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 정계비 터 위치 첫 확인 | ||||
입력: 2005년 08월 03일 17:42:42 | ||||
1712년 조선과 청나라가 국경을 구분하기 위해 세운 백두산정계비 터의 구체적 위치가 확인됐다. 북한의 고구려 유적을 조사하기 위해 지난 7월 19~30일 방북한 고구려연구재단(이사장 김정배) 조사단은 백두산 동남쪽 4㎞ 지점 천지 등정길에 위치한 산록에서 북한이 세운 백두산정계비 표석을 촬영, 3일 공개했다. 백두산 정계비 터를 남측 학자들이 직접 확인한 것은 해방 후 처음이다.
조사단이 찍어온 사진 자료에 의하면 백두산 병사봉(북한명 장군봉)과 대연지봉 사이 중간지점에 위치한 백두산 정계비 자리는 북한 당국이 1980년 세워둔 흰색 표석(높이 45㎝, 폭 25㎝의 사각기둥 형태)과 정계비를 받치던 받침돌만 남아 있었다. 표석이 위치한 곳은 행정구역상 양강도 삼지연군 신무성 노동자구로, 백두산 아래 주차장 인근의 군초소 뒤편이다.
백두산정계비는 조선 숙종 38년(1712년) 백두산에 세운 조선과 청나라 사이의 경계비로 기록상으로 1931년 7월28일까지 존재가 확인되고 있으나 이후에 사라졌다. 만주사변 당시 일제가 철거했다는 등 설이 분분하다.
김이사장은 “표석은 아무 글자가 새겨져 있지 않은 무자비(無字碑)였다”면서 “북한이 중국과의 외교 갈등을 염려해 백두산정계비 터임을 밝히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또 북한의 중국어판 관광지도에도 정계비 터는 ‘정계비’가 아닌 ‘백두산사적비’로 나와있다고 덧붙였다.
재단의 배성준 연구위원은 “지도상으로 정계비의 위치는 대략 알려져 왔으나 이번 조사는 송화강의 지류인 토문강과 압록강 사이의 분수령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직접 확인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한편 고구려연구재단은 방북기간 중 덕흥리고분, 강서3묘, 수산리고분 등 평양과 황해도 일대의 고구려 고분들을 실측하고 벽화를 촬영하는 데 성공했다. 또 대성산성·안악궁 등 평양성 일대의 고구려 유적을 조사, 대성산성의 남문터·현무문·동암성 등 옛터를 확인했다.
최광식 재단 상임이사는 “일부 고분은 훼손된 흔적이 있었으나 안악 3호분 등 대부분은 보존상태가 양호해 벽화의 색상 등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면서 “고분 벽화 내 설치된 유리벽 안에 들어가 촬영, 벽화의 현재상황을 세밀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재단 측은 또 이번에 강서소묘의 고분 구조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연도에서 널방에 이르는 계단이 없고 관대도 없다는 사실을 새로 확인했다. 지금까지 강서소묘는 일제시기 작성된 실측도면을 근거로 강서대묘의 구조와 같은 것으로 알려져 모든 자료에서 잘못된 도면을 표기해왔다.
김정배 이사장은 이번 남북공동 조사에 대해 “북한 학자들과 함께 숙식하는 등 신뢰를 쌓으며 많은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면서 “이번 조사를 기반으로 앞으로 남북 학계가 교류하며 좋은 연구사업들을 같이 추진할 수 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고구려연구재단은 이번 학술조사를 토대로 향후 보고서를 내는 한편 남북공동학술토론회도 추진할 계획이다.
〈조운찬기자 sidol@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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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편집: 2005년 08월 03일 17:45:26
출처: http://www.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508031742421&code=96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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