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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에조 보고서 全文 / 인터넷 월간중앙

by 아름다운비행 2005. 8. 13.

 

[현대사 俗說과 眞實(2)- 에이조의 편지 전문] “차마 쓸 수 없다. 몹시 잔혹한 방법으로 살해했기에”

 

한국정부 고문이던 이시즈카 에이조(石塚英藏)가 스에마쓰(末松) 법제국장 앞으로 보낸 사건 진상을 보고한 서간

 

안녕하십니까? 이 땅(當地)에서 어제 아침에 일어난 사건에 대하여는 벌써 대략 아시겠지요? 왕비 배제(排除) 건은 시기를 보고 결행하자는 것은 모두 품고 있었던 것이지만 만일 잘못하면 바로 외국의 동정을 일으키고 영원히 제국(諸國)에 점(占)할 일본의 지보(地步)를 망실함이 필연한 것이므로 깊이 경거망동하지 말 것은 새삼스럽게 말할 필요도 없는 일입니다.

이번 사건에 대해 저는 먼저부터 모의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습니다만, 오히려 어렴풋이 그 계획을 조선인에게 전해 들어 조금씩 알게 된 바에 의하면 국외자로서 그 모의에 참여해 심지어 낭인들이 병대(兵隊)의 선봉 역할을 했다는 사실이 있습니다.

그 방법은 경솔천만(輕率千万)으로 거의 장난(兒戱)에 속한다고 사려되는데 다행히 그 가장 꺼림칙한 사항은 외국인은 물론 조선인에게도 서로 알려지지 않은 모양입니다. 현 공사에 대해서는 조금 예의가 없는 느낌이나 일단 사실의 대요(大要)를 보고드리는 것이 직무상의 책임일까 생각해 아래와 같이 간단히 말씀드리는 바입니다.

1.발단

왕비 배제의 필요에 대해서는 미우라(三浦) 공사도 벌써부터 깊이 느끼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오늘 이것을 결행한 이유는 ‘위급한 경우 러시아(露西亞)에 원병을 요청한다는 약속’ 및 ‘훈련대 해산의 계획’을 궁내부에서 세웠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훈련대를 이용한 것입니다.)

2.명의

훈련대 해산, 병기 몰수의 내의(內議)를 듣자 부득이 대원군을 앞세워 대내에 애소(哀訴)하고자 해서 시위대에서 충돌하게 되었습니다. 왕성의 수비병은 이것을 진정시키기 위해 4문의 경비에 종사했다고 말합니다.

3.모의자

추찰(推察)하오나 오카모토(岡本)가 주모자인 것 같습니다. 대원군의 입궐을 알선(斡旋)한 것은 바로 동인입니다. 그 이외에 시바(柴), 크스세(楠瀨), 스기무라(杉村)가 밀의에 참여했다고 합니다. 기타는 적어도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수비대장 마오하라(馬屋原) 같은 사람은 명령으로 실행의 임(任)에 충당된 것 같습니다.

4.실행자

이 막된 짓의 실행자는 훈련대 외에 수비병의 후원이 있었습니다(후원은 혹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다만 수비병 외에 일본인 20명쯤이 있었습니다. 구마모토(熊本) ?출신자가 다수를 점하며(漢城新報社 迹) 그들 중 신문기자 몇 명 또한 의사·상인도 있었습니다. 따라서 양장·화장(和裝)이 서로 섞여 있었습니다.

오카모토는 대원군과 동시에 입성해 실행의 임무를 맡았습니다. 수비대의 장교와 병졸은 4문의 경위(四門警衛)에 그치지 않고 대문 안으로 침입했습니다. 특히 낭인들(野次馬達)은 깊이 안으로 들어가 왕비를 끌어내고 두세 군데 칼질을 저질러(刃傷을 입히고 나서) 나체로 하고 국부검사(可笑又可怒, 웃기고 또한 화가 치민다)를 하고 마지막으로 기름을 뿌려 소실했다든가 참으로(誠히) 이것을 쓰기 염려가 됩니다. 차마 쓸 수 없습니다. 기타 궁내대신은 몹시 잔혹한 방법으로 살해했다고 합니다.

위는 사관도 도와주기는 했지만 주로 병사 외 일본인들이 저지른 짓인 것 같습니다. 대략 세 시간여를 소비하여 위 막된 짓을 저지른 후 위 일본인들은 단총 또는 도검을 손에 쥐고 서서히 광화문(왕성 정문)을 나가 군중 가운데를 뚫고 나갔습니다. 그때가 벌써 여덟 시가 지났고 왕성 앞 대로(광소로)는 사람으로 충새(充塞)했습니다.

5. 외국사신

미·러 두 공사는 궁궐 내에서도 대원군 및 미우라 공사를 향하여 빈번히 질문해 다시 동일 오후에는 각국 사신들이 더불어 일본공사관에 와서 하나하나 증거를 들고 힐문하다, 밤이 되어 각각 귀관했습니다. 미우라 공사는 변해(弁解)를 아주 노력하여 결국 서로 쌍방이 이치만 따져 끝이 안 나는 논쟁이 있었지만 저(當方)는 너무나 아픔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불행하게도 어떤 미국인(米人)이 현장을 목격하고 있었다 하니 보통 일반 조선인의 증언처럼 일방적으로 말살해버릴 수도 없지만, 미우라 공사의 변명(辨解) 역시 아주 잘한 것 같습니다. (공사의 담화에 의하면) 또한 대원군을 비롯한 각 대신들은 굳게 약조해 일본에 불리하지 않게 답변했습니다. 그렇지만 드디어 국제문제화를 막을 수 없을 것입니다.

6.영향

만일 이 땅(當地)에서 외국 사신들 사이의 담화로 마무리되어 국제 문제가 안되더라도 그 요동 문제에는 곧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공사는 국난일 경우에는 면관되며 공사의 사임은 아마 잘 국제 분의(분의)를 풀 것입니다. 요컨대 왕비가 종래 개혁의 방해인 사실은 저도 이것을 밤낮으로 분개하고 있었던 것인 만큼 그 단연한 처분을 기뻐함과 동시에 그 방법이 적당하지 않았음을 깊이 아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공사는 위의 낭인들에 대해서는 표면상 각자 처분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도 제외국의 곤난을 배제할 수 있을지 없을지 의문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물론 이런 막된 짓인 만큼 다소 ‘실수’를 하는 것은 면할 수 없다 하더라도 이번 일은 너무나도 ‘실수’ 많지 않았을까 합니다. 위는 앞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미우라 공사에 대하여는 아주 불신실(不信實)의 극(劇)이겠지만 직무상의 의무에 쫓겨 부득이 보고드리는 바이니 부디 잘 봐 주십시오.

10월9일 에이조(英藏)
스에마쓰(末松)

 

 

*서간용 두루 마리(卷紙)에 먹으로 씀(墨書)(명치 28년10월9일부)
(이등백작가문서 조선왕비사건 관계자료)

 

2004년 12월호 | 입력날짜 2004.11.19

 

 

* 출처 : http://monthly2.joins.com/monthly/article/mj_article_view/0,5459,aid%252D217220%252Dservcode%252D9500500,0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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