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황후에 대하여 우선 백과사전에 의해 간략히 알아 본 후 좀 더 자세한 것은 아래에 기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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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고종의 황후로서 본관은 여흥(驪興)이며 성은 민씨(閔氏)이다. 여주(驪州) 출생으로 증(贈) 영의정 치록(致祿)의 외동딸이다. 9세 때 고아가 되어 본가에서 가난하게 자라다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부인 부대부인(府大夫人) 민씨의 추천으로 왕비에 간택 ·책봉되었다. 그러나 금실이 좋지 못했고, 더구나 궁인 이씨에게서 완화군(完和君)이 출생하자 이를 기뻐하는 흥선대원군에 대한 불만과 질투가 폭발하여 흥선대원군 반대파를 규합, 민씨 척족을 정부 요직에 앉히고 세력 기반을 착실히 다져 나갔다.
점차 고종의 애정도 독점하여, 1871년 원자(元子)를 낳았으나 5일 만에 죽자, 흥선대원군이 진상한 산삼(山蔘) 때문이라고 단정, 더욱 증오심에 불탔다. 1873년 일본에 정한론(征韓論)이 대두되어 내외정세가 긴박해지고, 경복궁(景福宮) 중건으로 민생고(民生苦)가 가중되는 등 흥선대원군의 실정(失政)이 계속되자, 그를 탄핵하기 위해 유림(儒林)의 거두 최익현(崔益鉉)을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하였다.
사실 명성황후의 배후에는 민승호 등 여흥민씨 삼방파(三房派) 세력을 비롯해 조대비(趙大妃)를 중심으로 한 풍양조씨(豊壤趙氏) 세력, 대원군에게 무시된 대원군 문중 내부의 세력, 그리고 대원군 정책에 반대하는 유림세력 등 노론을 중심으로 하는 반(反)대원군 세력이 있었다. 이들은 대원군이 당쟁을 근절한다는 명분 아래 등용한 남인 중심의 세력과 정치적 갈등을 빚고 있었다. 이어 흥선대원군파의 반대 상소와 모든 주장을 배척하고, 고종에게 친정(親政)을 선포하게 하여 민씨의 외척정권이 수립되었다. 결국 대원군파를 숙청하고 쇄국정책을 폐하여 일본과 수교하였다.
먼저 개화사상가인 박규수(朴珪壽)를 우의정에 등용하고, 대원군 집권 당시 쇄국정책을 담당했던 동래부사 정현덕(鄭顯德)과 부산훈도 안동준(安東晙), 경상도관찰사 김세호(金世鎬)를 차례로 파면·유배했다. 개화를 위해서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고, 삼군부(三軍府)를 폐지했으며, 신사유람단과 영선사를 일본과 청에 파견하여 신식무기·공업 등을 학습하도록 하는 정책을 시행했다. 〈조선책략〉의 연미론(聯美論)이 유포되자 1881년 김윤식이 영선사로 청에 갈 때 밀명을 내려 청에 한미수교를 주선해 줄 것을 요청했고, 또한 개화승 이동인(李東仁)을 일본에 보내어 주일청국공사 하여장(何如璋)에게 대미수교의 주선을 요청하기도 했다.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으로 신변이 위태롭게 되자 궁궐을 탈출, 화개동(花開洞) 윤태준(尹泰駿) 집을 거쳐 충주(忠州) ·장호원(長湖院)으로 전전하며 충주목사 민응식(閔應植 ; 1844~?)의 집에서 피신생활을 하던 중 흥선대원군에 의해 중전의 국상(國喪)이 선포되나, 윤태준을 고종에게 밀파하여 자신의 건재함을 알리고 청나라에 지원을 요청하게 하였다. 결국 청의 텐진에 가있던 영선사 김윤식(金允植)을 통하여 청나라 군대의 출동으로 군란이 진압되자 흥선대원군을 청나라로 납치해 가도록 공작하고, 민씨정권을 재수립하였다. 점차 정권을 농단하여 대원군파에 대한 복수에 열중하고, 무당을 궁궐에 끌어들여 굿을 하며 명산대천을 찾아 치성한다는 명목으로 국고를 탕진하는 등, 민씨 일족의 부패상은 극도에 달하였다. 18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으로 민씨 일족이 실각하자 심상훈(沈相薰) 등을 사주(使嗾), 청나라의 개입으로 개화당(開化黨) 정권을 무너뜨렸다.
그러나 일본세력의 침투로 김홍집(金弘集) 등의 친일(親日) 내각이 득세하고, 1894년 흥선대원군의 재등장으로 갑오경장(甲午更張)이 시작되자, 이번에는 러시아에 접근하여 일본세력을 추방하려고 하였다. 이에 일본 공사(公使) 미우라고로[三浦梧樓]가 을미사변(乙未事變)을 일으켜, 8월 2일 일본 깡패를 궁중에 침입시켜서 건청궁(乾淸宮)에서 그녀를 난자시해(亂刺弑害)하고 시신은 궁궐 밖으로 운반 소각하였다. 그 뒤 그녀는 폐위되어 서인(庶人)이 되었다.
즉, 미우라고로[三浦梧樓]는 일본인 아다치[安達謙藏]가 경영하는 한성신보사(漢城新報社)의 수십 명의 일인 낭인, 일본 수비대와 거류지 담당 경찰관들을 하수인으로 고용하고, 훈련대 간부 우범선(禹範善)·이두황(李斗璜)·이진호(李軫鎬) 등 친일파들도 포섭했다. 훈련대의 해산으로 다급해진 미우라 등은 민비제거 예정일이었던 8월 22일을 앞당겨 8월 20일 새벽에 행동을 개시했다.
일인들은 우선 대원군에게 가서 고유문(告諭文)을 결재받고, 서대문에서 훈련대 병사들과 합류하여 광화문에 도착했다. 여기서 폭도들은 훈련대연대장 홍계훈(洪啓薰)을 죽이고, 왕궁을 호위하던 다이 지휘하의 시위대들과 교전하여 패배시켰다. 폭도들은 고종과 민비의 침소인 건청궁(乾淸宮)에 난입하여 고종에게 미리 준비한 왕비의 폐출조서(廢黜詔書)에 서명을 강요하며 위협했다. 그러나 고종이 이를 거부하자 왕세자에게 칼을 휘두르는 등 극악한 만행을 저질렀다. 이어 궁내부대신 이경직(李景稙)을 살해한 뒤, 옥호루(玉壺樓)에서 민비를 무참하게 학살했을 뿐만 아니라 증거를 없애기 위해 시신을 화장하는 야만적 행동을 저질렀다.
이후 대원군을 고종과 대면시켜 미리 준비한 조칙 3개안을 재가할 것을 강요했다. 그리고 왕비학살을 일본인들이 하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한 위장처리방안을 세웠는데 그 내용은 "이번 사건은 훈련대와 대원군이 결탁하여 행한 쿠데타이며, 일본군은 고종의 요청에 의해 출동하여 훈련대와 시위대의 싸움을 진압했고, 민비시해는 아는 바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친일적인 김홍집 내각을 세운 다음, 8월 22일 민비의 폐위조칙을 위장 발표했다. 그러나 고종, 러시아인 사바틴, 미국인 다이 등 목격자가 많아 사건의 은폐에 실패했다. 만행을 목격한 외국인들은 외교관들에게 사건의 진상을 폭로했고, 이에 미국공사대리 앨런과 러시아 공사 베베르는 각각 군병들을 동원하여 시위를 하는 한편, 각국 공사의 회합 후 일본의 관여사실과 폐위 조치 불인정 등을 발표했다.
1895년 10월 복호(復號)되고, 1897년(광무 1) 명성이라는 시호가 내려지고, 그해 11월 국장(國葬)으로 청량리(淸凉里) 밖 홍릉(洪陵)에 장사지냈다. 원래는 경기도 양주 숙릉(肅陵)에 묻혔는데, 1897년 11월 청량리 홍릉(洪陵)으로 이장되었다. 1919년 고종이 죽은 뒤 다시 양주군 미금면 금곡리 홍릉으로 이장되었다.
<두산대백과사전>참고
<브리태니커백과사전>참고
* 출처: http://www.mtcha.com.ne.kr/koreaman/sosun/man57-myungsungwonghu.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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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오래 전 다운받아 정리해 놓은 글인데, 출처는 기록해 놓지 않아 알 수가 없군요.
역사 속의 명성왕후
Ⅰ. 명성황후
Ⅳ. 명성황후 시해 당시 관련 증언들
Ⅱ. 명성황후의 시대적 배경 Ⅴ. 명성황후 관련
사진
1.명성황후의
시대적 배경
2.대원군의
正史
Ⅶ. 명성황후 주변 인물들에 대하여
3.양요
4.조일수호조약
5.조선책략
Ⅲ. 을미사변
Ⅰ. 명 성 황 후
명성황후는 대한제국 고종황제의 황후로 본관은 여흥,이며, 증영의정 민치록의 외동딸. 고종은 12세의 나이로 즉위하였으나 국정을 치르기엔 나이가 어려서 고종의 생부인 흥선대원군이 섭정을 하게 되고 정치 실권을 잡게 되었다. 1866년(고종 3년) 16세에 왕비로 간택되었는데 이때 고종은 15세였다.
1882년 (고종 17년) 임오군란으로 신병이 위험에 처하기도 하였으나 청의 힘을 빌어 대원군을 밀어내고 민씨정권을 수립하였으나 1894년 대원군이 재등장하면서 갑오경장이 시작되어 친일파가 정권을 잡게 되자 러시아에 접근하여 일본세력의 추방을 기도하였다.
이듬해인 1895년 일본공사 미우라가 부임했으나 계속 이들을 견제하며 친러정책을 강화하자 일본인 낭인들이 8월 20일 궁궐을 침범하였고,
그 가운데 아다찌가 거느린 선봉부대의 흉인들에게 건청궁에서 난자당해 죽은 후 운반되어 소각되었다. 죽은 뒤 폐위되어 서인이 되었다가 10월
복호되고 1897년 (광무 1년) 명성이란 시호가 내려졌으며, 이 해 11월국장이 거행되었다. 능은 양주의 홍릉이다. 명성황후는 1874년
(고종 11년)에 왕자를 낳아 2년 후에 태자로 책봉되었는데 그가 바로 순종이다.
* 이 기사는 뮤지컬 전문 프러덕션
(주)에이콤인터내셔날에서 협조해 주셨습니다.
Ⅱ. 명성황후의 시대적 배경
| 명성황후의 시대적 배경 | 대원군의 正史 | 양요 | 조일수호조약 | 조선책략 |
1. [명성황후의 시대적 배경]
고종(1852년 - 1919년, 재위기간 1863년 12월 - 1907년 7월까지 약 43년 7개월) 안동 김씨의 60년 세도 정치는 왕권을 극도로 약화시켰으며, 그것은 곧 사회의 혼란과 불안으로 이어졌다. 게다가 일본과 서구 열강이 점차 조선을 압박해오고 있었다.
고종은 이 같은 어려운 시기에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라 몰락해가는 왕조와 풍전등화와 같은 국가를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지만 수난과 고통 속에 외세에 의해 강제로 퇴위당하고 만다. 조선의 마지막 국왕으로서 34년(1863-1897), 대한제국의 황제로서 10년(1897-1907), 통산 44년간 군주의 자리에 있었다. 고종은 1852년 남연군의 아들 흥선군 이하응과 여흥부대부인 민씨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아명은 [명복], 자는 성임이다. 이후 헌종의 모후 조대비에 의해 익성군에 봉해지고 1863년 12월 조선 제26대 왕으로 등극했다. 이때 그의 나이 12세였다.
고종이 왕위에 오를 당시 조정은 안동 김씨의 손아귀에 있었다. 그들은 순조 이후 반세기 이상을 계속해서 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상태였는데, 헌종의 어머니이자 효명세자(익종)의 부인인 신정왕후 조씨는 이 같은 권력 구도를 깨뜨리기 위해 남연군의 아들 이하응(자는 시백, 호는 석파)과 결탁하여 그의 아들 명복을 왕위에 앉히게 된다.
둘째 아들 명복을 즉위시키기 위한 이하응의 계략은 치밀했다. 안동 김씨 세력의 경계에서 벗어나기 위해 건달들과 어울려 지내는가 하면, 안동 김씨 가문을 찾아다니며 구걸을 하기도 했다. 이 같은 호신책 덕분으로 목숨을 부지한 그는 철종의 죽음이 임박하자 익종비 조대비와 연줄을 맺어 자신의 둘째 아들 명복을 왕위에 앉히려 한다. 조대비 역시 그와 마찬가지로 안동 김씨의 세도에 짓눌려 지내던 처지였기에 이하응과 뜻을 같이하게 된다.
2.[대원군의 正史]
1863년 12월 철종이 죽자 조대비는 이하응의 둘째아들 명복을 양자로 삼아 익종의 뒤를 잇게 하고, 자신이 수렴청정을 하였다. 그리고 흥선군 이하응을 흥선대원군으로 봉하고 섭정의 대권을 그에게 위임시켰다.
이로써 고종을 대신한 흥선대원군은 향후 10년 동안 권력을 쥐고 자신의 의지대로 정사를 운영하게 된다. 세간에서는 출세한 이후의 그를 '대원위대감'이라 불렀고, 오늘날에는 흥선대원군이라 한다. 한창 때 '대원위대감의 분부'라 하면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고 하였고, 그의 호령 한마디에 '조선 팔도 산천초목이 떤다'고 하였다.
흥선군에는 재주가 한 가지 있었는데 바로 난초를 치는 솜씨가 빼어났다는 것이다. 그 난화를 그의 호를 딴 [석파란]이라 부른다. 석파란은 운미(민영익)의 난과 함께 그 시대 난화의 쌍벽을 이룬다.
섭정의 대권을 위임받은 흥선대원군은 가장 먼저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를 분쇄하여 쇠락한 왕권을 되찾고 조선을 압박해오는 외세에 대적하기 위한 과감한 개혁 정책을 추진한다. 그는 우선 당색과 문벌을 초월하여 인재를 고루 등용하고 당쟁의 근거지가 된 서원을 철폐하는 한편, 토색을 일삼아 주구로 전락한 탐관오리들을 처벌하고 양반과 토호의 면세 전결을 철저히 조사하여 국가 재정을 충당했다.
이밖에 민간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무명잡세를 없애고, 궁중에 특산물을 바치는 진상제도를 폐지했으며, 은광산을 개발하는 것을 허용하여 경제에 도움이 되도록 했다. 또한 사회의 악습을 개선하고 복식을 간소화했으며, 군포세를 호포세로 변경하여 양반도 세금을 부담하도록 했다. 한편 [대전회통], [육전조례], [양전편고] 등의 법전을 편찬하여 법질서를 확립시켰고 비변사를 폐지하고 의정부를 부활시켜 삼군부를 두어 군국기무를 맡게 함으로써 정무와 군무를 분리시켰다.
흥선대원군은 이처럼 민심을 수습하고 국가 재정을 확립했으며 경제, 행정 개혁 등으로 세도 정치의 폐해를 완전히 일소하는 성과를 거두어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몇 가지 무리한 정책과 세계 정세를 정확하게 읽어내지 못한 채 지나친 쇄국정책을 폄으로써 어려움에 처하기도 한다. 우선 왕의 위엄을 세우고자 경복궁을 중건하는 과정에서 원납전을 징수하고 문세를 거두는 것도 모자라서 소유자의 허락 없이 전국에서 거석과 거목을 징발하여 백성들의 원망을 사기도 했다.
3.[양요]
또한 천주교도들에 대한 지나친 박해로 인해 자신의 정치 생명에 타격을 입히기도 했다.
그는 한때
천주교도들이 건의해온 이이제이의 논리에 흥미를 가진 적도 있었지만 이 때문에 도리어 정적들에게 탄핵의 빌미를 주게 되자 정치적 생명에 위협을
느낀 나머지 천주교 박해령을 내려 1866년부터 1872년까지 6년 동안 8천여 명의 신자들을 학살하였다. 1866년 1월 5일 베르노 주교의
하인 이선이와 전장운, 최형 등이 체포되었다. 무시무시한 고문이 가해졌다. 이어 베르누 주교, 다블뤼 주교 등 프랑스 신부 9명과 홍봉주,
남종상은 물론 정의배, 전장운, 최형 등의 주요 신자들과 수천 명의 교인들이 서울과 전국에서 체포되었다. 이들 모두 서울의 새남터와 충남 보령의
갈매못 등지에서 순교하였다. 이것이 바로 [병인박해] 혹은 [병인사옥]이라 불리우는 사건이다. 병인사옥은 신유사옥, 기해사옥과 더불어 3대
사옥이라 하는 바, 그 중에서도 병인사옥이 가장 심하였다.
그런데 대원군을 자극하여 천주교도에 대한 박해를 가중시킨 사건이 있었는데, 오페르트 도굴사건과
두 차례의 양요가 그것이다.
천주교 신자에 대한 이 같은 박해로 프랑스 신부 9명이 죽자 프랑스는 그 보복으로 1866년 10월 군함 7척에 총병력 1천 명을 승선시키고 강화도를 점령하였다. 이에 조선군은 강화도 수복 계획을 구상하고 그들을 공격했지만 화력이 밀려 실패하였다. 그러나 제주목사 양헌수의 전략으로 정족산성 싸움에서 승리하여 프랑스 군을 격퇴하였다. 이 사건을 [병인양요]라고 한다.
그리고 이 사건보다 2개월 먼저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온 미국상선 제너럴셔먼 호가 통상을 요구하다가 평양군민의 화공으로 불타버린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5년 뒤인 1871년 [신미양요]로 발전하게 된다. 미국은 셔먼호 사건이 발생하자 조선 개항 문제에 적극적인 관심을 표명하게 된다. 그리고 두 번에 걸친 탐문 항행을 실시하면서 셔먼 호에 대한 손해 배상을 요구하는 동시에 통상 관계를 수립하기 위해 두 번에 걸쳐 조선 원정을 계획했지만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하지만 그들은 1871년 5월 조선 원정을 결행하기로 하고 군함 5척, 병력 1천 2백여 명, 함포 85문 등으로 무장하고 강화도 해협으로 침입해 왔다. 미국 군함이 강화도로 접근해오자 조선군은 그들에 대한 기습 공격을 감행한다.
이것이 이른바 [손들포 포격 사건]으로 조·미간의 최초의 충돌이었다. 이 사건 이후 미국은 보복 상륙 작전을 벌이겠다고 위협하면서 평화 협상을 제의했다. 하지만 조선의 거부로 평화 협정이 결렬되자 그들은 대대적인 상륙 작전을 감행해 강화도 초지진에 무혈 입성하였다. 이후 조선 수비병은 광성보에서 전투를 벌였지만 패하였고, 강화도는 완전히 미군의 손아귀에 넘어가고 말았다. 하지만 그들은 흥선대원군의 강력한 쇄국 정책에 밀려 결국 점거 1달여 만에 강화도에서 물러갔다.병인양요와 신미양요는 프랑스와 미국이 조선과 통상 무역을 하기 위해 벌인 침략 전쟁이었다. 이는 오히려 조선민들의 감정만 자극시켜 척화비를 세우는 등 흥선대원군의 쇄국 정책이 더욱 강화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하지만 흥선대원군의 쇄국 정책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12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한 고종이 어느새 20세를 넘겨 성인이 되면서 친정을 원하고 있었으며, 1866년에 입궁한 고종비 민씨가 노대신들과 유림을 앞세워 대원군 하야 공세를 벌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침내 1873년 고종이 서무를 친히 결재하겠다는 명을 내리고 통치 대권을 장악하게 되자 대원군은 정계 일선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자 정권은 왕비 민씨의 척족들이 장악했다. 민씨 척족들은 흥선대원군이 취했던 강력한 쇄국 정책과는 달리 안으로는 일부 세력의 대외 개방 여론과, 밖으로는 [운요 호 사건] 이후 무력 시위를 하고 있던 일본의 국교 요청을 받아들여 1876년 일본과 강화도에서 [병자수호조약]을 맺었다.
신미양요 이후 쇄국 정책을 더욱 강화한 조선에서 대원군이 물러남으로써 점차 대외 개방에 대한 여론이 높아가자 일본은 1875년 2월부터 군함을 이끌고 동해와 남해, 황해 등에서 무력 시위를 벌이게 된다. 그리고 결국 병력을 이끌고 강화도로 침입해오자 조선군은 영토에 대한 불법 침입을 이유로 발포한다. 일본은 이 조선군의 발포를 빌미로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해 영종도에 상륙했고 그에 대응하기 위해 조선군은 군사를 동원해 그들과 일전을 벌였지만 패배하고 말았다. 일본군은 한동안 영종도를 점거하고 있다가 조선의 감정이 악화되자 일단 물러났다. ([운요 호 사건])
4.[조일수호조약]
이듬해 초 일본에서는 특명전권대신에 구로다, 부대신에 이노우에, 수원에 미야모토, 모리야마 등 4명의 전권사절단을 조선에 파견하였다. 이들을 상대한 조선측 관료로는 접견대관 신헌, 부관 윤자승, 종사관 홍대중이었다. 강화도 연무당에서 1872년 2월 11일, 조선과 일본간에 제1차 회담이 열렸다. 여기서 구로다는 운양호 사건을 들어 조선이 일장기를 모독했다고 비난했다.
'일본국기 모독죄'로 조선을 궁지로 몰아넣자는 것이었다.
그사이 강화만의 일본 함대에서는 시시로 대포를 쏘아 조선측접견대관을 공포에 떨게 하였다. 간접적인 협박이었다. 이것은 1853년 페리 제독이 일본을 원정했을 때 에도만에 함대를 진입시켜 해상시위를 하는 가운데 [미일화친조약(1854년)]을 체결한 것과 같은 수법이었다. 기세에 눌린 조선측이 일본의 요구에 끌려가는 형국이었다.
이때 조선 조정에서는 일본과 강화를 하느냐의 여부를 놓고 의론이 분분하였다. 김병학, 홍순목 등 대부분의 대신들은 반대하는 쪽이었다. 그러나 우의정 박규수는 "삼천리 강토가 내수외양의 방책을 다 했던들, 조그마한 섬나라가 이처럼 감히 우리나라를 엿보고 공갈과 협박을 자행할 수 있겠는가? 분하고 원통하지만 오늘날의 조선군대로는 일본세력을 막을 수 없다. 일단 강화를 하자!"하며 강화를 찬성하였다.
이때 청국을 다녀온 이유원이 개항을 권고하는 총리아문대신(이홍장)의 긴급 서한을 전하였다. 자국내에도 많은 문제들이 있었던 청국은 조선에 분쟁이 이는 것을 원치 않았고, 게다가 남하하려는 러시아를 고려할 때 일본이 조선과 맺은 조약을 굳이 저지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결국 조정은 강화쪽으로 방침을 굳히게 되었다. 강회도의 연무당에서 조선의 대표(신헌과 윤자승)와 일본의 대표(구로다와 이노우에) 사이에 [조일수호조약](1876년 2월 21일, [강화도 조약] 혹은 [병자수호조약])이 체결되었다. 그해 8월에는 위 조약에 근거하여 수호조규부록과 무역규칙이 성립 되었다.
물론 강화도조약 체결을 전후하여 개화정책에 반발하는 위정척사 운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당시 강화를 거부한 주요 인물은 척사론의 원조격이라 할 수 있는 이항로(1792-1868)의 제자 최익현과 장호근 등이 있었다. 최익현은 1876년 1월 한양에 올라와 도끼를 메고 궁궐 앞에 엎드려 강화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내 말을 듣고도 일본과 강화를 할 지경이면 먼저 이 도끼로 내 목을 치라'는 것이었다. 내용의 주된 골자는 왜와 서양은 한가지로 도적이라는 것이었다.
일본과 서양 각국 사람들이 들었다면 황당해겠지만, 저들의 사치품과 우리의 생필품이 교환되면 우리가 황폐해진다는 주장은 일리가 있었다. 그러니 왜와 강화를 하면 나라는 망한다, 즉 저들과 교역을 하면 망한다고 한 결론은 지극히 타당했다. 그러나 고종과 대신들의 입장에서는 답답하고 머리가 아팠다. 한결같이 고원한 이상론에 한결같이 요순시대를 운운하는 사람들 속에서 어떻게 난국을 돌파해 가느냐는 것이 고종의 고민이었다. 고종은 상소에 패륜한 내용이 있다는 구실로 최익현을 전라도의 흑산도로, 장호근을 전라도의 녹도로 유배 보내라 했다. 이어 왜와의 조약이 체결되었으니 이 때의 운동은 실패였다.
5.[조선책략]
정부가 나라의 문호를 열자 위정척사운동의 양상도 달라져 갔다. 강화도 조약의 체결 이후 정부에서는 개화정책 추진의 일환으로서 해외견문사절단을 파견하였다. 즉 1, 2차에 걸쳐 일본에 파견한 [수신사](1876년과 1880년)와 [신사유람단] (1881년 2월) 그리고 청국에 파견한 [영선사](1881년 11월)가 그것이다. 이 중 제2차 수신사 김홍집 일행은 일본을 방문하고 돌아오면서 [조선책략]을 가져와 정부에 바쳤다.
정부에서는 이 책을 슬그머니 관리와 유생들에게 돌려 읽으라고 하였다. 그런데 보수 유생들은 물론 관원들로부터 그 책의 내용은 많은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일본과의 개항 자체가 반발을 샀던 상황에서 서양을 짐승으로, 천주교를 사학으로 여기던 보수 유생들은 '정부가, 아니 임금님이 실성했느냐'는 반응을 보였다. 유생 이만손을 우두머리로 '영남인 만인의 상소'가 올라왔고, 홍시중, 홍재학 등의 격렬한 상소가 득달같이 올라왔다.
이들은 단지 [조선책략]을 비판한 것에 그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들여온 김홍집을 중형에 처하라고 하였다. 고종도 예상은 했지만, 내버려 두었다가는 국왕의 권위까지 위협할 지경이었다. 싹을 잘라야 했다. 홍재학이 능지처참의 극형에 처해졌다.
이때의 위정척사운동은 당시 정부의 개화정책이 외세의 침투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비판에서 나왔다. 그러나 그들은 주장은 주먹구구식이었을 뿐 진취적이지 못하였다. 애국심은 넘쳐나는데 애국의 방법이 문제였던 것이다. 아무도 대양으로 뛰쳐나가지도 못했고 하려고 하지도 않았으니, 국제조류를 헤쳐갈 안목도 대안도 제시될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이 때의 위정척사론은 외세 앞에서 고전한 정부를 제대로 받쳐주지 못한 공허한 이론이었다.
이후 정부는 이러한 보수유생들을 뒤로 한 채 서구와의 교류를 터나갔다. 그 결과 1880년대 전반기와 후반기 약 5년 사이에 조선은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러시아 등과 통상 조약을 체결하였다.
개화와 반외세의 성격을 띠고 전개된 1881년의 위정척사 운동은 개화정책을 추진하던 정부에게 큰 위협이 아닐 수 없었다. 정부에서는 수구파의 공격에 대항하기 위한 방편으로서 중앙기구를 개편하고 개화파 인물을 등용하였다.
정부측에서는 대원군이 설치한 삼군부를 없애고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한 바 있다.(18881년 1월) 같은 해 11월에는 이를 다시 개편하여 종래의 12사를 7사로 하는 등 개화정책이 잇달았다.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정책, 즉 외국사절의 접대문제, 일본과 청국에의 사절단 파견과 유학생의 파견, 행정기구 개편, 신식군대 창설 등에 따라 재정부담이 커졌다. 정부비용의 증대가 각종 조세의 증가와 과중한 세납을 유발한 것이다. 이것이 현실적으로는 일반 국민의 부담을 가중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게다가 중간관리의 탐학과 농간이 개입되어 부담은 더욱 늘어났다. 이 과정에서 권력에서 소외되어가던 보수유생들은 서원철폐로 그들 스스로가 쫓아낸 대원군에 대한 향수를 느끼게 된다. 대원군의 쇄국정책은 척사를 주장하는 유생들의 생리에 와닿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유생들에 의한 척사와 척왜운동 그리고 일반 민중 사이의 척왜 분위기는 대원군과 그의 지지세력을 고무시켰다.
이것이 불씨가 되어 하나의 사건이 일어났는데 '안기영 사건(일명 이재선 사건)'이 것이다. 이 역모는 일부 관계자들의 고변에 의해 사전에 적발되었고, 고종과 민씨 일파는 이를 빌미로 척사상소운동을 강력히 제압하여 가까스로 정국을 수습하였다.
하지만 개화파와 위정척사파의 알력은 더욱 심해졌다. 그리고 마침내 1882년 구식 군대 폐지와 관련하여 5군영에 소속됐던 군인들에 의해 [임오군란]이 일어났으며, 이어 1884년에는 개화파의 [갑신정변]이 발생했다.
임오군란 때는 흥선대원군이 반란 세력을 등에 업고 궁중에 들어와 대권을 장악했다가 곧 청군에 의해 납치되었고, 1884년 갑신정변 때는 궁중을 습격한 개화 세력이 정권을 장악했다가 청군에 의해 밀려남으로써 왕권이 크게 실추되었다. 뿐만 아니라 청과 일본이 이 변란을 계기로 조선에 진주해 세력 다툼을 벌여 조선의 자주권은 치명적인 손상을 입게 되었다.
이 두 사건 이후 민씨 정권과 고종은 친청 정책을 펼치면서 새로운 국면을 모색했지만 급격하게 변화하는 동북아시아의 정세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해 혼란은 점차 가중되었고 전국 곳곳에서 반봉건, 반외세의 기치를 내건 민란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급기야 그것은 1894년 3월 동학혁명으로 폭발되어 관군과 농민 사이의 전면전으로 발전하였다. '보국안민'과 '폐정개혁'을 기치로 내건 농민들의 기세가 걷잡을 수 없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고종과 민씨 세력은 청에 원병을 청하였고, 청이 이에 응하자 일본 역시 그들간의 조약을 빌미로 군대를 동원하였다. 이처럼 외세가 개입하자 농민군과 관군은 회담을 통해 화의를 약속하고 싸움을 중단하였다.
하지만 조선에 진주한 청·일 양국군은 돌아가지 않았다. 일본은 청에게 함께 조선의 내정 개혁을 실시하자고 제의하였지만 청은 이 제의를 거절했다. 그러자 일본은 단독으로 민씨 정권을 몰아내고 흥선대원군을 앉혀 꼭두각시 정권을 탄생시켰다. 그 뒤 개혁 추진 기구로서 군국기무처가 설치되었고, 김홍집이 중심이 되어 내정 개혁이 단행되었다. 이것이 [갑오경장]이다.
일본은 이처럼 단독으로 조선의 내정 개혁을 단행함과 동시에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청군을 공격하여 승리한 뒤 정식으로 청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7월에 시작된 청·일 전쟁은 두 달만에 구미 열강의 지지를 등에 업은 일본의 승리로 끝났다.청·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조선 정복을 위해 내정간섭을 시작했다.
이 때문에 해산되었던 동학군이 '외세배격'을 기치로 내걸고 다시 소집되어 대일 농민전쟁을 감행했다. 하지만 관군과 일본군의 화력에 밀린 농민군은 그 해 12월 패배하여 동학 농민군의 봉기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이후 일본의 조선에 대한 내정 간섭은 더욱 강화되었다.
그러나 당시 일본은 청·일 전쟁에서 승리한 대가로 받은 요동반도를 러시아, 독일, 프랑스의 삼국 동맹군의 힘에 굴복해 다시 청에 돌려준 상태였다. 조선 조정은 이 같은 정세를 감지하고 배일친러 정책을 실시하여 일본군을 조선에서 몰아내고자 하여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일본은 1895년 8월 대러 관계를 주도하고 있던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친일 세력으로 하여금 조정을 장악하게 하는 [을미사변]을 일으킨다.
을미사변으로 왕비를 잃은 고종은 일본의 압력으로 다시 죽은 명성황후를 폐위시켜 서인으로 전락시키는 조처를 취하게 된다. 그러나 일본의 을미만행은 국제 사회에 알려져 지탄을 받게 되었고, 일본은 이 사건을 사죄하고 형식적인 진상 조사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서인으로 폐위되었던 명성황후는 다시 신원될 수 있었다.
한편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일반 민간에 알려지자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 관군과 일본군에 대항하여 치열한 싸움을 전개했다. 이에 당황한 일본은 전국 각처로 주력 부대를 출동시켜 진압을 서둘렀지만 의병은 좀체 사라지지 않았다.
을미사변후 신변에 위협을 느끼고 있던 고종은 일본 군대와 친일 세력의 어수선한 틈을 이용해 은밀히 러시아와 내통하고 1896년 2월 러시아 영사관으로 몸을 옮긴다. 고종은 여기에서 친러 정권을 수립하여 친일 내각의 요인들을 역적으로 규정지으며 단죄하였고, 갑오경장 때 실시된 단발령을 철폐하는 한편 의병 해산을 권고하는 조칙을 내렸다.
그러나 친러세력이 집권하면서 열강에 많은 이권이 넘어가는 등 나라의 위신이 추락하고 권익을 잃어
국권의 침해가 극심해진다. 이에 독립협회를 비롯한 국민들은 국왕의 환궁과 자주 선양을 요구하기에 이른다. 이 같은 여론에 밀려 고종은 1897년
2월 아관으로 떠난 지 1년 만에 환궁하여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치고 황제에 올라 연호를 '광무'라 하였다.
대한제국이 성립되자 고종의 신변 위협은 더욱 심화된다. 1898년 7월 안경수가 현역, 퇴역 군인들을 매수하여 황제 양위를 계획하다가 실패하였고, 또 9월에는 유배되어 있던 김홍륙이 차에 독을 타는 사건이 발생하는 등 고종을 위협하는 일이 연달아 일어났다. 또한 그 무렵 독립협회 회원들을 중심으로 만민공동회가 만들어져 맹렬하게 자유민권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그러나 고종은 보부상과 군대의 힘을 빌어 이들을 진압하였다.
1904년 러시아와 일본간에 전쟁이 일어나 일본군의 군사적 압력이 격해지는 가운데 장호익 등이 다시 황제 폐립 음모사건을 일으켰고,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고종에게 군사적 압력을 가하여 제1차 한·일 협약을 강요했으며, 1905년에는 일본과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하고 말았다.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고종은 미국에 이 조약의 무효를 호소하기 위해 1905년 11월 미국 공사로 있던 헐버트에게 밀서를 보냈다. 하지만 미국은 당시 이미 필리핀에서 미국의 우월군을 인정받는 대신 대한제국에 대한 일본의 지배를 용인하는 '가쓰라·태프트 협정'을 체결한 상태였다.
따라서 미국이 고종의 밀서에 호응할 까닭이 없었다. 일본의 강제적인 보호 조약에 대한 무효를 선언했지만 미국의 호응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고종은 일본이 설치한 통감부에 의해 외교권이 박탈당하자, 대한제국 문제를 국제 사회에 알리기 위해 1907년 6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개최된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할 계획을 세웠다.
특사로 내정된 사람은 전 의정부참? 이상설과 전 평리원감사 이준이었다. 이들을 특사로 파견한 고종은 다른 한편으로는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에게 친서를 보내 이들 특사 활동을 지원해줄 것을 요청한다. 그러나 영국과 일본의 방해로 고종의 밀사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이 사건으로 이완용, 송병준 등 친일 세력과 일본의 강요에 의해 고종은 이 해 7월 20일 퇴위하게 된다.
고종은 순종에게 선위한 후 태황제로 물러났고, 1910년 일제가 대한제국을 무력으로 합방하자 이태왕으로
불리다가 1919년 1월 21일 덕수궁 함녕전에서 6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이 때에 전국 각지에 그가 일본인에 의해 독살당했다는 소문이
퍼져 민족의 의분을 자아냈으며, 국상이 거행될 때 3·1 운동이 일어났다. 고종에 이어 순종이 즉위하긴 하지만 실질적으로 보면 고종이 조선의
마지막 왕이나 다름없다. 그것은 이미 그가 집권하던 시기에 일본에 의한 강제적인 보호 조약이 이루어졌고, 또한 그가 일본의 강권에 의해
퇴위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도 [경술국치]를 보았고, 다시 9년을 더 살며 일본의 식민 통치를 목격했기
때문이다.
Ⅲ. 을 미 사 변
1895년(고종 32)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가 주동이 되어 명성황후(明成皇后)를 시해하고 일본세력 강화를 획책한 정변.
갑오개혁을 통하여 깊숙이 조선 내정에 간여하게 된 일본은 청·일전쟁에 승리한 뒤 박영효(朴泳孝)·김홍집(金弘集)을 중심으로 한 친일내각을 만들어 세력확장에 힘을 기울였다.
이때 프랑스·러시아·독일 등 3국은 일본의 대륙침략 저지를 위해, 청일전쟁의 승리로 일본이 차지한 랴오둥반도[遼東半島]를 청국에 반환할 것을 요구한, 이른바 '삼국간섭'으로 일본의 세력확장에 제동을 걸었다. 그동안 일본의 강압하에 내정개혁을 추진한 조선정부는, 러시아공사 K.베베르와 제휴하고 친일세력의 완전 제거를 위하여, 1895년 9월 6일 왕비시해 음모혐의로 전 내무대신 박영효에 대해 체포령을 내려 정계에서 축출하였다.
이미 8월에 민영환(閔泳煥)을 주미전권공사(駐美全權公使)로 등용한 동시에, 친일계인 어윤중(魚允中)·김가진(金嘉鎭) 등을 면직시키고 이범진(李範晋)·이완용(李完用) 등의 친러파를 기용하여, 제3차 김홍집 내각이 성립되어, 친미·친러세력이 우세하였다.
더구나 주한일본공사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가 조선정부에 약속한 증여금 300만 원을 일본정부가 제공하지 않자, 조선정계에서는 배일세력이 증가하였다. 이에 일본측은 이노우에 대신 무인 출신 미우라를 주한일본공사로 파견하였다. 조선정부는 일본의 강압에 따라 제정한 신제도를 구제도로 복구하려고, 일본인 교관이 훈련시킨 2개 대대의 훈련대도 해산하고자 하였다.
이에 대하여 미우라는 명성황후시해계획을 세우고, 1895년 10월 2일 하수인으로서 한성신보사 (韓城新報社)에 있는 낭인(浪人)을 이용하고자 사장 아다치[安達]를 공사관으로 불러 6,000원의 거사자금을 주고 왕비시해의 전위대로 삼아, 공덕리(孔德里) 아소정(我笑亭)에 있는 흥선대원군을 궁중으로 호위하는 일을 담당시켰다. 그 외 일본군수비대와 일본인 거류지 담당경찰관 및 친일조선인까지 동원할 계획을 세우고, 훈련대의 우범선(禹範善)· 이두황(李斗璜)·이진호(李軫鎬) 등 3대대장과 전 군부협판(軍部協辦) 이주회(李周會)를 포섭하였다.
한편 정부에서는 군부대신 안경수(安멎壽)를 일본공사관에 보내어 훈련대해산과무장해제, 민영준(閔泳駿)의 궁내부대신 임명을 통고하였다. 일본은 상황이 급변함을 직감하고 명성황후 시해계획을 10월 8일 새벽으로 결행하였다. 흥선대원군을 앞세운 일본인 자객들은, 서대문을 거쳐 우범선·이두황이 지휘한 조선 훈련대와 합류하여 광화문을 통과하였다. 훈련대 연대장 홍계훈(洪啓薰)과 군부대신 안경수가 1개 중대의 시위대 병력으로, 이들의 대궐 침범을 제지하려다 충돌이 일어났다.
흉도(兇徒)들은 궁내부대신 이경직(李耕稙)과 홍계훈을 살해한 다음, 이어서 왕비의 침실인 옥호루(玉壺樓)에 난입하여 왕비를 살해하고, 시체에 석유를 뿌려 불사른 뒤 뒷산에 묻었다. 곧 새로 유길준(兪吉濬)·서광범(徐光範)· 정병하(鄭秉夏)·김종한·권형진(權瀅鎭) 등 친일파를 중심으로, 제4차 김홍집내각을 수립하였다. 명성황후시해 현장에는 고종·황태자 및 미국인 교관 다이, 러시아인 기사 사바틴, 그외 많은 조선인이 있어 진상을 낱낱이 목격하여, 사건은 국내는 물론 국제적으로도 자세히 알려졌다.
이에 구미열강이 강경한 태도로 일본인의 사건 관여사실을 주장하고 나서자, 일본은 이의 처리방안으로서 미우라를 해임, 고무라[小村]를 판리공사(辦理公使)로 임명하였다. 한편 미우라 등 관계자 48명을 히로시마[廣島] 감옥에 구치하고, 형식적으로 관련혐의자에 대한 취조를 하였으며, 결국 증거불충분을 이유로 전원석방시켰다.
결국 을미사변은 항일의병활동의 원인과 아관파천(俄館播遷)의 계기가 되어, 한국은 러시아의 보호국과 같은 지위로 떨어졌고, 일본의 식민지화계획에 차질을 가져왔다.
Ⅳ. 명성황후 시해 당시 관련 증언들
일본은 상황이 급변함을 직감하고 명성황후 시해계획을 10월 8일 새벽으로 결행하였다. 흥선대원군을 앞세운 일본인 자객들은,서대문을 거쳐 우범선·이두황이 지휘한 조선 훈련대와 합류하여 광화문을 통과하였다. 훈련대 연대장 홍계훈(洪啓薰)과 군부대신 안경수가 1개 중대의 시위대 병력으로, 이들의 대궐 침범을 제지하려다 충돌이 일어났다. 흉도(兇徒)들은 궁내부대신 이경직(李耕稙)과 홍계훈을 살해한 다음, 이어서 왕비의 침실인 옥호루(玉壺樓)에 난입하여 왕비를 살해하고, 시체에 석유를 뿌려 불사른 뒤 뒷산에 묻었다.
명성황후시해 현장에는 고종 황태자 및 미국인 교관 다이, 러시아인 기사 사바틴,그외 많은 조선인이 있어 진상을 낱낱이 목격하여, 사건은 국내는 물론 국제적으로도 자세히 알려졌다. 이에 구미열강이 강경한 태도로 일본인의 사건 관여사실을 주장하고 나서자, 일본은 이의 처리방안으로서 미우라를 해임, 고무라[小村]를 판리공사(辦理公使)로 임명하였다. 한편 미우라 등 관계자 48명을 히로시마[廣島] 감옥에 구치하고, 형식적으로 관련혐의자에 대한 취조를 하였으며, 결국 증거불충분을 이유로 전원석방시켰다.
"히라야마 이와히코 등 13명이 민비를 살해했다고 자백했다"는 내용이 공소장에 실려있어 일본
수사당국이 황후시해의 진상을 알고 있었음이 입증되었다. 특히 살해범들은 "궁녀들이 서로 자
신이 민비라고 하는 바람에 이들의 옷을 벗기고 유방을 살펴 당시 민비 나이인 44세가량의 여자
를 칼로 살해하고 이를 제지하던 궁내부 대신 이경식을 총과 칼로 살해했다"고 진술하였다.
-
(이상 조선일보 이규태 코너 '시해도'에서 발췌)
후지카쓰는 1895년 미우라가 공사로 부임하면서 데려온 개인비서로, 시해사건 후 다른 살해범
들과 함께 히로시마재판소에서 조사를 받았으나 증거불충분 으로 풀려났으며, 8.15이후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의 소유의 길이 1m20㎝의 칼이 발견되었다. 그의 칼집에는 '단숨에 전
광 과 같이 늙은 여우를 찔렀다'는 내용의 한자 문구와 후지카쓰의 호인 몽암 이 새겨져 있다.
당시 명성황후시해의 작전명은 '여우사냥'이었다.
- (이상 조선일보 1994년 8월 23일
사회면 기사에서 발췌)
우치다 영사의 보고서에는 "계속해서 궁녀를 붙잡아 왕비가 있는 곳과 용모의 특징을 묻던 중
'왕비의 관자놀이에는 아주 희미한 마마 자국이 있다'는 증언을 얻어 먼저 옥호루에서 살해 했던
용모 복장이 아름다왔던 3구의 시체를 조사한바 그 중 하나에 마마 자국이 있어 궁녀를 확인하여
민비임을 확인했다"라고 써 있다.
다음은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가담한 고바야가와라는 자의 진술이다.
"상체에는 짧은 하얀 속옷을 입었을 뿐이며 허리 아래는 하얀 속바지를 입고 있었으나 무릎 아래
로는 맨살이다....위를 행한 채 이미 숨이 끊어졌고 주변에 피가 흐르고 있었다. 잘보니 자그마
하고 마른편으로 피부색이 하얀, 아무리 보아도 25,6세로 밖에 보이지 않는 여자 였으며 죽었다
기 보다는 인형이 쓰러진 듯한 모습으로 영원히 잠에 빠져 있었다...방안에는 유해를 지키는 사
람 한 명도 없이 참으로 처참하기 그지 없는 광경이었다."
전 법제국 참사관이며 당시 조선 정부의 내무 고문관이었던 이시즈카 에조는 법제국장관 앞으
로 보낸 보고서 속에서 "정말로 이것을 쓰기는 괴로우나..."라고 서두에 쓴 후 명성황후의 유해
에 대한 일본인 낭인들의 윤간행위를 구체적으로 쓰고 있다.
미우라 공사의 명을 받은 오기하라 경부는 문짝 위에 비단 이불로 덮은 민비의 유해를 건천궁
동쪽의 녹원이라고 불리는 정원으로 옮겨 높이 쌓아 올린 장작더미 위에 올려 놓고 석유를 끼얹
어 불을 질렀다.
- (이상 角田方子 지음 '민비암살'-조선일보사 刊- 중에서 발췌)
* 바로 위 글중, "먼저 옥호루에서 살해 했던 용모 복장이 아름다왔던
3구의 시체를 조사한바" 라는
글은 일본이 이 살해계획을 계획하고 실행했음을 은폐하기 위해 사용한 표현이다.
나중에 밝혀진 바로는, 명성황후는 건천궁 앞 마당에서 시해된 것으로 확인되었다.(옮긴이 註)
** 이 기사는 조선일보에서 전재함.
"명성황후 시해 주범은 메이지유신 원로 이노우에"
“명성황후 시해를 지휘한 미우라 고로 주한 일본공사는 이 사건의 종범이고, 메이지 유신 원로인
이노우에 가오루가 주범입니다.”
'92년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펴내 이 사건에 일본정부가 개입했다는 주장을 제기한 최문형 한양대
명예교수가 ‘명성황후 시해의 진실을 밝힌다’를 출간, 사건 진상규명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최
교수는 “일본은 시해사건에 대해 시종 일관 정부의 관여를 부인해 왔을 뿐 아니라 이 사건이
‘낭인’들에 의해 우발적으로 저질러진 범행으로 발뺌해 왔다”고 말한다.
그가 이노우에를 주목하는 이유는 일본 정부의 사건 관여를 파헤치기 위해서다. “강화도 조약 때
부터 조선문제에 관여해 온 이노우에는 1894년10월 주한공사 임명과 함께 조선에 대한 전결권을
부여받은 일본 정부 당국자였습니다. 미우라는 시해를 주도할 위치에 있지도 못했고, 그럴 능력도
없었어요.” 최 교수는 “이노우에는 사건 한달 전에 17일간 미우라와 함께 서울에 머물면서 시해
사건을 기획했다”고 말했다. 당시 주한 외교사절들이 자국 정부에 보낸 사건 보고서 등을 조사
했더니, 한결같이 황후 시해의 주모자로 이노우에를 지목했다는 것.
그는 “경복궁에 난입한 ‘낭인’들은 결코 깡패나 건달이 아니었다”고 설명한다. 하버드대 출신으로
중의원 의원을 지낸 시바 시로나, 도쿄대 법학부를 졸업하고 사건후 브라질 전권공사를 역임한
오리구치 구마이치같은 일본 최고의 지성인들이 대다수 가담했다는 것. 낭인 집결을 책임진
아다치 겐조 한성신보 사장도 후일 체신상과 내상을 지냈다고 했다.
서양사를 전공한 최 교수는 명성황후 시해를 한반도에서 전개된 러·일의 대립 속에서 빚어진 결과로
파악한다. 명성황후는 러시아와의 연결고리를 절단하기 위한 일본의 ‘희생물’이었던 데 반해,
고종은 이런 일본에 대응하기 위해 아관파천을 주도한 러시아의 ‘이용물’이었다는 관점이다.
지난 2월 정년퇴임후 집필에 매달려온 최 교수는 “명성황후 사건에 일본 정부가 관련됐음을 인정
하는 일본 정부 문서나 이노우에같은 당시 실세들의 증언이 공개되면 좋겠으나, 현재까지 그걸
기대할 수 없다”며 “일본측이 반론에 나서면 공개토론을 갖고 싶다”고 했다.
- 조선일보 김기철 기자 (2001-10-13)
Ⅴ. 명성황후 관련 사진
* 아래한글로 가지고 있던 자료를 옮기니 사진은 옮겨지지 않네요. 사진은 추후 보충 예정.
명성황후는 1851년 철종때 여성부원군 민치록의 딸로 태어 났다. 8세에 부모를 여의는 아픔을 겪었다. 흥선대원군의 부인 민씨의 천거로 왕비에 간택되어 1866년 고종과 가례를 올리고 입궁하였다. 이 때 고종의 나이는 15세였다. 흥선 대원군은 외척의 권세 위험이 없는 소녀 민씨를 왕비로 들여 왕실과 정권의 안정을 도모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왕비 민씨는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 하며 재주가 출중한 여성이었기 때문에 왕비에 오른지 몇 년 지나지 않아서 왕실 정치에 관여하기 시작한다. 결국 자신의 소생이 아닌 완화군의 세자 책봉 문제를 놓고 시아버지 흥선 대원군과 대립하여 정적 관계에 놓이게 되었고, 결국 그를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하기에 이르렀으며 능란한 외교술을 발휘하게 되었다.
[ 명성황후 생가/명성황후 기념관 ]
이사진의 소재지는 여주읍 능현리 250-2 이며 지방유형문화재 제46호(1973년 7월 10일 지정) 로 지정 되어 있는 명성황후의 생가이다.
--> 가는 길: 영동고속도로 여주 톨게이트에서 나오면서 여주방면으로 우회전하면 200m 거리에
우측으로 명성황후 생가가 있음.
▲ 대신면에서 본 이정표
이 사진은 1902년에서 1903년까지 서울에 머물렀던 이탈리아 외교관 카를로 로제테의 '꼬레아 꼬레아니'에 살려 있다. 오랫동안 명성황후 얼굴로 공인되어 왔던 사진이나 얼마 전부터 명성황후 사진이다, 아니다의 논란이 계속되고 있는 사진이다.그 중 서울대 국사학과 이태진 교수와 조선일보 이규태씨와의 논란은 세상에 잘 알려져 있다.
이 사진은 1920년 이승만의 [독립정신]에 수록되었던 사진이다. 평복 차림인 것으로 보아 임오군란 때 장호원으로 피신간 상태에서 촬영한 사진으로 보인다. 그러나 역사가 문일평씨가 이사진을 들고 명성황후를 잘 아는 사람에게 보이니 전혀 아니라고 말하였다는 일화가 있어 속단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굴 생김새나 눈매에서 영민함이 서려 있어 많은 학자들이 이 사진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이 사진은 조선일보가 명성황후 사진 논쟁은 끝났다고 보도하면서 비교, 제시하였던 사진이다. 오른쪽 사진이 새로 공개된 사진이다.
1895년 호주에서 발간된 영국외교관 가드너의 저서 '조선'에 실린 '궁정복을 입은조선 궁녀'라는 제목의 삽화이다. 삽화는 종래 명성황후
사진이라고 알려져 왔던 사진과 머리,복장, 앉은 자세 등이 흡사 하다는 것이며. 저자는 황후시해 1년전인 1894년 주한 영국 총영사 대리를
지낸 외교 관으로 그의 저서에는 1882년 임오군란 당시 명성황후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사례가 있다는 사실까지 밝히고 있을 정도로 국내
사정에 밝았다는 것이다.
대원군을 앞세우고 경복궁에 난입하였던 일단의 일인 시종잡배 낭인들은 명성황후의 처소인 건천궁을 찾아 들었다. 그리고 명성황후로 생각되는 여성 들을 닥치는대로 죽였다. 눈가 주위에 희미한 수두자국이 있다는 것으로 명성황후의 신분으로 확인 된 시체는 일본 낭인들에 의하여 차마 글로 표현할 수 없는 가혹 행위를 당한 뒤 아소정 주변에 던져저 석유를 뿌리고 불태워졌다. 얼마전 새롭게 밝혀진 사실에 의하면 일제 강점기 때 일제는 아예 명성황후 시해장소였던 건천궁을 없애고 화단을 꾸미려 하였다가 3.1운동으로 항일 운동이 거세지자 실행에 옮기지 못하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위의 사진이 명성황후가 살해된 장소인 옥호루이다. 당시 옥호루는 궁중 나인들이 주로 사용하던 곳이었다. 아래 사진은 아소정 이다. 명성황후를 추모 하는 사람들이 가슴에 검은 상장을 달고 아소정에 올라 추모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사진은 1897년 11월 27일에 치루어 진 명성황후 국장의 사진이다. 돌아가신 것은 1895년인데 왜 국장은
1897년이었을까? 을미사변 이후 일본이 내세운 친일 내각에 의하여 1895년 폐후의 조칙이 내려지고 폐서인이 되었다가 다음 날인 10월 11일
빈호는 내린다. 이 때 고종은 "짐에게 그 서명(페후 시킨다는 서명)을 강요하느니 차라리 짐의 두 팔을 자르라"고 소리쳤지만 대신들의 강권으로
서명을 안할 수 없었다. 이 때 서명을 강권하고 을미개혁을 추진했던 대신들은 아관파천이후 죽음을 당하게 되니 1896년 김홍집과 농상무대신이었던
정병하가 광화문 앞 노상에서 성난 군중에게 몰매 맞아 살해 되고 다음 날에는 탁지부 대신 어윤중이 살해된다. 1897년 아관에서 돌아 온 고종은
10월 12일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고 국호를 대한제국, 연호를 광무라 하고 왕비 민씨를 명성황후로 격상시키고 한달 뒤 국장을 치루게 되는
것이다.
Ⅵ. 명성황후 주변 인물들에 대하여
미우라 - 일본의 군인 ·정치가.
국적 : 일본
활동분야 : 군사, 정치
출생지 : 일본
조슈한[長州藩]
조슈한[長州藩] 출생. 막부(幕府)타도운동에 참여하고,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후 신정부의 군인이 되었다. 1878년 육군중장, 1888년 예편 후 1890년에 귀족원 의원, 1895년 주한공사로서 한국에 부임한 그는 10월 8일 새벽 러시아 세력을 몰아내기 위하여 일본군과 경찰 및 낭인(浪人)들을 동원하여 명성황후 (明成皇后)를 시해하고 그 시신(屍身)을 불태우는 국제적 범죄를 저지른 범인이다. 그는 여기에 머무르지 않고, 시해된 황후가 궁궐을 탈출한 것처럼 위장하여 폐서인조칙(廢庶人詔勅)을 내리도록 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 궁궐에 있던 미국인 다이(M.W.Dye:쒀伊)와 러시아인 기사사바틴(H.N.Sabatin)이 현장을 목격함으로써 알려지게 되었다. 때문에 소환되어, 일시 투옥되었으나 곧 석방되었다. 1910년 추밀고문관(樞密顧問官)이 되었다. 이후 계속하여 정계의 배후조종자로서 활약
, 1924년 이른바 호헌삼파(護憲三派:憲政 ·政友 ·革新俱樂部) 성립에 진력하였다.
흥선대원군 - 조선 후기의 왕족 ·정치가.
호 : 석파(石坡)
본명 : 이하응(李昰應)
별칭 : 자 시백(時伯), 시호 헌의(獻懿)
활동분야 : 정치
이름 이하응(李昰應). 자 시백(時伯). 호 석파(石坡). 시호 헌의(獻懿). 영조의 5대손(五代孫)이며 고종의 아버지이다. 1843년(헌종 9) 흥선군(興宣君)에 봉해지고, 1846년 수릉천장도감(緩陵遷葬都監)의 대존관(代尊官)이 된 후 종친부 유사당상(宗親府有司堂上) ·도총관(都摠管) 등 한직(閑職)을 지내면서 안동김씨(安東金氏)의 세도정치(勢道政治) 밑에서 불우한 생활을 하였다.
왕족에 대한 안동김씨의 감시가 심하자 보신책(保身策)으로 불량배와 어울려, 파락호 (破落戶)로서 궁도령(宮道令)이라는 비칭(卑稱)으로까지 불리며 안동김씨의 감시를 피하는 한편, 철종이 후사(後嗣)가 없이 병약해지자 조대비(趙大妃)에 접근하여 둘째 아들 명복(命福:고종의 兒名)을 후계자로 삼을 것을 허락받았다.
1863년(철종 14) 철종이 죽고 조대비(趙大妃)에 의해 고종이 즉위하자 대원군에 봉해지고 어린 고종의 섭정이 되었다. 대권을 잡자 안동김씨의 주류(主流)를 숙청하고 당파를 초월하여 인재를 등용하였으며, 부패관리를 적발하여 파직시켰다. 1847개 서원(書院)을 제외한 모든 서원을 철폐하고, 국가재정의 낭비와 당쟁의 요인을 없앴으며, 《육전조례(六典條例)》 《대전회통(大典會通)》 등을 간행하여 법률제도를 확립함으로써 중앙집권적인 정치 기강을 수립하였다. 비변사(備邊司)를 폐지하고 의정부(議政府)와 삼군부(三軍府)를 두어 행정권과 군사권을 분리시켰으며, 관복(官服)과 서민들의 의복제도를 개량하고 사치와 낭비를 억제하는 한편, 세제(稅制)를 개혁하여 귀족과 상민(常民)의 차별 없이 세금을 징수했으며, 조세(租稅)의 운반과정에서 조작되는 지방관들의 부정을 뿌리뽑기 위해 사창(社倉)을 세움으로써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 국민들의 생활이 다소 안정되고 국고(國庫)도 충실해졌다.
반면, 경복궁(景福宮)을 중건(重建)하면서 원납전(願納錢)을 발행하여 백성의 생활고가 가중되었으며, 1866년(고종 3) 병인양요에 이어 1871년 신미양요를 일으키고 천주교도에 대한 무자비한 박해를 가하는 등 쇄국정치를 고집함으로써, 국제관계가 악화되고 외래문명의 흡수가 늦어지게 되었다. 또한, 섭정 10년 동안 반대세력이 형성되어, 며느리인 명성황후가 반대파를 포섭하고 고종이 친정(親政)을 계획하게 되자, 1873년 그의 실정(失政)에 대한 최익현(崔益鉉)의 탄핵을 받았다. 이에 고종이 친정을 선포하자 운현궁(雲峴宮)으로 은퇴하였다.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으로 다시 정권을 잡고 난의 뒷수습에 힘썼으나, 명성황후의 책동으로 청(淸)나라 군사가 출동하고 톈진[天津]에 연행되어 바오딩부[保定府]에 4년간 유폐되었다.
1885년 귀국하여 운현궁에 칩거하면서 재기의 기회를 노리던 중 1887년 청나라의 위안스카이[袁世凱]와 결탁하여 고종을 폐위시키고 장남 재황(載晃)을 옹립하여 재집권하려다가 실패하였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으로 청일전쟁(淸日戰爭)이 일어나자 일본에 의해 영립되어 친청파(親淸派)인 사대당(事大黨)을 축출하고 갑오개혁이 시작되었으나, 집정(執政)이 어렵게 되자 청나라와 통모(通謀)하다가 쫓겨났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의 세력이 강성해졌으나, 3국(독일 ·프랑스 ·러시아)의 간섭으로 친러파가 등장하여 민씨 일파가 득세하자, 1895년 일본의 책략으로 다시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때 명성황후가 일본인에게 시해되어 일본 공사 미우라고로[三浦梧樓]가 본국으로 소환된 후 정권을 내놓고 은퇴하였다. 1907년(광무 11) 대원왕(大院王)에 추봉(追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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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성황후 관련 추가자료 링크 >
1. KBS : 특별기획 드라마 "명성황후"
http://www.kbs.co.kr/drama/myungsung/index.html
공영방송기관으로서 사료를 일목요연하게 잘 정리해 놓았습니다.
2. 개인의 역사자료 홈피중 하나 : 송성표씨의 한일역사 자료관
http://www.ko2ja.co.kr/japan_history/list.asp?cgrCode=6C
개인자료관리긴 하나, 한일간 역사자료를 비교적 깊이있게 잘 정리해 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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