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도(間島)
백두산 북쪽의 옛 만주 일대, 지금의 중국 둥베이〔東北〕 지린성〔吉林省〕 동쪽 끝에 있는 옌볜〔延邊〕조선족자치주에 거의 해당되는 지역을 가리키는 호칭. 한국에서 간도라고 하는 이 지역을 중국에서는 옌지다오〔延吉道〕라고 한다. 이 지역 곧 두만강 북쪽을 북간도(또는 동간도)라고 칭하고, 백두산 서쪽의 압록강 하류유역, 즉 지금의 지린성 창바이〔長白〕 조선족자치현에 해당되는 곳을 서간도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일반적으로 간도지방이라고 하면 북간도(동간도)를 가리킨다. 간도(間島)라는 지명은 이 지역이 청(淸)나라의 발상지에 가까워 청나라 왕조가 봉금(封禁)의 땅, 즉 이주를 금하는 무인지대로 삼았으므로,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있는 섬과 같은 땅이라 해서 붙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또 간도(墾島)·간도(艮島)라고도 적었는데, 앞의 것은 조선 후기에 조선 농민이 개간한 땅이라는 뜻에서 비롯되었고, 뒤의 것은 조선의 정북과 정동 사이에 자리잡은 방향인 간방(艮方)에 있는 땅이라 해서 붙인 이름이다. 지형은 남서쪽에 백두산(2,744 m)을 주봉으로 하는 창바이산맥[長白山脈]이 달리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북한과의 국경으로 두만강이 흐르고, 북쪽과 서쪽으로는 다리링[大麗嶺]·라오예링[老爺嶺]·장광차이링[張廣才嶺] 등의 산맥으로 둘러싸여 있다. 기후는 전형적인 대륙성 기후로 10월 중순~5월 초순까지 강설과 결빙이 계속된다. 오늘날 중국의 소수민족정책에 의하여 지린성에는, 거의 북간도에 해당되는 지역에 연변조선족자치주(延邊朝鮮族自治州)가 설치되어 있고, 압록강측의 서간도에 해당되는 지역에는 장백조선족자치현(長白朝鮮族自治縣)이 설치되어 있는데, 이 두 지역을 비롯한 지린성에는 104만(1982)의 한국인이 거주하고 있다. 연변조선족자치주인구의 과반수를 넘는 이들은 조선족 특유의 생활·풍습과 민족문화를 유지하고 있다.
<역사>
원래 간도는 읍루와 옥저의 땅이었고, 고구려가 강성해지면서 고구려 영토가 되었으며, 발해도 이곳을 영토로 삼았다. 고려 때와 조선 전기에 걸쳐서는 여진족이 각지에 흩어져 살았다. 그후 조선 후기 숙종 38년(1712)에는 백두산 분수령에 정계비(定界碑)가 세워졌으며, 철종 말·고종 초부터 한국인의 개간과 이주가 시작되었다. 특히 1869년 무렵 함경도 지방의 대흉년으로 많은 사람들이 두만강과 압록강을 넘어 간도지방으로 들어갔다. 본래 간도지방은 청나라 왕조의 발상지에 가까워 봉금지역으로 정하여 만주족 이외의 입식(入植)을 금지하였다. 그러나 국경을 넘어 이주한 조선인에 의해서 개간이 진척되어, 1882년 청나라 정부가 한인(漢人)에게 개간을 공인해 주었을 때는 이미 많은 땅이 개간된 뒤였다. 그 후 청나라와 조선 사이에 국경분쟁이 일어나 양국간의 간도지방 국경문제는 미확정이었으나, 조선의 외교권을 쥐게 된 일본은 1909년 간도협약으로 만주에서의 이권을 얻는 대가로 조선으로 하여금 청나라가 주장하는 국경을 인정하도록 강요하였다. 이 무렵인 1910년을 전후하여 일제침략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고자 하거나, 또는 항일운동의 새로운 기지를 찾아서 간도로 이주한 한국인이 급증하였는데, 이때(1910년 9월∼1911년 12월) 간도로 간 사람은 2만 5000여명이나 되었다. 또 일제의 이른바 토지조사사업으로 농토를 빼앗긴 조선 농민들의 이주가 계속되어 1926년에는 간도지방의 조선인 호수는 5만 2881호(중국인 호수는 9912호)였고, 농토는 전체의 52%를 소유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일본의 한국지배에 저항하는 사람들이 많이 건너간 간도는 한국민족의 항일독립운동과 투쟁의 기지가 되었다. 많은 민족운동가가 이곳을 거점으로 삼아 1910년대의 의병투쟁, 20년대의 항일독립군 등으로 일관해서 무장항쟁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만주사변(1931)을 전후한 시기에는 간도의 한국인은 일본의 침략주의와 중국 관헌의 대항 사이에 끼어, 예를 들면 만보산사건(萬寶山事件)과 같은 복잡한 고난을 체험하기도 하였으며, 일본의 괴뢰정권인 만주국이 수립되자 항일투쟁이 일시 중단되기도 하였다. 제2차세계대전에서 일본이 무조건항복을 한 1945년 8월에는 중공군이 간도지역을 점령하였으며, 1949년의 중공정부 수립 후 52년에 연변조선족자치구, 55년에 자치주가 되어 조선족의 민족자치가 인정되었다.
<간도에서의 항일독립운동>
<기지 건설>1910년 무렵에는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여 간도에 독립운동의 기지를 건설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히 전개된 결과, 서간도에서는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에 독립운동 기지가 건설되었고, 북간도에서는 명동촌(明東村)과 왕청현(汪淸縣)의 나자구(羅子溝)에 독립운동을 위한 기지가 세워졌다. 삼원보에는 일제의 한국강점 직후 이곳으로 이주한 항일 민족지도자들이 경학사(耕學社)라는 항일단체를 조직하고 군사교육기관으로 신흥강습소를 설치하여 서간도 지역의 대표적인 독립운동 기지로 발전시켰다. 명동촌에는 명동학교를 비롯한 여러 교육기관을 설립하는 한편으로 청장년의 독립군 편성을 비밀리에 추진하였다. 나자구에는 무관학교가 설립되어 약 1년간 독립군을 양성하기도 하였다. 또 소련과 만주 국경지대의 미산〔密山〕에는 신민회가 세운 무관학교에서 1500명 가량의 한국교포청년이 훈련받으며 독립전쟁에 대비했다.
<독립투쟁의 전개> 한국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났을 무렵 간도지역의 독립운동 단체들은 무장세력을 보유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하였다. 평화적인 시위였던 3·1운동의 한계를 느낀 한민족 사이에서는 간도 지역을 중심으로 한 무장투쟁론이 대두되었고, 당시 만주에 거주하던 모든 교포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으며 여러 독립운동 단체들을 중심으로 하여 독립군을 편성하였다. 1919년부터 잇달아 편성된 독립군 부대들은 만주 현지에 거류하던 일본인들에게 큰 위협이 되었으며, 1919년과 20년의 2년 동안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어 한국 국내에 침투하여 일본군 국경수비대를 교란시키는 무장투쟁을 벌였다. 그러자 조선에 주둔한 일본군은 독립군을 조기에 제거하려고 1920년 10월에 조선에 주둔해 있던 2개 연대의 병력과 시베리아 주둔의 병력 일부를 동원하여 이른바 간도출병을 하였다. 이에 따라 간도지역인 지린성과 옌지다오 일원에서 독립군과 일본군 사이에 일대 접전이 벌어졌다. 그 대표적인 싸움이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대첩이었는데, 이 두 전투에서 독립군은 크게 승리하였다. 봉오동전투는 홍범도(洪範圖)·최진동(崔振東) 등이 지휘하는 독립군이 일본군 1개 대대를 봉오동으로 유인, 기습하여 157명의 전사자와 300여명의 전상자를 내게 한 전투였고, 청산리대첩은 김좌진(金佐鎭) 등이 지휘하는 북로군정서와 홍범도가 통솔한 대한독립군 등이 청산리에서 일본군과 10여 차례의 교전을 벌여 연대장을 포함한 적군 1200명을 사살한 승전이었다. 이러한 전투에서 독립군의 피해는 매우 적었다. 독립군이 만주의 동포들이 전적으로 지원해 준 인적·물적 자원으로 이 대규모의 독립전쟁에서 크게 승리함으로써 간도지역의 동포를 비롯한 재만교포와 모든 한민족에게 독립투쟁을 통하여 일제를 물리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하였다. 패전한 일본군은 간도지역에 군대를 대거 출동시켜 독립군을 섬멸하고자 했으나, 주력부대는 이미 소만국경지대의 미산으로 이동한 뒤였으므로, 무고한 재만 한국인을 살상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미산으로 이동한 독립군은 이곳에서 약 3500명 병력의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고, 1921년에 소만국경 하천인 우수리강을 넘어 이만으로 옮겨 갔으며, 알렉세브스크에서 자유시참변을 겪은 뒤, 1922년 말 무렵부터 다시 간도지역으로 복귀하여 효과적인 대일항쟁을 위하여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만주지역이 일제의 완전지배하에 들어간 1933년에 한국독립군은 활동을 중지하였고, 끈질긴 투쟁을 하던 조선혁명군도 38년 해체되었다.
<현황>
간도지역에는 1930년대에 조선족이 인구의 80%를 차지했으며, 현재도 연변조선족자치주 인구의 과반수인 100만 명 정도가 살고 있다. 행정중심지는 옌지〔延吉〕시이며, 그밖에 투먼〔圖門〕와 옌지·왕칭〔汪淸〕·훈춘〔琿春〕·허룽〔和龍〕·안투〔安圖〕·둔화〔敦化〕의 6현(縣)이 있고, 압록강 쪽에 장백조선족자치현이 있다. 주민의 대부분은 농업과 목축업에 종사하며, 임업이 활발하여 옌지시[延吉市]에서는 훈춘재[琿春材]·젠다오재[間島材]라고 하는 목재를 산출한다. 옌지 분지는 한민족이 최초로 벼를 이식한 곳으로 수도작(水稻作)이 이루어지며, 그 밖에 콩·수수·옥수수·보리 등도 재배된다. 광물자원은 석탄·유모혈암(油母頁岩)·구리·납 등의 매장량이 풍부하며, 룽징[龍井]에는 제강, 라오터우거우[老頭溝]·허룽[和龍]에는 탄광, 톈바오산[天寶山]에는 구리·납 광산이 있다. 한편 분지와 계곡은 관개시설이 잘 갖추어져 젠다오미〔間島米〕의 산지이며, 수수·콩·담배와 인삼·녹용 등의 한방약재, 목재 등이 많이 난다. 탄광의 개발과 철강·기계·금속·방적 및 제지업이 성행하고 민족색이 짙은 도자기, 조선비단을 생산한다. 또 연변대학 등 조선족 특색을 살린 교육·문화시설이 있다.
<간도문제>
19세기 후반에 우리 겨레의 이주민이 늘어 그 곳에서 새로운 생활 터전을 꾸미자, 청나라는 간도 개간 사업을 벌인다는 구실로 우리 조정에 한민족 철수를 요구하여 간도 귀속 문제가 일어났다. 이에 조정에서는 이중하를 보내어, 백두산 정계비의 비문에 경계로 되어 있는 토문강은 송화강 상류이므로 간도가 우리 영토임에 틀림없다고 주장하고, 어윤중을 서북 경략사로 삼아 이에 대처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청나라는 토문강을 두만강이라고 우겨 회담을 결렬시키면서 간도의 소유권을 계속 주장했다. 그 뒤 러시아가 간도를 점령하자, 정부에서는 이범윤을 간도 관리사로 보내어 간도를 함경도의 행정 구역으로 포함시켜 관리하게 하는 한편, 포병을 기르고 조세를 받아 간도가 우리 영토임을 재확인하였다. 그러나 을사조약으로 우리의 외교권을 빼앗은 일본은 처음에는 간도를 우리 땅으로 인정하여 자기들이 관리한다고 하며 간도 파출소를 두더니, 1909년(융희 3년)에 간도 협약을 맺고 만주(중국 동북 지방)에 안봉선을 건설하는 권리를 얻어 내는 대가로 간도를 청나라에 넘겨 주고 말았다
가져온 곳: [나노식품/나노푸드 (Nanofood)]  글쓴이: Truescience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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