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커스]정계비 건립 당시 석퇴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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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메이커 623호 |
일본군·학자 추정 탐험대 1942년 촬영
석퇴는 정계비가 건립될 당시 청의 대표인 목극등이 물줄기 사이의 불분명한 경계를 분명히 하자고 요구하자 정계비와 토문강 사이에 놓은 것이다.
당시에는 석퇴와 함께 토퇴(흙무더기), 목책(나무울타리)으로 경계를 만들었지만 200여년이 흐르면서 석퇴만 남은 것으로 추정돼왔다.
역사서에서처럼 석퇴가 두만강이 아닌 토문강으로 연결돼 있다면 송화강 동쪽의 간도지역이 조선땅임을 입증하는 구체적인 역사적 증거가 된다.
간도특별기획취재팀은 위성사진(611호·2005년 2월 15일 발간)을 통해 백두산 동남쪽 지역에서 이 돌무더기가 1.5㎞에 달하는 띠를 형성하며
압록강과 토문강 상류를 연결하고 있음을 추정 확인한 바 있다. 다음 석퇴 4~5m 떨어져 연결 1943년 사진에는 ‘정계석 사진’처럼 역시 석퇴가 연결된 것이 보인다. ‘정계비의 고원’이라는 제목이 붙은 이 사진에는 자세한 설명이 붙어 있어 흥미롭다. 백두산 정계비를 따라 북동-남서의 선에 50∼100m의 불규칙한 간격으로 석퇴가 있다는 것이다. 이 선이 조선과 청의 경계라는 주장이 있다는 내용도 있다. 백두산을 뒤로 하고 동쪽을 향해 촬영한 것으로 정계석의 오른쪽은 조선이고 왼쪽은 청국령이라는 자세한 설명까지 담겨 있다. 1934년과 1939년 2회에 걸쳐 이곳을 직접 답사한 김득황박사(간도연구가)는 “사진 속에처럼 석퇴가 다음 석퇴와 4∼5m 떨어져 연결됐다”면서 “끊긴 부분도 있는데 50∼100m는 아니고 40∼50m였다”고 말했다. 김박사는 “석퇴 외에도 석퇴 사이를 연결한 흙무더기도 일부 있었다”고 덧붙였다. 이번에 공개된 석퇴 사진의 사진집에는 중요한 지도가 눈길을 끈다. 일본군과 탐사대가 지나간 길을 표시한 ‘백두산등행로개념도’에 정계비가 표시돼 있다. 1931년 정계비가 없어졌지만 탐사대가 등반한 1940년초에는 표식과 주춧돌이 남아 있었다. 이 등행로에는 길이 표시돼 있다. 일반 지도에서는 당시 등산로를 표기해놓지 않았다. 백두산의 동쪽인 신무성에서 백두산으로 가는 길이 있으며, 남쪽에서 압록강 물줄기를 따라 북으로 향하는 길이 보인다. 두 길이 만나는 지점 위에 정계비가 있다. 정계비 위쪽에 점선으로 그린 부분이 송화강의 지류다. 마른 하천임을 점선으로 표현한 것으로 짐작된다. 아래 점선이 석퇴가 연결된 토문강이다. 취재팀은 본지 615호(2005년 3월 15일)에서 위성사진과 북한주민의 기행문, KBS다큐멘터리를 종합해 두 길이 합쳐지는 지점 위에 주차장이 있으며 주차장 한켠에 있는 북한군 초소 뒤편에 정계비터가 있다고 추정했다. ‘등행로’의 표시도 이 추정과 거의 비슷하게 일치하고 있다. 일본군 등행로에도 정계비 표시 취재팀이 간도학회를 통해 따로 입수한 일본 자료(출처 불명)에 의하면 백두산 정계비는 ‘백두산정의 동남쪽 아래 북위 42도6분, 동경 128도 9분, 해발 2200m 지점에 있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학박사 화전웅치(和田雄治)가 1913년 기록한 정계비의 좌표는 하지만 사실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 나타났다. 기록된 좌표는 정계비가 위치한 백두산 동남쪽 지역이 아니었다. 위성사진전문업체인 위아(주)의 위성사진판독팀은 “실제로 북한군 초소 근처에 정계비가 있다면 위성사진 속에서 대략적인 좌표는 북위 41도59분, 동경 128도5분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 윤호우기자 hou@kyunghyang.com> |
* 출처 : http://newsmaker.khan.co.kr/khnm.html?mode=view&sec_id=115&art_id=96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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