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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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저명한 한국 현대사 연구자인 브루스 커밍스는 1981년 그의 대표작 『한국전쟁의 기원:해방과 분단정권의 등장』(The Origins of the Korean War:Liberation and the Emergence of Separate Regimes, 1945∼1947)을 간행하고, 1990년에는 이 책의 후속 편으로 『한국전쟁의 기원 2집:폭포의 큰 울림』(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Vol 2:The Roaring of the Cataract, 1947∼1950)을 출판한 바 있었다.
그는 이 두 책에서 한국전쟁의 기원을 1930년대 일제시대에까지 거슬러 올라가 살펴봄으로써 해방 당시 한국은 사회혁명(social revolution)이 성취될 여건이 성숙되어 있었고, 이러한 혁명은 미국의 패권주의적 군사 개입이 없었다면 성공했을 것이라고 보았다.
이처럼 그는 미국의 제국주의적 패권정책을 비판하는 수정주의 학설의 대표적 주창자로서 한국전쟁을 베트남전쟁과 같은 내전(Civil War) 내지 민족해방전쟁으로 규정한 바 있었다. 따라서 그는 도덕적 우위를 갖고 있다고 본 북한의 지도자 및 정부에 대해서는 호의적인 평가로 일관한 반면 미국의 꼭두각시에 불과하다고 억측한 남한의 지도자와 정부의 정통성에 대해서는 시종 비판적으로 논급한 바 있었다.
이러한 커밍스의 학설은 어둡고 긴 군사 독재의 터널을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있던 한국학계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켜 수정주의에 입각한 현대사 연구가 붐을 이루게 하는 기폭제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냉전의 붕괴와 함께 『스티코프(Terentii Shtykov) 비망록』과 같은 소련측 기밀 자료가 연이어 공개되고, 한국전쟁의 국제전적 성격을 밝힌 연구로 윌리엄 스톡(W. Stueck)의 『한국전쟁:국제사』(The Korean War:An International History, 1995)와 박명림의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Ⅰ:결정과 발발』(1996)과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Ⅱ:기원과 원인』(1996)이 속속 간행됨에 따라 한국전쟁이 국제적인 요인보다는 한국 사회 내부의 갈등으로 인해 발발했다는 커밍스의 학설은 밀려드는 파도 앞에 놓인 모래성과 같은 처지가 되었다.
지난해 말 출간된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는 1997년 미국에서 나온 『Korea’s Place In the Sun:A Modern History』(1997)의 한글판이다. 번역본의 출간과 더불어 신문지상의 서평란은 이 책에 대한 호평과 혹평의 십자포화로 수놓아졌다. “남한과 북한 심지어 미국에 사는 한국인까지를 조명하는 구체적이고 고급스러운 한국론”(「한국일보」 2001. 11. 2)이자, “미국인으로서 30여 년 간 한국을 본격적으로 천착한 그의 태도에는 경의를 표해 마땅할” 정도로 “그의 한국 사랑에 감명 받는다”(「경향신문」 2001. 11. 3)라는 찬탄의 축포가 작렬하는 반면 “사실적 판단과 객관성, 그리고 균형 감각의 측면에서 많은 결점을 안고 있는 커밍스 최악의 저작”(「조선일보」 2001. 11. 3)이라는 비평이 그 대척점을 정조준한다. 왜 이렇게 극과 극의 평가가 엇갈리는 것일까?
이 책을 긍정하는 평자들은 커밍스가 한국 역사의 흐름을 바라보는 데 사용한 “비교·유추·은유”의 마법, 즉 반미(反美)·반제(反帝)의 비판 의식과 약소국 한국 민중에 대한 강렬한 연민의 정을 보이는 서술 기법에서 우러나오는 감정적 호소력에 매료되어 있는 듯하다. 때문에 그들은 이 책의 행간 곳곳에 배어 있는 “합리주의자”를 자처하는 미국인, 즉 “영원한 타자”의 눈으로 한국 “근대성”의 역사 자체를 부정하는 커밍스의 오만함에는 눈이 멀어버린 듯하다. 왜냐하면 이 책은 커밍스가 인정한 바와 같이 “한국 사람들한테 불리한 것이라는 인상을 줄”수도 있는 “미국적 시각”(21쪽)에서 쓰인 “학부의 동아시아 문명 강좌에서 쓸 한국에 관한 독본”(10쪽)이지, 한국의 성공을 예찬하기 위해 쓰인 책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오해는 책 제목에서부터 시작된다. 이 책의 역자들은 번역서 출간 이전 “양지의 한국”으로 직역되던 “Korea’s Place In the Sun”의 함의를 번역하지 않음으로써 원저자가 걸어 놓은 “비교·유추·은유”의 깊은 속내를 알아채지 못하게 봉쇄해 버렸다. 커밍스는 이 책의 서문에서 자신이 제목에서 의미한 바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이제 오직 일본만이 떠오르는 태양의 나라임을 자처하고 있고, 근심 많은 미국인들만이 자기 나라를 지는 해라고 생각한다. 실로 우리의 흥망성쇠와 주기적인 일식을 관장하는 세계는 그리스와 로마의 세계가 아니라, 상대적으로 소수인 선진 산업국들이 끊임없이 경쟁을 벌이는 산업시대이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태양계에 한국은 이제 막 합류하게 되었다.”
커밍스는 자신의 책 제목을 한국이 “소수의 선진 산업국들이 끊임없이 경쟁을 벌이는 태양계의 일원으로 합류했다는 의미”를 상징한다고 말한다. 물론 “in the Sun”은 태양계를 방불하게 하는 현재의 세계 체제에서 한국이 서구 “산업 세계의 중심에” 놓이게 되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 설명하고 있는 한국의 태양계 진입 과정은 모멸과 험구로 가득 차 있다. 즉 한국의 산업화는 식민지 시대 일본에 의해 이루어진 산업화의 물적·인적 토대를 바탕으로 해방 후 미국 시민들의 세금으로 조성된 거대한 원조에 의해 종속적으로 이루어진 예기치 못한 성공이라는 것이다. 즉 한국은 미국 중심의 세계체제 하에서 종속적 성장을 한 꼭두각시의 나라인 반면, 북한은 “태양왕의 나라(Nation of the Sun King, 이 책의 역자는 태양의 왕국으로 번역했음)”로 비유하면서 미국 중심의 세계 체제에 맞서 독자적인 태양계를 이끄는 중심 나라로 그 주체성을 다각도로 강조한다. 이처럼 그는 지금까지도 해방 이후 남·북한의 발전상을 평가함에 있어 두 개의 다른 척도를 사용하는 북한 편향을 떨쳐버리지 못했다. 커밍스가 예찬하는 한국의 “미덕”은 덕치를 기반으로 한 농업 위주의 자급자족적 폐쇄사회이며, 이러한 미덕이 그대로 구현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조선 왕조의 적손(嫡孫) 북한은 그에게는 영원히 비판적 지지의 대상으로 남으리라고 본다.
커밍스는 말한다. “이 책에 나오는 모든 것은 새로운 접근법과, 동료들의 최근 연구를 최대한 숙지한 결과로써 해석된 것이다. 나는 사고 방식을 바꾸는 것은 성장의 신호라는 원칙 아래, 여전히 나한테 옳게 보이는 해석을 유지할 권리와 내 예전 연구에 나왔을지도 모르는 견해를 수정할 권리를 행사했다”라고.(1819쪽)
그러나 이 책을 정독해 보면 한국어나 한문으로 된 원전을 해독할 능력이 결여된 커밍스가 읽을 수 있었던 최근 연구들은 미국학자들이 일군 성과에 국한된 것이며, 그나마 자신의 구미에 맞는 것만을 편식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한국사를 보는 그의 시각도 수정주의, 세계체제론, 오리엔탈리즘, 그리고 목적론적 구조주의 이론에 여전히 주박(呪縛)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파도에 휩쓸려 부서질지도 모르는 자신의 학설을 지키기 위해 방파제를 쌓아 올렸을 뿐이었다. 아직도 그는 한국전쟁은 미국의 패권주의적 군사 개입이 없었다면 “식민주의나 민족분단, 외국간섭으로 야기된 엄청난 긴장이 해결되었을”(418쪽) ‘민족해방전쟁’이자 ‘내전’이었다는 수정주의 시각을 고수하고 있다. 또한 그는 “대한민국이라는 공화국은 예전에는 완전히 종속적이었다. 이 나라는 처음에는 식민지였다가, 그 다음에는 외국군에게 점령당했으며, 그 후 1950년 여름에 미국이 이 나라를 망각의 늪에서 구출했다”(419쪽)라는 서술에 보이듯이 세계체제론에 입각해 주변부의 운명은 핵심부에 의해 규정된다고 확신하며, 한국의 경제 성장이 일본과 미국과 같은 중심부에 기생해 얻은 비주체적인 것임을 강조함으로써 폄하한다. 나아가 그는 근대 이전 한국 사회의 역동성을 부정하며 개화파를 비롯한 한국인들이 펼친 근대화 움직임을 “일본과 미국의 흉내”로 밖에 여기지 않고 한국사의 진보를 위해 한국인이 기울인 주체적 노력을 무시해 버린다. 사실 커밍스는 이 책 전편에 걸쳐 합리성이 결여된 “한국”과 서구적이고 자유주의적인 “근대성”을 연결시킬 수 없다는 오리엔탈리즘의 각본대로 조선 후기의 역동성과 개화기의 자주적 근대화의 가능성을 부정하고 남한의 현대사도 폄하(貶下)하는 자세를 일관되게 견지하고 있다.
이 책에 대해 본격적인 평론을 쓴 전상인은 말한다. “이 책은 커밍스의 저작들 가운데 최악의 것이 아닌가 한다. 어쩌면 커밍스는 이 책을 통해 그나마 지금까지 자신이 한국 현대사 연구에서 쌓아 왔던 나름의 학문적 명성을 한꺼번에 상실할지도 모른다”고.(「B. 커밍스, 『양지의 한국:현대사』 20세기 한국사의 반미적 해석, 친북적 왜곡, 반한적 평가」, 『해외한국학 평론』 창간호, 2000)
이러한 지적은 촌철살인의 정곡을 찌르는 평가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 책의 갈피 갈피에는 모래성과 같아진 자신의 학설을 지키려는 위기 의식이 배어 있으며, 합리주의를 가장한 오리엔탈리즘이라는 지적 오만이 꿈틀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이 책은 객관성과 논리성에 의거한 학술서라기보다는 비꼼과 뒤틀림, 비유와 은유로 점철된, 읽는 이의 가슴에 호소하는 격정적 역사 산문이라 할 수 있겠다.
2. 위 책에 관한 또 다른 글들
http://blog.naver.com/supernkr/120006583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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