

시내 중앙통의 한 모퉁이에 서 있는 군사시설을 알려주는 이정표.

 

 

현장에서 강제 징집 당한 장정들이 군복도 입지 않은 채 교육대로 가기 위해 줄지어 서 있다. 생존해 있으면 팔순의 나이다.

 

 

당시 육군본부는 수원과 대전, 대구와 부산을 거쳤다가 마지막엔 현재 한국은행 대구경북본부 자리에 앉아 있었다. 당시 그 자리에는 대구금융조합이 있었다.

 

 

51년 5월15일 신병훈련소 수료식 전경.

당시 징집된 장정은 모두 남산초등학교에 집결해 예하 9개 교육대대로 분산됐다. 훈련 기간은 약 7일.

 

 

전쟁이지만 여성들의 아름다움 추구욕은 동일한 모양이다. 캠프헨리 근처 한 구멍가게 앞을 지나가는 두 여성의 파마한 머리, 롱 스커트는 당시 한복 차림의 여느 여성과 확연히 구별이 된다. 미군부대 하우스걸로 보인다. <대구백화점 제공>

 

 

 

(1) 대구를 사수하라

1950년 8월15일 인민군이 왜관을 점령한다.

창녕, 성주, 영천까지 적의 치하에 들어간다. 낙동강∼포항 형산강 전선이 형성된다. 다음 날 세계 전사에 기록될 융단폭격이 왜관철교 근처에 가해진다. 오전 11시58분 B-29폭격기 98대가 무려 26분간 3천234발 960t의 폭탄을 가로 5.6㎞, 세로 12㎞ 구역에 투하한다. 1950년 8월18일 새벽, 다부동 전투 와중에 팔공산 가산산성 쪽을 뚫은 인민군 13사단이 대구역을 향해 82㎜ 박격포 7발을 발사한다. 대구역 근무 직원 한 명이 숨지고 민간인 7명이 부상을 당한다. 19일과 20일에도 포탄 몇 발이 더 떨어진다. 국운이 백척간두에 놓였다. 이승만 대통령의 순발력(?)은 놀라웠다. 6월27일 오전 3시 서울역을 떠나 다음날 오후 4시30분 대전에 도착하고, 29일 오전 11시 대구역에 도착한다. 다시 대전으로 올라갔다가 7월1일 오전 1시 대전에서 목포로 가서 해로를 이용해 부산항에 7월2일 오전 11시에 도착한다. 7월17일 정부도 임시수도격인 부산으로 간다. 이 흐름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동요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대구 인구는 약 27만명. 피란민은 40여만명. 신천변, 동인동, 신천동, 비산동 등은 피란민들의 누더기 판자집으로 뒤덮여버렸다. 포탄 소리에 놀란 피란민들은 대구도 안심할 수 없었다. 곧 대구도 적의 치하에 들어갈 것으로 보고 서둘러 남으로 내려가기 위해 거리로 쏟아져나온다. 이를 몸소 저지한 인사가 있었다. 훗날 그런 공로가 인정돼 대구에서 야당 국회의원이 되는 유석 조병옥 내무장관이 대구역에 운집한 피란민 앞에서 ‘대구를 사수하자’고 피묻은 연설을 해 진정국면을 만들어 놓는다.

이승만 대통령은 부산으로 피했다가 다시 대구로 올라와 50년 8월18일 다시 부산으로 가기 전 대구에서 33일 머물렀다. 당시 관저는 동산 선교사 주택으로 추정되며, 한일극장이 임시 국회의사당 구실을 한다.


오리엔트 레코드社 전시 음반산업 주도
‘봄날은 간다’ 등 명곡 잇따라 선봬


장교들 중심으로 양춤·양공주 ‘바람’
수성·봉산동에는 군인 위한 댄스장인
육군·공군홀 들어서 작곡가 김희갑 배출
사설 카바레도 특수


녹향·르네상스 등 클래식감상실도 등장

옛 한일극장 대보수 오케스트라박스와 회전무대까지 설치



(2) 강제징집되면 1주일만에 전장으로

심하게 말해 6·25 당시 징집은 ‘복불복’이었다.

운없어 잡히면 전장행이었다. 이건 병무행정이 전무한 탓이다. 국방부 직할 시도병무청이 개청된 게 1962년. 그러니까 한국동란 때는 군인들이 총을 들고 다니면서 신체 건장한 남성을 보는 족족 대구 내 9개 신병교육대로 넘겼다. 신병 색출은 주로 낮보다는 밤시간. 징집을 당하면 입대 하루 전 부모와 마지막 상봉을 시켜준 뒤 남산초등학교로 데려갔다. 대구농림학교와 삼덕초등 등 상당수 학교가 신병교육대로 사용된다. 이 교육대는 곧 제1훈련소로 묶여진다. 기본 교육은 7일, 전황이 다급하게 돌아가면 2~3일 소총교육만 받고, 그것도 안되면 사격교육 받으러 가다가 전장으로 직행했다. 보통 하루 200~300명, 많을 때는 2천~3천명을 배출시켰다. 낙동강 전투가 뜨겁게 달아올랐던 8월초~하순, 대구에서 무려 5만여명의 신병이 배출됐다. 포병훈련은 앞산 안지랑 계곡에서 이뤄졌다.

(3) 육군본부도 대구로 피란왔다

6·25로 인해 대구는 졸지에 ‘군사도시’로 급부상하게 된다.

육군본부는 수원을 거쳐 1950년 7월14일 대전에서 대구 중앙초등학교 근처로 옮겨왔다가 잠시 부산시 문현동으로 피란간다. 다시 그해 9월23일 현재 한국은행 대구경북본부 자리로 옮겨와 55년 2월27일 서울 삼각지 현재 자리로 복귀한다. 2군사령부의 경우 54년 10월31일 대구 계성중에서 태동했다가 상경한 육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가 68년 12월3일 만촌동으로 옮긴다.

당시 대구의 초·중·고·대학교와 주요 시설물은 군사시설로 징발된다. <표 참조>

(4) 추억의 육군·공군홀

◇수성동 육군홀= 대백프라자 신천쪽 맞은편은 수성2가. 50년대초만 해도 거대한 과수원촌이었다.

일제 때는 홍옥, 국광, 골덴 등 숱한 품종의 사과가 생산됐던 ‘대구농원’ 자리였다. 거기 주인은 강경식 전 재무부 장관의 장모였던 김송배 여사. 그런데 대구에 UN군으로 지주한 KCOMZ(미후방기지사령부)가 여기를 군주둔지로 만들어버린다. 9·18 서울수복 때까지 미군이 잠시 머물렀다가 나중엔 이종찬 육본 참모총장 등 육군 실세들이 이 땅을 그냥 집어먹으려고 했다. 한때 경북 걸스카우트 연맹 회장까지 역임한 김 여사는 ‘사유권 침해’라며 미군과 육본 측에 강력하게 항의한다.

이승만 대통령은 육본을 방문했다가 숙소가 마땅치 않아 이 과수원 한 켠에 양철로 된 미군클럽(일명 코리아 하우스)에서 잠시 묵기도 했다. 코리아 하우스는 뒷날 육본이 서울로 올라가고 남은 시설을 2군이 효목동으로 이전할 때까지 2군홀(일명 육군홀)로 개조된다. 홀은 양철로 된 두 동의 막사를 하나로 합쳐 짜졌다. 61년 박정희가 5·16 군사정변에 성공 뒤 2군사령부 장교 등과 가든파티를 연 곳도 바로 여기다.

2군홀은 60년대 후반 민간에 넘어가 장원호텔로 신축된다. 2층 한옥 스타일의 이 호텔 1층은 장원 나이트클럽. 전속 밴드 마스터는 전 대구MBC 경음악 단장 조정영(바이올린, 피아노 파트). 장원나이트는 나중에 TOTO 클럽으로 변했다가 70년대 중반 양옥 신축붐 와중에 철거되고, 80년대 장원탕으로 변한다.

◇봉산동 공군홀= 중구 봉산동 64-1번지 대구초등 근처에 있었던 공군홀(일명 공군 구락부).

일제 때 사찰(천리교)을 매입, 공군을 위한 댄스홀로 개조한 것. 한옥 스타일이었고 넓은 주차장도 구비돼 있었다. 이 홀은 60년대 들어선 경북씨름협회가 입주했다가 나중엔 분할 신축된다. 공군홀 벽면 한쪽은 거울로 치장돼 있었다. 천장에는 조잡한 조명등이 달려있었다. 무대는 출입문을 열고 들어가면 왼편 모서리에 있었다. 낮에는 사설 댄스교습소로 변했다. 지배인은 영업 시작 전 춤꾼들을 위해 백색 파우더를 목조 플로어에 뿌려뒀다. 공군홀에는 작곡가 김희갑을 비롯 조미미의 ‘서산 갯마을’을 작곡한 김학송, 예천 출신 색소포니스트 김상렬 등이 지나갔다. 경음악 연주가 주류였고 춤이 주를 이뤘다. 트로트, 블루스, 지터벅, 탱고, 왈츠를 섞어 45분쯤 연주하고 15분 쉬었다. 마지막 곡은 늘 왈츠였다.

대한민국 최고의 작곡가 중 한 명인 김희갑. 평양 광성 제1중 축구선수였던 아버지 김중옥(대구에서 중일의원을 개업)의 손에 이끌려 1·4후퇴 때 대구로 피란 온 그는 유신학원 근처에 머물렀고, 후에 공군홀에서 연주생활을 한다. 김희갑은 현 남구청 자리에 있었던 대성고에 입학한다. 대성고 악대부원으로 발탁돼 클라리넷을 불렀고, 미8군 하우스 보이 시절 고물상에서 발견한 망가진 기타 한대를 입수한다. 이때 음악적 친구를 만난다. 바로 현재 대구MBC 네거리 근처에서 정형외과를 운영하는 의사 김경수였다. 그는 53년 경북대 예과 1학년 때 교동시장 내에서 첼로 스타일의 미국제 기타 실버톤(Silverton)을 구입했다. 고급기타과정을 배우기 위해 옛 대구상고 정문 앞 남선 기타연구소로 갔다가 김희갑과 운명적으로 만난다. 원장은 오아시스 레코드 전속 악사 김덕현(金德鉉). 피눈물 나는 연습 끝에 김희갑은 꿈에도 그리던 공군구락부 무대에 선다. 김희갑이 공군홀에 나타났을 때도 대구엔 전자 기타가 없었다.

(5) ‘굳세어라 금순아’ 태어나다

전장과 달리 후방의 대구는 상대적으로 낭만적 밤이 연출됐다.

특히 장교들 사이에 양춤바람이 거셌다. 미군 장교 때문에 양공주도 양산된다. 향촌동 골목에는 당시로는 놀라운 두 개의 클래식 음악감상실이 있었다. 바로 녹향과 르네상스.

해가 이슥해지면 이런저런 무도장이 특수를 누렸다. 그 무렵 춤출 수 있었던 공간은 육군·공군홀, 미군 상대 댄스홀 카멜을 비롯 국일, 국제(교통시장 안), OB(향촌동), 대안(향촌동), 대화(화전동) 등 ‘5인방 카바레’가 주름잡았다.

전시의 대구는 한국 음반산업의 메카였다. 전국 유일의 ‘오리엔트 레코드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부산에서 태어난 줄로 알고 있는 현인의 ‘굳세어라 금순아’의 배경도 실은 중구 교동시장 강산면옥 앞 길이었다. 그 노래는 어떻게 태어났을까?

1951년 여름, 대구시 중구 화전동 옛 자유극장 바로 옆 남선악기점 2층 오리엔트 다방(작곡가 박시춘 부인이 경영). 가수 현인이 오리엔트 레코드사 사장 겸 작곡가였던 대구 출신의 원로 작곡가 이병주에게 냉면을 먹으러 가자고 했다. 옆에 있던 밀양 출신의 박시춘과 여수 출신의 작사가 강사랑(85년 작고, 초대 대구연예협회 지부장 역임)도 따라나선다.

넷이 교동시장 안 군용천막으로 된 강산면옥에 갔다. 냉면 때문이었을까, 밤새 짜내도 나오지 않던 악상이 저절로 흘러나온다. 중구 남산동에 살았던 박시춘과 강사랑은 강산면옥 앞 거리를 걸어가면서 작곡과 작사를 완성한다. 그날 2층 다방에서 녹음까지 일사천리로 끝낸다. 오리엔트 레코드사는 귀국선, 전선야곡 등 명곡을 많이 찍어냈다. 진주 출신의 작곡가 이재호, 손노원, 이인권 등을 대구로 불렀다. 손노원은 53년 ‘봄날은 간다’를 작곡, 백설희에게 준다.

(6) 국립극장이었던 한일극장

38년 일본의 왕당 건축사무소가 설계한 키네마구락부.

한일극장의 일제 때 이름이다. 일본인들은 중국인들이 만든 적벽돌이 마음에 들지 않아 본토 건자재를 사용했다. 공사는 지역의 대표 시공업체인 옥대조(屋代組)가 맡았다. 드롭 커튼 2조가 있었는데, 한 조는 한국인을 위해 일부러 금강산 그림까지 금박으로 새겨 넣었다. 키네마는 49~53년 문화극장, 53~57년 중앙 국립극장을 거쳐, 57년부터 비로소 한일극장이 된다.

한일극장은 전쟁 때 가장 몸값이 높았다. 52년 5월14일 비상 국무회의 석상.

국무위원들은 중앙국립극장을 대구에 두기로 의결한다. ‘대구 국립극장 무산’이란 쓰라린 경험이 있던 지역 인사들은 그해 12월17일 항의성 성명서와 건의문을 언론사로 보냈다. 일부에선 대구의 자존심인 문화극장을 대구시 공관으로 만들자는 주장도 있었다. 한일극장이 대대적으로 보수된다. 오케스트라 박스와 회전무대도 만들고 좌석도 1천300여석으로 늘렸다. 휴전과 함께 국립극장을 이전하려 했지만 서울 국립극장이 전쟁 중 붕괴돼 서울 가는 데 차질이 생긴다. 51년 1월6~7일 구국총력 경북도연맹 주최 국방부 정훈국 군악대가 나와 ‘멸공을 위한 국민총궐기 신년음악회’도 거기서 연다. 57년 7월 국립극장 환도 후 한동안 경북도 관재국이 관리한다.

▨도움말=권상구 <사>시간과 공간 연구소 이사
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 영남일보 | 2012-6-29

   http://v.daum.net/link/31071309?srchid=IIM/news/55399171/567b1b763bde150881e5f0bd51b3f18e#A191E35383588258AB5402D 

 

북성로, 시간의 역설…‘2012’보다 더 화려한 ‘1952’

戰時수도 이곳에선

도대체 무슨 일이…

 

 

1952년 대구 북성로 동쪽 입구 전경. 일제 때는 은방울꽃 가로등이 놓여 있을 정도로 대구 최고의 번화가였고 엘리베이터가 운행되는

미나카이 백화점이 입구 왼쪽에 자리잡고 있었다. 지금은 대구백화점 동남쪽이 번화가이지만 그때는 대구역 앞이 가장 번창했다.

현재 이 지역이 워낙 낙후돼(아래 사진), 피란지 북성로 풍광이 지금보다 더 활발한 분위기를 보여주고 있다.

 

4만5천여명.

1950년 8월4일 우리 국군의 숫자다 . 대구스타디움(6만6천422명 수용) 스탠드를 다 채우지 못한다. 미군 4만7천여명, 북한군 8만여명을 합쳐도 3개의 매머드 종합경기장만 있으면 당시 ‘6·25 무대’에 출연한 아·적군을 모두 집결시킬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피식, 갑자기 웃음이 나온다. 일견 ‘거창해’ 보이던 6·25가 조금은 맥빠져 보인다. 6·25는 전사(戰士)의 무대는 아닌 듯 하다. 어쩌면 열강들이 당시 최강의 신무기를 한반도에서 성능실험해 본 건지도 모르겠다.

북한과 달리 남한은 군사 인프라가 전무하다시피했다. 군인보다 경찰의 화력이 더 월등했다. 경찰은 칼빈과 M1 소총을 가졌지만, 군인에게 그건 언감생심.

병무행정도 전무했다. 사병이 직접 거리에 나가서 장정을 잡아왔다. 만 20~35세 장정은 전장으로 잡혀갔다. 나이든 사람도 보국대에 끌려갔다.

흥미롭게도 북한 인민군과 국군이 사용한 보국대의 한자어가 다르다. 인민군이 사용한 보국의 ‘보(報)’자는 한국군이 사용한 보(保)와는 뜻이 완전 달랐다. 인민군은 김일성 수령에 ‘보은(報恩)’하기 위해, 한국군의 보국대는 국가를 ‘보호(保護)’하기 위해 전장으로 나간 것이다.

8월1일 육본은 대구에서 육군중앙훈련소(제1훈련소)를 창설해 신병보충 인프라를 급조한다. 대한민국 대다수 남성들이 거쳐간 연무대 논산훈련소(99년부터 육군훈련소로 개칭)는 제2훈련소로 51년 11월에 생겨난다.

동족상잔의 이 전쟁은 하늘이 만든 불행이 아니라 ‘이념이 만든 불행’.

상실감이 안겨다 준
역설적인 평화로움은
낭만이란 이름으로

그 도시를 활보하고…
피란은 비극이었지만
문화, 예술, 체육은
화려한 희극이 되었다


그래서 해독제를 쉬 찾을 수 없었다. 그 전쟁으로 인해 남과 북이 대립하는 것 이상의 앙칼지고 섬뜩한 이념적 대립을 우리는 아직도 자국민끼리 벌이고 있다. ‘6·25가 과연 끝났을까’라는 의구심이 든다.

6·25를 생각하면 자꾸 ‘태국의 닭싸움 광경’이 떠오른다. 자연스러운 분노가 아니라 누군가가 조장해 놓은 분노의 구조속에 갇혀 사생결단하고 있다는 걸 닭들은 좀처럼 깨닫지 못한다. 우리도 마찬가지. 좌·우익의 대표 구단주들이 남한과 북한이라는 두 마리의 싸움닭을 한반도란 전장에 집어넣고 사투를 벌이도록 했다. 급기야 흥분한 구단주가 직접 장기판 앞에 앉아버린다.

하지만 전쟁은 빈익빈 부익부를 거의 제로 베이스 수준으로 끌어내려준다. 다 가난하다는 것, 그게 되레 안정감을 가져다 준다. 워낙 큰 슬픔이 일상을 집어삼키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상실이 주는 ‘역설적 평화로움’이 낭만이란 이름으로 돌아다닌다.

대구는 8월18일 새벽 박격포탄이 대구역 부근에 여러 발 떨어진 것 말고는 전혀 피해를 입지 않았다. 피란민들의 일상은 ‘비극’이었지만 초토에서 꽃처럼 피어났던 문화예술만은 ‘희극’이었다. 국립극장은 물론 대다수 대한민국 최고의 문화예술인들이 대구에 내려와 있었다. 섬유산업의 75%를 대구가 독점하고 있었고, 제조업의 첫 단추도 대구에서 끼워진다.

이 와중에 학교, 운동장, 병원, 백화점, 공원 등 100여군데의 각종 시설물은 미군에 의해 군사시설로 접수된다. 군수물자는 막바로 대구경제의 축으로 작동을 한다. 이 흐름은 1970년 경부고속도로가 생겨 서문시장 상권이 서울 동·남대문 상권에 뺏기기 전까지 20여년간 지속된다. 서울이 정상적으로 복구되기 전 50년대 대한민국의 수도는 누가 뭐래도 ‘대구’였다. 하지만 지금은….

이번주에는 6·25당시 대구에 어떤 군사시설이 들어섰는지 알아봤다. 특히 그동안 사각지대에 파묻혀 있었던 6·25 시절 대구의 스포츠 야사도 정리해봤다.
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