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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땅 간도

백두산 정계비, 일제 만주점령뒤에 사라져

by 아름다운비행 2005. 8. 27.

백두산 정계비, 일제 만주점령뒤에 사라져

입력: 2005년 02월 16일 17:20:57

청의 강희제는 조선의 심마니들이 백두산을 드나들면서 살인행위를 한다는 보고를 받고 “압록강과 토문강 일대는 우리나라 지방에 속한다. 그러나 길이 멀어서 아직 경계를 분명히 정하지 못했다”고 말하고 국경을 확정지으라고 지시했다.

 

그리하여 1712년 목극등 총관이 조선 조정에 국경선 실측을 제의해왔다. 조선에서는 예조참판인 박권을 접반사(接伴使)로 삼고 함경감사 이선부와 현지의 수령, 군관 등을 동행케 했다.

 

두 나라 대표는 실측을 위해 혜산진에서 백두산 정상을 향해 올라갔다. 이때 박권과 이선부는 힘이 부쳐 가지 못했고, 군관과 통역관만 백두산에 올랐다. 목극등은 천지의 남쪽 비탈에 이르러 경계를 표시할 지점을 지정했다. 일방적인 결정이었다. 하지만 목극등은 비에 두 대표 이름을 새겨야 하는 형식요건이 필요했다. 목극등은 무산으로 내려와 박권과 상의한 끝에, 두 강의 상류에 목책과 흙, 돌을 쌓아 경계를 표시하자고 합의했다. 그 경비는 청에서 부담하고 작업은 우리 쪽에서 맡기로 했다.  

 

정계비를 설치한 곳은 함경북도 무산군 삼장면으로 해발 2,200m 지점이다. 백두산 정상에서 남쪽으로 4㎞쯤 내려온 곳이다. 그 비문은 “오랄총관 목극등이 황제의 지시를 받들어 변경을 조사하려 여기에 이르러 살펴보니 서쪽으로 흐르는 물은 압록강이 되고 동쪽으로 흐르는 물은 토문강이 되기에 분수령 위에 돌을 새겨 기록해 둔다”이다. 그런데 끝에 박권의 이름은 빠지고 대신 군관과 통역관의 이름만이 병기되었다. 

 

문제의 발단은 토문강에 있었다. 백두산 천지에서 발원한 갈래는 송화강 상류인 이도강으로 합류하는데 이를 청나라 사람들은 토문강이라 부른다. 토문강을 경계로 할 경우 바로 토문강 남쪽에 해당하는 북간도 일대는 우리 영토가 되는 것이다. 또 정계비 서쪽에 있는 임강을 발원지로 삼는다면 압록강 건너편인 통화, 환인, 봉성 등 서간도 일대도 포함된다.  

 

아무튼 북평사인 홍치중이 공사를 지휘하여 토문강 상류 곳곳에 목책을 설치하기도 하고, 돌각담을 쌓기도 하고, 흙둑을 설치하기도 했다. 그런데 목극등은 토문강을 두만강으로 착각했던 모양이다. 이 경계 표시로 목극등은 처벌을 받았다. 하지만 현지인들은 토문강과 두만강을 구분해 불렀으며 바로 토문강을 두 나라 경계로 여겼던 것이다. 한편 청나라 사람들은 두만강을 도문강(圖們江)이라 불렀다.   

 

조선이 식민지가 된 뒤 정계비는 방치되었다. 남쪽에서 백두산을 등반하는 사람들이 둘러보는 정도였다. 1931년 일제가 만주를 점령한 뒤 정계비는 사라졌다. 누가 없앴는지 미궁에 빠져 있다. 일제는 만주를 차지한 뒤 굳이 조선과 만주의 경계 표시가 필요치 않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사진과 기록은 엄연히 남아 있어 역사적 자료가 되고 있다.

 

최종 편집: 2005년 02월 16일 17:57:21

 

* 출처 : http://www.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502161720571&code=2100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