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고2 때, 학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었다. 소위 '가리방' 긁는 일.
정규 수업시간이 다 끝난 후, 저녁을 먹곤 보충수업을 받는 시간에는 보통 참고서를 추가로 구입해 쓰는 경우도 있었지만, 선생님들이 문제지를 만들어 나누어 주고서 풀어주시곤 했다.
집안 형편상 선생님들의 배려로 그 시험지 원고를 만드는 일을 했다. 가리방을 좀 해본 경험은 있던 터라 선생님께서 주신 일을 할 수 있었다. 쇠를 갈아내는 쇠줄마냥 가로세로로 촘촘히 홈을 파낸 철판 위에 왁스를 입힌 등사원지를 놓고 철필鐵筆로 글씨를 써서 등사판으로 문제지를 찍어내던 시절이었다. 시험 문제지를 다 만들어서 등사실에 갖다 주면 문제지를 밀어주셨다. 등사원지를 대고 잉크 먹인 로울러로 밀어 글씨를 찍어내는 일이기 때문에 보통 '민다'는 표현을 썼다.
어쨌든 그 일을 하면서 한 달에 3천원인가를 받았다. 당시 등록금이 2만 몇 천원 정도인지 할 때였으니까, 그 돈도 작은 돈이 아니었다.
그 첫 월급을 타고나서 난 마음이 붕 떴었다.
생전 처음 타보는 월급. 내가 일해서 번 첫 수입이었다. 어머니께서는 네가 번 돈이니 네가 써라 라고 이미 허락을 해 주신 터이니 그건 완전히 내돈이었다.
'이걸로 뭘할까..'
생각해 낸 것이 아버님께 담배를 사드리자는 것.
당시 아버님은 중풍이 세 번 째 재발하여 일도 못하시고 집에만 계실 때였다. 당시 형편이 형편이다 보니 아버님께서 피시던 담배는 제일 싼 '새마을'. 그것도 필터 없는 새마을이었다. 필터달린 새마을은 조금 더 비쌌다. 난 한껏 호기를 부린다는 마음으로 필터 없는 새마을을 한 보루 샀다.
당시 난 담배를 모르던 시절이라, 아버님께선 그 담배를 좋아하셔서 그걸 피우시는 줄 알았다.
내가 갖다 드린 담배 한 보루를 받으신 아버님께선 빙그레 웃기만 하실 뿐. 그 당시 아버님께선 중풍으로 아무 말도 못하시고, 뭐라고 하면 그냥 웃으시기만 했다. 그것이 당신께서 하실 수 있는 유일한 의사표현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당신의 말년 몇 년간을 의사표현도 못하시고 어찌보면 침묵의 시간을 사셨던 셈이다. 얼마나 답답하셨을까.
필터 없는 새마을 담배.
나중에 내가 담배를 배우고 나서 보니 그 때 왜 필터 있는 것을 사드리지 못했을까 좀 더 좋은 담배를 사드리지 못했을까 후회만 될 뿐. 조홍시가早紅枾歌에 나오듯이 이제는 품어가도 반길 이 안계시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