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인물 100人·71] '梨花人' 외길 서은숙 선생
"어린이는 하나의 인격체… 놀이가 곧 배움" 유치원 교육 첫 발 내딛다
윤문영 기자 / 발행일 2007-03-21 제0면
'이화의 딸이셨고 그 한평생을 이화 동산에 바치셨습니다'.
1979년부터 90년까지 이화여대 총장을 지낸 김옥길 박사는 우리나라 유치원 교육의 선구자인 서은숙(徐恩淑·1900~1977) 선생을 이렇게 표현했다.
어린 시절을 제외한 선생 삶의 60여 년은 이화학당, 이화여자대학교와 이어져 있다. 지난 14일 서은숙 선생의 '이화인'으로서의 숨결을 직접 느끼기 위해 서울 신촌 이화여자대학교를 찾았다. 학교에 대한 오랜 기록을 담고 있는 역사자료관을 찾았다. 1층 행정실에서 담당 직원에게 서은숙 선생에 대한 기록을 찾기 위해 왔다고 이름 석자만 댔을 뿐인데 총장서리, 이사장이었다는 대답이 대뜸 나왔다.
자료관에는 그에 대한 경력사항과 함께 이대학보나 다른 신문, 잡지 상에 나온 기록 복사본이 남겨져 있었다. 다른 기록을 찾아보기 위해 다시 이대학보사에 연락을 했다. 여기에서도 서은숙에 대한 경력은 쉽게 나올 정도로 그와 이대의 인연은 깊은듯 했다.
그런 그를 인천의 인물로 내세울 수 있는 것은 그가 배움과 첫 인연을 맺은 곳이 바로 인천, 영화학교라는 점이다. 이곳을 발판으로 그는 여성의 최고 교육기관인 이화학당으로 인생 진로를 결정짓게 되며 당시 신여성을 대표하는 인물로 커간 것이다.
이는 1937년 1월 인천에서 나온 잡지 '월미' 창간호 '대(大)인천의 인물은 누구 누구?'란 제목의 글에서도 엿볼 수 있다. 글쓴이 임하삼은 '조선 여성의 최고교육기관인 이화전문학교의 부교장으로 그 뇌명(雷名)이 천하에 떨치고 있는 김활란씨가 인천 출신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이가 있을 것이요. 같은 교문 내에 이화보육학감으로 계신 서은숙씨도 역시 여성 인천의 대표적 선진이시다'라고 했다. 여성 교육이 크게 제약받던 시절이었지만 당시 인천사람들은 지역을 대표하는 여성으로 김활란에 이어 서은숙을 꼽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1900년 12월19일 인천 율목동의 한 농가에서 그는 6남매의 다섯째로 태어났다. 선생은 몸에 커다란 반점이 있어, 집안 식구들이 '점순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호적 상에도 그 발음이 비슷한 '정순'이라고 올렸단다. 학교에서도 그는 점순이라는 애칭으로 불렸지만, 1933년 7월 호적 정정을 통해 '은숙'이라고 개명을 했다. 학창시절의 별명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선생이 태어난 시기는 일본과 미국 등 외세가 몰려오던 때로 당시에 선교사들도 인천의 제물포를 통해 들어오며 기독교라는 새로운 종교가 소개되기 시작했다. 여느 집과 같이 그의 집안도 이를 예수쟁이라 배척했지만, 서씨가 6살 때 어머니가 서양 선교사의 기도를 받고 기적적으로 병이 낫게 된 뒤 가족들이 기독교에 대한 믿음을 갖기 시작했다.
마침 초등과(초등학교)에 들어갈 나이대에 있던 그는 선교사의 추천을 통해 1909년 영화여학교에 입학, 큰 언니의 지원을 받으며 집안 내에서 유일하게 신교육을 받게 됐다. 영화여학교에서 우수한 성적을 유지했던 선생은 1913년 이화학당 고등과에 입학, 인천을 떠나 서울 정동에서 기숙사 생활을 하며 지내게 됐다.
선생이 평소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라고 꼽던 김활란 선생을 이곳에서 만나게 됐다. 한살 차이 밖에 나지 않았지만 이미 대학과 과정을 밟아 학년으로는 5년이나 위였던 김활란은 기숙사 방의 우두머리를 맡고 있었다. 그는 서은숙에게 기하학을 가르치기도 했고, 인생의 고민도 상담해 줬다. 선배이자 스승이었던 것이다.
선생이 당시만 해도 드물게 독신을 고집했던 것도 김활란이 "결혼과 직업을 병행하는 것은 어려우니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좋다"라고 한 조언의 영향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공부에 매진하다 시기를 놓쳤기 때문이란 얘기도 있다.
후에 서은숙이 학교의 회계과장직, 보육학교 학감 등의 행정사무를 도맡고 외국에서 유학을 하게 되는 과정 등 전반에 김활란의 영향은 막대했다. 하지만 김활란이 사안의 전면에 나서서 일을 처리하는 활달한 성격이었던 반면, 서은숙은 김활란의 일을 보조하는 역할을 맡는 등 자신이 직접 외부에 나서지 않는 편이라 일부에서는 중요한 일에서는 뒷전으로 빠지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도 있었다고 한다.
서은숙은 몸집이 왜소했고, 허약했다고 한다. 중등과에 재학중이던 1919년 3·1운동 당시 선·후배들이 만세운동으로 검거되고 있을 때도 그는 학교 안에서 창으로 쳐다보고 있는 것이 전부였을 정도였단다. 자신의 방관이 끝내 견디기 힘든 자책감으로 남았는지, 1966년 4월 이대학보에 그는 "김활란 선배가 '너는 몸이 약해 나가면 밟혀 죽는다'고 말려서 나가지 못했는데 그것이 어찌나 원통하던지 하루종일 앉아 울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1919년 이화학당 고등과를 졸업, 대학과에 입학한 뒤 그는 이화학교 부속의 유치원 사범과 과장인 밴플리트 등을 도우면서 유치원 교육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다. 1923년 대학과를 졸업한 뒤 바로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의 교사로 교육계에 발을 들여 놓은 뒤에도 그의 학구열은 멈추지 않고 당시에는 드물게 여성으로서 해외유학을 떠나게 됐다.
그는 1928년에 미국으로 떠나 오하이오주 신시내티 사범대학과 컬럼비아 사범대학 대학원을 졸업한 뒤 이화보육학교 학감을 맡았다. 1939년 도쿄문리과 대학에서 아동교육과 심리학을 연구하며 당시에 국내에선 간과됐던 유아교육에 대한 전문성을 키웠다. 우리나라 유치원 교육을 개척, 발전시킨 것으로 평가되는 '서은숙'은 이렇게 태어난 것이다.
그는 어린이를 하나의 인격체로 보며 어린이 중심의 교육을 유난히 강조했다.
1933년 잡지 '신동아'에서도 "어린이는 물이나 점토와도 같아 네모난 그릇에 담으면 네모가 되고 둥근 그릇에 담으면 둥근모양이 되는데 그 담는 그릇의 모양은 바로 어른이 결정하는 것"이라며 "어린이에게 명령조의 말보다는 의견을 주는 언어를 쓰며 신용할만한 부모가 돼라"고 강조했다. 특히 그는 '어린이의 일은 장난, 즉 노는 것이고 사회의 첫걸음이 되는 유치원은 자유롭게 노는 곳'이라며 놀이를 통해 자연스럽게 배움을 갖게 된다는 신념을 가졌다.
1937년 잡지 '여성'에서 "인형놀이를 통해 가정에 대한 애착심과 가족 구성원의 직무를 배우고, 모래장난을 통해 무엇이든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배울 수 있다"며 장난감 자체에 학습의 의미를 설명했다.
서씨는 1965년에는 6개월간 이화여자대학교 제8대 총장서리를 맡았으며, 1970년 김활란이 죽자 후임으로 학교법인 이화학당 이사장직을 지내기도 했다. 노년엔 당뇨를 오랜기간 앓다 1977년 7월2일 세상을 떠났다.
<윤문영기자·moono7@kyeongin.com>
출처 : www.kyeongin.com/main/view.php?key=322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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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인물 100人 ·71] ■ 영화학당은
최초 근대식 초등교육기관 졸업 후 이화학당 입학 많아 김활란·김영의 등 인재 배출
경인일보 / 발행일 2007-03-21 제0면
현재 인천 동구 창영동에 위치한 인천 영화초등학교의 역사는 지난 1892년 영화학당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초등교육기관으로 23세에 이화학당에서 음악을 가르쳤던 마거릿 벤젤이 인천에 내려와 제물포 교회 존스 목사와 결혼한 뒤 여자 아이 한 명을 데려다 키우면서 영화학당이 시작됐다. 1892년 8월 사립학교로 영화학교가 탄생, 교육에서 배제돼온 여자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육기관으로 출발했다.
대부분 기독교 집안의 자녀들이 입학했고, 졸업후에는 선교사 추천과 시험 등을 통해 서울 정동에 있던 이화학당의 보통과, 고등과, 중등과, 대학과로 들어가는 수순이었다. 당시에는 여학생만을 받는 학교가 드물었기 때문이다.
이화학당의 대학과 제1세대로 불리는 김활란, 서은숙, 김애마, 김영의 모두 인천 영화여학교 출신으로 이들은 이화여자대학교의 역사에서도 굵직한 발자취를 남겨왔다. 우선, 김활란은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따고 1945년 이화여자대학교의 총장을 맡고 1960년께는 명예총장, 이사장직 등을 역임하며 이화 10년 발전 계획을 수립해 학교내 동상으로도 세워져 있다.
서은숙과 함께 우리나라 유치원 교육의 선구자로 꼽히는 김애마도 이화여대 사범대학 학장을 맡았다. 김영의는 피아노를 전공해 이화여대 음악대학 학장, 이사장 등을 역임했다. 학교내에 그의 이름을 딴 '김영의 홀'이 있어 각종 공연이 열리고 있다.
현재 영화초등학교에는 이들에 대한 학적부는 찾을 수 없지만, 이들은 '영화를 빛내는 자랑의 선배들'로 꼽히고 있다.
출처 : www.kyeongin.com/main/view.php?key=322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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