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 [사회공공성 강화!] 그냥 그저 그래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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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5월달에 민지네 민중가요 소모임 청계천8가에 썼던 글을 보완한 것입니다. 이 글은 박건호님의 홈페이지에 있는 글을 참조한 것인데, 박건호님의 홈페이지를 이제는 찾을 수 없군요.
2005. 9. 12. 저번주 대학신문에 실렸던 임을 위한 행진곡에 관한 기사를 추가하였습니다. 아직도 제가 모르는 게 많네요.
2006. 2. 19. 경향신문 매거진-X에 나온 것을 추가하였습니다.
2006. 5. 29. 중앙일보 5월 18일자에 실린 기사를 추가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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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5. 18에서도 어김없이 임을 위한 행진곡이 불리워졌습니다. 그리고 노무현 대통령과 열린우리당의 젊은 국회의원들이 만나서 샥스핀을 먹으면서 이 노래를 불렀다고 합니다. 그것도 나름대로 주먹을 흔들면서 말이죠. 이 노래가 그렇게 공식성을 가지게 되는 것이 나쁜 것인지 여부는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듯 합니다. 이게 운동권의 전유물인 것도 아니고요.
특히 올해는 김규항님이 자신의 홈페이지에 임을 위한 행진곡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리고 이 글이 여기저기 퍼지면서 이 노래가 유명해졌습니다.
가사는 아래와 같습니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 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데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 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백기완 작시/ 김종률 작곡)
이 노래는 백기완선생의 [묏비나리](1980년 12월)에서 가사를 따왔습니다. 원래의 시는 대략 이러합니다.
(상략)
무너져 피에 젖은 대지 위엔
먼저 간 투사들의 분에 겨운 사연들이
이슬처럼 맺히고 어디선가 흐느끼는 소리 들리리니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 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싸움은 용감했어도 깃발은 찢어져
세월은 흘러가도
구비치는 강물은 안다.
벗이여 새 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갈대마저 일어나 소리치는 끝없는 함성
일어나라 일어나라
소리치는 피맺힌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산자여 따르라
(하략)
이 노래는 80년 5월 광주의 진상을 알리기위해 82년 당시 광주지역에서 문화운동을 하고 있었던 황석영님이 구성하고 지하에서 제작 배포한 `자유 광주의 소리' 테이프에 실린 것으로, 5.18 당시 시민군 대변인으로 활동하다가 27일 도청에서 전사한 윤상원열사와 그의 야학 동료로서 79년 겨울 노동현장에서 일하다 연탄가스중독으로 숨진 박기순님의 영혼 결혼식을 내용으로 하는 노래굿 [넋풀이]에서 영혼 결혼을 하는 두 남녀의 영혼이 부르는 노래로 작곡되었습니다. 기타와 괭과리의 반주가 함께 어우러지는 분위기가 호탕하면서도 투쟁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내는데, 지금 우리가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라고 부르는 마지막 구절이 원래는 '앞서서 가나니'였다는 점은 이 노래의 맥락을 짐작하게 합니다. 즉 두 영혼이 '우리는 앞서서 가니, 살아 있는 자들이여, 기운을 내어 뒤를 따르라'고 독려하고, 이를 통해 미래를 다짐하는 내용이었던 것이죠.
결국 80년 당시부터 불리워진 것은 아니고 82년경부터 보급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자유 광주의 소리' 테입에 수록되었던 노래 중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만이 살아남아서 지금까지 국가행사에 쓰일 정도로 파급된 것입니다. 제가 알기로는 이를 영어로 번안해서 부른 것도 있는 줄 압니다. 필리핀 등지에서 불리워진다고 하더군요.
「임을 위한 행진곡」은 노찾사의 편곡에서도 보이듯이 원래 단조풍의 노래입니다. 노래굿에서도 그렇고요. 어쩌면 광주 대학살의 아픔과 패배감, 그리고 살아남은 자들의 자괴감과 죄의식을 반영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지요.
하지만 이 노래가 현장에서 불리워지면서는 힘찬 투쟁가로 변모하였습니다. 80년대 초 광주항쟁의 패배감과 좌절감을 극복하고 승리의 의지와 투쟁적 역동성을 담아내는 노래로서 바뀐 것입니다. 그리고 대중적으로 알려진 것은 87년 6월항쟁 이후일 것입니다. 저 또한 단조풍으로 흘러나오는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버전보다는 힘찬 최도은 님의 버전이 훨씬 더 와닿습니다. 물론 단조풍의 노래가 가슴을 적실 때도 있습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87년 대선 당시 민중후보로 출마했던 백기완 선생의 로고송 비슷하게 사용되었던 것입니다. 백선생이 단상에 등장하면 어디선가 들려오는 선동구호! "가자, 백기완과 함께! 민중의 시대로!" 그러면 그 자리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일어나서 함께 이 구호를 반복한 후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불렀다고 합니다.
제가 대학교에 입학한 것은 88년도였는데, 88년에 백기완 선생이 학교의 도서관 앞 광장인 아크로폴리스(백선생은 새뚝이마당이라고 부르자고 제안했는데, 학내시위가 감소하면서 지금은 도서관 앞 광장으로 불리워질 때가 많습니다)에서 강연이라도 하려치면, 그 강연 시작 전에 어김 없이 그 선창과 함께 임을 위한 행진곡이 불러워졌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모두가 하나되는 느낌도 함께요..
지금은 무슨 민중의례를 할 때면 애국가 대신 당연히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릅니다. "민중의 영원한 노래, 임을 위한 행진곡을 힘차게 부릅시다!"라고 하면서요. 하지만 88년만 해도 민중의례를 할 때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는 것이 당연하지는 않았습니다. 학생운동 진영만 해도 총학생회 출범식이나 집회가 있을 때 다른 노래를 불렀습니다. 물론 애국가는 아니었습니다. 무슨 노래였을까요? 민족해방가였습니다.
압박과 설움에서 해방된 민족
싸우고 또 싸워서 찾은 이 나라
쪽발이 앙키놈이 남북을 갈라
매판파쇼 앞세운 식민의 나라
이 땅의 민중들은 피를 흘린다
동포여 일어나라 해방을 위해
손 잡고 백두산에 해방기 휘날리자
술자리에서는 여기에 덧붙여 "손 잡고 광화문에 붉은기 휘날리자"라는 후렴구를 붙이기도 했던 것이 기억나네요.
암튼, 그랬었는데 언제부터인가 임을 위한 행진곡이 자리잡기 시작했습니다. 아마 운동진영에 노동자 중심성을 강조하는 세력들이 힘을 얻게 되면서 그렇게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이 민중의 사랑을 받는 것은 의미 있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노래가 항상 애창되었던 것은 아닙니다. 재작년 여중생 범대위에서 주관했던 촛불집회에서 이 노래가 거의 불리워지지 않았던 것이 기억나네요. 운동권들만 있으면 반미반전가, 퍼킹 유에스에이 등의 노래를 부르면서 온갖 과격하고 생경한 구호를 외치다가, 밤에 광화문의 촛불집회만 하면 1970년대의 분위기로 돌아가서 아침이슬, 광야에서 등을 부릅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는 것조차 금기시하면서 참여의 수준을 후퇴시켜 놓고서는 대중성을 획득했다고 얘기되는 집회가 촛불집회였습니다. 그런데 올해 탄핵무효 촛불집회에서는 임을 위한 행진곡이 자주 나왔던 것으로 압니다. 같은 촛불집회라도 탄핵무효 집회가 더 왼쪽에 있었던 걸까요? 그래서인지 저는 여중생 추모촛불집회에 몇 차례 참여했지만, 재미도 없었고, 내용도 없어서 꾸준히 참여를 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군요.
노찾사 3집 - 임을 위한 행진곡
지난 3월 탄핵무효집회 때 촛불을 든 군중들에 의해 임을 위한 행진곡이 불리워지는 것을 알았을 때는 좀 씁쓸하기도 했습니다. 이 또한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투쟁의 일환이었기는 하였지만, 이 노래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잘 알고 있으며, 제가 이 노래를 부를 때 어떠한 마음이었는지를 떠올렸기 때문이었습니다. 적어도 광주와 윤상원 열사를 기억하는 이라면 신자유주의적 시장개혁의 선봉에 선 노무현 대통령을 구하려는 탄핵반대, 민주수호의 함성 속에 임을 위한 행진곡이 나오는 것에 대해 안타까워하지 않았을까요? 아파트 분양원가 공개 반대, 노동자의 비정규직화 지지, 이라크 파병 고수 등 요즘 노무현 대통령이 말하는 발언을 보면 당시의 생각이 전혀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실감하게 됩니다. 차라리 그 때 민중탄핵을 주장할 걸 그랬나 싶구요.
뒤늦게나마 임을 위한 행진곡을 되뇌이면서 5월 광주의 마지막날 도청에서 산화한 동지들을 떠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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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햇발] 다시, 그 노래를 부르며
김선주 한겨레신문 논설위원 2000-05-27
“...두달전에 학교에서 21세기 변혁을 주제로 특강을 해 달라고 하더라구. 강의가 끝나고 곁에 있던 교수가 총장님이 차 한잔 마시자고 한다는 거야. 예전같으면 학생회에서 나를 부르지 학교쪽에서 나를 부를리 없고 내가 왔다면 앉았던 총장도 도망갈 판인데... 총장실에 들어갔더니 총장은 없더라구. 부총장이란 젊은 친구가 일어서더니 죄송합니다 총장님이 급한 일로 나가셔서 제가 이걸 드립니다하고 누런 종이를 들고 뭐라 뭐라 읽더라구. 교수 임명장이라는 거야. 서운하더라구. 나하고 의논도 없이 어찌 이랬냐 했더니 선생님과 의논했다가 안 받아들이시면 여러가지로 골치 아프니 특강초청해놓고 이렇게 준비했습니다 죄송합니다 하는거야 . 거 참 아무래도 서운해....” 이것이 초등학교 중퇴학벌의 백기완 선생이 한양대 겸임교수가 된 사연이다. 평생 처음갖게 된 합법적인 지위라는 말씀에 그럼 평생 처음 월급을 받으시겠네요하니 아니야 잘 몰라 물어보지 않았어 하신다.
요즘은 민중이라는 말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시민이 들어섰다. 그러나 나는 민중이라는 말을 좋아한다.그 뜨끈하고 울컥거리는 감동과 때로는 노도와 같이 휩쓸려가는 거대한 힘, 그리고 그 거대함속에 개인이나 개인이익은 슬그머니 뒤로 물러나는 그 익명성의 단어를...
87년 6·29선언이 있고 나는 오 이럴수가 이렇게 좋을수가 이런 날이 오다니 노상 마음을 잡지 못하고 들떠있었다. 그해 겨울 양김과 또다른 김과 노태우씨 모두 대통령후보로 나선뒤, 마음이 허전하고 지리멸렬한 가운데 충동적으로 아이의 손을 잡고 동숭동 대학로의 민중후보 백기완 유세장에 갔다. 빼곡히 나무위까지 올라선 수십만의 젊은이들 틈에서 `가자 백기완과 함께 민중의 시대로' 외쳤을때의 감동과, 민중이라는 말이 뜨겁게 달구어내던 열기를 잊지 못한다. 그리고 결단에 찬 긴장감으로 장중하게 울려퍼지던 노래도.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지난 주말 옛 경희궁터에서 백기완선생이 창간호를 낸 잡지 노나매기 창간기념 축하잔치마당이 열렸다.노나매기란 말은 너도 일하고 나도 일하고 너도 배불리 먹고 나도 배불리 먹되 단 올바른 방법으로라는 정신이 들어 있는 우리말이라고 한다. 한승헌변호사 고은선생 리영희선생이 굳건히 자리해 축하말을 했고 오세철 박호성 강내희 손호철교수등과 최열 임헌영 등의 얼굴도 보였다. 아직도 불굴의 의지로 민주 민중 민족을, 미국금융제국주의의 흉계를 경계하는 백기완선생의 일갈이 있었지만 5월의 토요일 오후, 분위기는 한가로왔고 절박한 긴장감도 없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모두 일어나 그 노래를 불렀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흘러간 유행가처럼 시들하게 처지는 노래에 힘을 주기 위해 87년겨울 언땅과 언 하늘을 녹일듯 뜨거웠던 열기를 그때 그 상황을 기억하며 주먹에 불끈 힘을 넣어 오른손을 높이 치켜들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우리가 지금 여기 올바른 자리에 서 있는 것인가. 이 사회가 그 때 기대했던 그러한 세상인가. 87년 그때보다 지금의 세상이 잘나가고 있는건가. 잘사는 사람은 더 잘살게 되고 없는 사람은 더 힘들어진 세상. 아무도 반성하지 않고 아무도 잘못한 사람이 없는 세상. 어떤 과거도 청산되지 않았고 어떤 사람도 청산되지 않은 세상.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기지 않고 한평생 나가자던 맹세는 어디갔지. 대학로의 수십만 인파는 지금 어디서 무얼하지. 정치권에 수혈되었다는 새피 386세대, 벤처에서 뜬다는 386세대, 그때 대학로에 있었을 그들은 그때 그 맹세를 기억이나 하고 있을까. 산자여 따르라는 말은 이미 시효가 지났는가. 먼저 죽은 이한열 박종철 그리고 전태일까지 숱한 젊은 친구들은 뒤에 남은 산자들이 따를 줄 알고 있을 텐데 이래도 되는 거야. 앞서서 나가겠다는 약속은 지금 지켜지고 있는거야. 그때 그 참담했던 선거결과가 사람들 마음속에 불을 지펴 창간된, 내가 몸담고 있는 한겨레신문은 그때의 그 열정과 갈망을 제대로 이어가고 있는거야. 그리고 여기에 몸담고 있는 너는...다시 그 노래를 부르며 누군들 고개를 들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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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가요의 발자취를 따라서] ① 임을 위한 행진곡
열사의 넋을 기리는 영혼 결혼식
최지원 기자 tinicd85@snu.ac.kr
▲ 좌측부터 박기순 열사, 임을 위한 행진곡 악보, 윤상원 열사 <제공: 윤상원민주사회연구소, 그래픽: 김혜성 기자> |
류민희씨(사회과학계열[]05)는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서 처음으로 ‘민중의례’라는 것을 경험했다. 마치 ‘국민의례’ 시간처럼 선배들은 일제히 일어나 엄숙하게 묵념을 한 뒤, 애국가 대신 어떤 노래를 열창하기 시작했다. 비장하고 구슬픈 느낌의 이 노래는 바로 제2의 애국가로 여겨지는 민중가요, ‘임을 위한 행진곡’이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두 남녀의 영혼 결혼을 기리는 노래다. 신랑은 1980년 5[]18 광주항쟁에서 시민군 대변인으로 활동하다가 전남도청 회의실에서 전사한 윤상원 열사, 신부는 1979년 12월 공장 옆 자취방에서 연탄가스 중독으로 숨진 박기순 열사다. 두 열사는 1978년 광주지역 최초의 노동야학인 ‘들불야학’의 ‘강학(講學)’-당시 들불야학 교사를 일컬음-출신으로, ‘들불7열사’에 속한다.
“죽음을 직시한 그 빛나는 눈망울을 잊을 수 없습니다.”
「볼티모어 선」의 브래들리 마틴 기자는 광주항쟁 당시 전남도청에서 열린 마지막 기자회견에서 윤 열사에게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했다. 전남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한 윤 열사는 들불야학과 ‘민중문화연구소’의 극단 ‘광대’의 책임자였다. 그는 광주항쟁 때 항쟁 지도부를 조직하고, 「투사회보」를 제작해 항쟁의 실상을 알렸다. 마지막까지 도청을 사수하던 그는, 5월 27일 계엄군의 발포에 서른 살의 생을 마감하게 된다.
‘민청학련’사건 관련자였던 박형선의 누이동생 박기순 열사는 전남대 사범대 역사교육과에 1976년 입학했으나, 시국사건으로 무기정학을 당했다. 1978년에는 여대생 최초로 공장에 위장취업해 노동자들의 생존권을 외쳤으며, ‘들불야학’의 창립멤버로 활동했다. ‘들불’이라는 이름은 유현종의 『들불』을 읽고 감동한 그녀가 ‘들불처럼 번져간 동학혁명의 뜻을 기리자’고 제안해 붙여진 것이다.
이들을 ‘영혼 결혼식’으로 묶은 것은 소설가 황석영씨. 황씨는 1981년 여름 광주항쟁을 전국에 알릴 목적으로 문화선동대 ‘일과 놀이’를 조직하고, 그 아래 ‘자유광주의 소리’팀을 구성했다. 이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이 바로 윤상원과 박기순의 영혼 결혼을 주제로 한 소리극 ‘넋풀이’를 카세트 테이프로 녹음하여 전국에 보급한 것이었다. ‘넋풀이’의 녹음은 광주 운암동 산중턱에 있는 황씨의 집에서 이루어졌다. 그는 그날을 이렇게 회상한다.
“보안상 녹음실을 사용할 수도 없어서, 술 먹고 친구들끼리 떠들썩하게 노는 척 하면서 녹음을 했지. 보통 일제 녹음기에 마이크를 꽂고 녹음한 게 원본 테이프야. 거기에는 우리 이웃집 개가 짖는 소리, 열차의 경적 소리까지 들어 있어.”
넋풀이의 마무리를 장식한 곡이 지금의 ‘임을 위한 행진곡’으로, 작사는 황석영씨가, 작곡은 1980년 ‘영랑과 강진’으로 제1회 대학가요제 은상을 차지했던 김종률씨(현 소니 BMG 뮤직 대표이사)가 맡았다.
“녹음날 전에 종률이가 기타로 멜로디를 들려줄 때, 떠오른 것이 백기완 선생이 고문 후유증을 겪으면서 썼다는 시 ‘묏비나리’의 한 구절, ‘산자여 따르라!’였어.” 원제목인 ‘산자여 따르라’는 83년 실제로 치러진 ‘영혼 결혼식’의 동참자들에 의해 ‘임을 위한 행진곡’으로 변경된다.
원곡의 가사는 지금 알려진 것과 조금씩 다르다. 원곡의 가사는 영혼으로 승화한 열사들이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목놓아 부르짖는 내용이었지만, 지금은 남아 있는 ‘우리’들이 주체가 되어 외치는 노래로 개사되었다. 곡 중에 ‘새날이 올때까지 흔들리지 말자’는 원래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라’였으며,‘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는 ‘앞서서 가나니 산자여 따르라’였다. 죽은 이들의 외침이 살아남은 자의 다짐으로 승화한 것이다.
입력 : 2005년 09월 05일 15:57:44 / 수정 : 2005년 09월 07일 20:42:14
출처: http://www.snunews.com/news/read.php?idxno=2736&rsec=S1N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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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X/무대&영화] 2006.02.09. 15:13:46
제3회인 1979년 MBC 대학가요제는 제법 세련된 모양을 갖추게 된다. 예선 참여 인원만 1,500여명이었으니, 본선 참가곡의 수준도 만만치 않았다. 당시 대상 수상곡은 김학래, 임철우의 ‘내가’이다. ‘내가’의 대중적 인기에는 못 미쳤지만, 은상 수상곡 ‘영랑과 강진’의 김종률은 기억해야 할 인물이다. 바로 그가 80년대 학생 운동권에서는 애국가처럼 여겨졌던 ‘임을 위한 행진곡’의 작곡가이기 때문이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제목처럼 행진곡풍이며, 언뜻 군가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비장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것은 근본적으로 진혼가(鎭魂歌)이기 때문이다. 광주항쟁 당시 항쟁 지도부 홍보부장이었던 윤상원 열사와 일생을 노동운동에 헌신했던 박기순 열사의 영혼결혼식에서 불린 노래가 바로 이 노래다. 원래는 백기완 시인의 시였는데, 소설가 황석영이 노랫말로 재구성한 것이다.
‘임을 위한 행진곡’에서 핵심을 이루는 노랫말은 다름 아닌 ‘임’이다. 너무나 익숙해 당연하게 생각하기 쉽지만, 1920년대 만해 한용의 시에서 절정에 이른 시어 ‘임’은 결코 범상한 것일 수 없다. 한용운의 시에서 ‘임’은 ‘부재하는 숭고(崇高)’를 의미하며, 이 노래에 있어서도 크게 보아 다르지 않다. 이 노래에서 ‘임’은 물론 ‘앞서서 나간 이’를 의미하며, 그것은 역사가 만들어낸 숭고이다. 따라서 이 노래는 민중의 일어섬을 선동하는 노래이기 이전에, 현대사가 만들어낸 숭고에 대한 헌시(獻詩)의 일종이다.
이 노래는 이처럼 80년대 광주민중항쟁을 배경으로 한 것인데, 근년에도 화제가 된 적이 있다. 광주항쟁을 기리는 의식에서 불리었다면 특별한 화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청와대 앞마당에서 총선에서 승리한 여당 초선 의원들이 자축하는 의미로 이 노래가 불렸다. 참으로 시대가 많이 변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아니 이 땅의 민주주의가 ‘앞서서 나간 이’들의 피로 이룩된 것임을 확인하는 장면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정치적인 문맥을 떠나서 온전히 노래의 시학 측면에서 볼 때, 꼭 그것이 긍정적인 의미만을 갖는 것은 아니다. ‘임’은 부재하는 숭고일 때 진정한 의미를 갖는 것이지, 현실 속의 그 무엇이 숭고를 대신하기는 힘들다는 점 때문이다. 역사에 몸을 던져 산화한 이들의 넋을 기리는 것의 진정한 의미는 과거를 미화하는 데 있지 않다. 스스로 이룬 성과에 대한 미화는 더더욱 아니다.
‘임을 위한 행진곡’에서는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 없이/한평생 싸우자던 뜨거운 맹세/동지는 간 데 없고 깃발만 나부껴/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고 노래한다.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순결한 영혼이 느껴지는 노래임에 분명하다. 그렇다면 우리의 386 초선 의원들은 청와대에서 이 노래를 부르며 무엇을 맹세했을까? 운동권의 지도부로서 숱하게 불렀을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며 무엇을 떠올렸을까? 혹시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 아닌, 살아남은 자의 기쁨을 노래한 것은 아닐까? 더러는 그런 이들도 없지 않았던 것 같다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 멀리 갈 것도 없다. 대통령이 보수세력과의 연정을 제의했을 때, 깃발을 들고 거부하는 함성이 그리 크게 들려오지 않았던 것이 그 한 증거가 아닐까?
〈하희정|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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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외 아티스트들의 음원이 담긴 CD.카세트.DVD와 디지털 음원 등 한국내 유통과 마케팅을 담당하고 있는 소니 BMG 뮤직 엔터테인먼트 코리아 사장인 김종률(48)씨.
그는 여전히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려 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26돌을 앞두고 인터뷰하기 위해 수차례 전화를 걸었지만 끝내 통화가 이뤄지지 않았다. 여비서는 "사장님이 원래 인터뷰를 잘 안 하신다"고 말했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한 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동지는 간 데 없고 깃발만 나부껴/새 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임을 위한 행진곡'. 1980년대 학생 운동권에서는 애국가처럼 여겨졌고 지금도 각종 집회 현장에서 불려지는 등 현대사를 관통하는 가장 대표적인 운동 가요다. 누구나 한번쯤은 시위 현장이나 농성장에서 목이 쉬도록 부르거나 자신도 모르게 흥얼거리는가 하면 때론 술자리에서 부르며 눈시울을 적시곤 했던 노래다.
이 노래를 작곡한 사람이 바로 김 사장이다.
5.18의 상처가 채 아물지 않았던 81년 김 사장을 비롯한 전남대 노래패 학생들은 광주 북구 운암동(현재 문화예술회관 자리)에 있는 소설가 황석영씨의 집을 드나들며 영혼 결혼식과 이를 다룬 노래극 '넋풀이'를 준비했다.
그리고 82년 2월 망월동 묘역에서, 5.18 당시 항쟁지도부 홍보부장으로서 도청을 마지막까지 지키다 계엄군의 총칼에 숨진 윤상원(당시 전남대 정치외교학과 재학)씨와 79년 노동운동을 하다 숨진 전남대 국사학과 휴학생 박기순씨의 영혼 결혼식이 치러졌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결혼식에 사용된 15곡 가운데 하나로 말미를 장식하는 노래였다. 가사는 소설가 황씨가 통일운동가 백기완씨의 시 '묏비나리-젊은 남녘의 춤꾼에게 띄우는'(80년 12월)을 개작했다.
그리고 곡은 당시 전남대 경영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이었던 김 사장이 붙였다. 그는 1979년 제3회 MBC 대학가요제에서 '영랑과 강진'이란 노래로 은상을 탔을 만큼 음악에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노래패들은 황씨의 집에서 카세트 리코더를 이용해 '임을 위한 행진곡' 등을 테이프에 녹음했다고 한다. 이 테이프가 여기저기서 복제되는 한편 처음엔 운동권 사람들, 나중에는 일반인들의 입을 통해 '임을 위한 행진곡'은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제목처럼 행진곡 풍이며, 군가를 연상시키기도 하지만 비장한 분위기의 진혼가(鎭魂歌)다. 이 노래가 대학가는 물론 노동현장 등으로 들불처럼 빠른 속도로 퍼진 데는 노랫말뿐 아니라 곡조도 한몫했다. 음악평론가들은 "딱딱 끊어지는 멜로디와 절절한 비장함, 단조의 슬픔과 군가의 박진감이 어우러져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게 했던 것"이라고 설명한다.
'임을 위한 행진곡'과 더불어 80년 5월 광주를 대표하는 또 한 곡의 노래는 '5월의 노래'다.
'꽃잎처럼 금남로에 뿌려진 너의 붉은 피/두부처럼 잘리워진 어여쁜 너의 젖가슴 /(후렴) 5월 그날이 다시오면 우리 가슴에 붉은피 솟네'//왜 쏘았지 왜 찔렀지 트럭에 싣고 어디 갔지/망월동에 부릅뜬 눈 수천의 핏발 서려 있네(2절)//산자들아 동지들아 모여서 함께 나가자/욕된 역사 고통없이 어떻게 깨치고 나가리(3절)// 대머리야 쪽바리야 양키놈 솟은 콧대야/물러가라 우리 역사 우리가 보듬고 나간다(4절)'
5월의 비극을 매우 직설적으로 고발한 이 노래는 프랑스의 샹송 가수 미셀 폴나레프의 노래 '어느 할머니의 죽음(Qui A Tue Grand Maman)'을 번안한 것이다. 그러나 이 노래의 작사가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5.18 기념재단 관계자는 "1980년대만 해도 운동 가요를 작곡하거나 작사한 것만으로도 공안당국으로부터 갖은 핍박을 받을 수 있어 작곡가나 작사가들이 자신을 드러내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해석 기자 [lhsaa@joongang.co.kr]
2006.05.18 11:10 입력 / 2006.05.18 14:01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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