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인물 100人·68]독립유공자 송암 유경근
시련에 굴하지 않는 愛國인생 목숨 바쳐 항일투쟁… 사재털어 교육운동…
정진오 기자 / 발행일 2007-02-21 제0면
>68< 독립유공자 송암 유경근
송암(松菴) 유경근(劉景根·1877~1957)은 '독립유공자'란 하나의 표현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인물이다. 독립을 위해 모든 것을 던지기도 했으나, 지역의 민족정신 함양에 힘쓴 교육운동가이자 기독교를 온몸으로 받아들인 종교인도 되기 때문이다.
1919년 고종의 아들을 적통으로 내세운 해외 망명정부를 조직, 강력한 독립투쟁을 전개하려 했던 '대동단(大同團) 사건'의 주역 중 한 명으로, 또 사재를 털어 학교를 설립해 나라 잃은 어린 동량들에게 민족혼을 불어넣은 교육자로, 자신의 집을 교회당으로 개조한 헌신적 종교인으로 한평생 고난의 길을 걸었던 그다.
그러나 고향이자 활동 근거지였던 인천에서 그의 흔적을 찾기란 여간 힘든 게 아니다. 지역이 나서서 쓴 제대로 된 역사기록도 없고, 변변한 기념관 하나 없다. 후손마저 흐릿한 기억만 간직하고 있을 뿐이다.
그의 숨결이라도 느낄 수 있을까 싶어 설 연휴 마지막 날인 지난 19일 고향 강화를 찾았다.
오전 11시 강화대교를 넘자마자 차 머리를 오른 쪽으로 돌렸다. 해안도로를 10여 분 달리자 군 검문소가 나왔다. 강화 월곶리 303 유경근의 생가 터 바로 코앞이었다. 수소문해 그의 인척을 찾았다.
동네 입구에 '독립 유공자의 집'이 있었다. 선생의 손자와는 사촌뻘이 되는 유목열(68)씨 집이었다. 유씨의 부인 고정자(65)씨가 나왔다. 유경근 선생을 취재하기 위해 왔다고 하자 반갑게 맞았다. 생가 터도, 묘소도 직접 안내해 줬다. 검문소에서 가던 길로 5분여를 더 달리자 길가에 잘 단장된 묘역이 눈에 띄었다. 위엄있게 꾸며진 조상 묘 밑자락에 그가 부인 김마리아와 나란히 누워 있었다.
'독립지사 강릉유공경근 지묘(獨立志士 江陵劉公景根 之墓)'. 뒷면의 묘비명은 짤막했지만 그의 역사적 무게를 느끼기엔 충분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강화군 개풍군에 보창학교(광명학교의 잘못으로 보임)를 설립하시고, 동교 교장으로 재직하시면서 후세에게 민족사상을 교육하시었고, 1919년 3·1운동에는 강화 및 김포의 지휘관으로 만세운동을 주도하던 중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시다가 병으로 보석되어, 1920년 미국 의원단의 내한을 계기로 광복단 군영 특파결사단의 활동을 돕기 위해 무기를 서울 내자동(內資洞) 자가에 은닉하시는 등 활동을 하시었고, 그 후 노령(러시아) 해삼위로 망명하시어 이동휘 선생이 운영하는 군관학교에 사재를 헌납하고, 국내에서 군자금 모금과 지원병을 모집하시어 해삼위로 보내시다가 피체돼 3년 반의 형을 받고 복역하시었습니다…'.
1988년 정부가 세운 이 묘비만 봐도 유경근이 인천지역 독립·교육 운동사에서 얼마나 중요한 위치인지 가늠할 수 있게 한다. 정부는 뒤늦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이런 선생의 업적을 기려야 할 지역은 그러나 선생의 업적을 철저히 외면하고 있다. 인천시나 강화군 등 지방자치단체는 유경근 선생과 관련한 연구결과물을 내놓지 못하고 있고, 근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그가 세운 광명학교나 잠두교회 분회 터를 알리는 기본적 알림판도 세워 두지 않았다. 오죽하면 생가 터가 어디인지도 모를 지경이 됐는지 안타까울 뿐이다.
묘지를 안내하던 고씨가 갑자기 손수건을 꺼냈다. 선생의 며느리 등 가족이 어렵게 살아간 기억이 떠올라 눈시울이 뜨거워진 것이었다.
"결혼해서 왔는데, 후손들이 그렇게 심하게 고생할 수가 없었어요. 거지도 그런 거지가 없을 정도였지요. 식구들은 영양실조로 여기저기 안 아픈 곳이 없었고요."
고씨는 선생이 자식들에게는 특별한 재산을 남겨 주지 않아서 그렇게 힘든 생활을 이어가야 했다고 했다.
이런 고씨의 얘기는 손자 부열(61)씨에 따르면 더 확연해진다.
부열씨는 공교롭게도 할아버지처럼 교육자의 길을 가고 있다. 그는 경기도 안산의 고잔고등학교 교장으로 있다.
그가 말하는 어머니 전종임 여사의 삶은 모든 것을 바친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이 독립 이후 처절한 극빈자의 생활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비뚤어진 역사현실을 그대로 드러낸다.
"강화도 만석꾼 전씨 집안의 맏딸인 어머니는 생전에 '얘야 나는 속아서 시집왔다'는 말을 하실 정도로 고생이 많으셨어요. 시집오니 독에 쌀이 하나도 없었다는 것이에요. 머리에 비누를 이고 이 동네 저 동네를 다니시면서 장사도 하셨어요. 외가댁에서 얼마나 안쓰럽게 생각했으면 딸네 집에 땔감을 보낸다고 하면서 그 속에 남모르게 쌀을 넣어주곤 했겠습니까. 물론 아버님은 번듯한 직업도 없으셨어요.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민족교육운동을 펼치셨던 할아버지는 당신의 아들을 출세의 길로 인도하지 못한 겁니다. 아니 일제에 굽히지 않았던 탓으로 생각합니다."
유경근은 끝까지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던 강화의 2대 인물 중 한 명이라고 한다. 얼마나 항일정신이 투철했던지 집이나 학교의 문을 조선총독부가 있는 동쪽으로도, 일본 땅이 있는 남쪽으로도 내지 않았다는 것이다. 찬바람 부는 북쪽으로 문을 냈다고 한다. 물론 집안에는 게다와 같은 일본식 물건이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유경근의 이름은 건국대 신복룡 교수가 쓴 '대동단실기(大同團實記)'의 곳곳에 등장하고, 경기도교육위원회가 1975년 발행한 '경기교육사', 독립유공자사업기금운용위원회가 1976년 발행한 '독립운동사(제8권 문화투쟁사)'에서 언급된다.
3·1 운동 직후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대동단'. 대동단은 1919년 3월 조직된 비밀 독립운동 단체다. 고종의 다섯째 아들 의친왕 이강(1877~1955)을 상하이로 피신시켜 해외 망명정부를 세움으로써 일본에 빼앗긴 국가의 적통을 잇게 하려 한 사건으로 유명하다. 유경근은 이 대동단 활동의 중요 인물이었다. 대동단은 크게 11개 지단으로 나눴는데, 유경근은 그 중 군인단의 총대장을 맡았다.
대동실기에 따르면 만주 독립군의 위원 모집은 대동단원에 의해서만 이뤄졌고, 이 일을 모두 유경근이 총괄했다. 당시 그는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 강화도의 교육자로 알려져 있었으며, 본격적인 대동단 활동과 관련해 만주와 블라디보스토크 등 해외파와 두루 교분을 나눴다.
대동실기에서 특히 주목할 부분은 '유경근은 노준, 조규상, 현완준 외 4명의 군인 지망생에게 신의주의 김성일 앞으로 암호로 된 소개장을 써 주어 7월 4~5일경에 이들이 서울 남대문역에서 신의주로 출발할 수 있도록 주선하여 주었다'는 대목이다. 유경근이 조직의 암호를 관장할 만큼 특별한 지위에 있었다는 점이다. 이 암호는 첫 자음을 아라비아 숫자로, 첫 모음을 한문 숫자로 하는 방식(예컨대 '7五'는 '소')으로 표기했다고 한다.
이 일은 결국 실패했고, 관련자는 모두 체포됐다. 일제의 철저한 감시 때문이다. 군인 지망생 중의 하나였던 조규상이 바로 일제의 밀정이었다는 것이다. 일제가 얼마나 독립운동 경계에 매달렸는지 여실히 증명하는 부분이다.
이로 인해 유경근은 1919년 12월 징역 3년을 언도받는다. 일본의 재판기록에 나타난 한가지 흥미로운 점은 유경근의 직업이 광업(鑛業)이란 것이다. 유경근은 금광사업으로 꽤 많은 돈을 벌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돈으로 대동단 활동 이전인 1905년 자신의 집에 광창(光昌)학교를 설립한다. 이 학교는 1906년 7월 보창지교(普昌支校)로 개편하고 1909년 다시 광명(光明)학교로 이름을 바꾼다. 이 때 졸업생 10명을 배출했다고 한다. 그 후 이 학교는 문을 닫았다. 광명학교의 폐교 원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광창학교가 보창지교로 개편한 것은 보창학교의 설립자 이동휘(경인일보 2007년 2월14일자 9면 보도)와 유경근과의 관계가 얼마나 돈독했는지를 말해준다.
유경근은 또 자신의 집을 교회당으로 썼다고 한다. 식구들이 사는 집이자, 한 쪽 공간은 학교이며, 또 다른 공간은 교회였던 것이다.
국내 기독교사의 중요한 지점에 있는 감리교 잠두교회의 분회를 지어 헌납했다고 한다. 교회가 경영난을 겪어 이를 팔았는데 유경근은 다시 이를 사들였다고 한다.
잇단 옥고를 치르며 '요시찰 인물'이 된 그는 일제에 의해 손발이 묶여 아무런 사업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해방 직후 김구 선생과 만나기도 하는 등 독립운동 주요 인사들과 교분을 나누기는 했지만 강화를 크게 벗어난 적은 없었다고 한다.
유경근의 삶은 공백으로 남아 있는 부분이 많다. "할아버지에 대해 잘 알려지지 않은 부분을 어떻게 하면 알 수 있느냐"는 고정자씨의 말은 정부나 연구자 모두 되새겨야 할 대목이다. 과거사 연구는 때를 놓치면 안 되기 때문이다.
<정진오기자·schild@kyeongin.com>
출처 : www.kyeongin.com/main/view.php?key=319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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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인물 100人·68] 인터뷰/ 유경근 선생 손자 부열씨
정진오 기자 / 발행일 2007-02-21 제1면
지난 16일 경기도 안산 고잔고등학교 교장실에서 마주한 유경근 선생의 손자 부열(61)씨는 할아버지와 관련한 몇 가지 자료를 내놓았다. 그러면서 그는 퇴직 후엔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책으로 낼 계획이라고 했다. 자신이 선생의 손자라는 자부심이 대단했다.
"일제 때 일본 상인들이 발붙이지 못한 곳이 개성과 수원, 그리고 강화라고 합니다. 강화에 일본상권이 들어오지 못한 것이 할아버지의 영향력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초등학교 5학년 때까지 할아버지를 곁에서 보아 온 부열씨는 선생의 등에 난 혹독한 고문 흔적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고 했다. "할아버지 돌아가시자 상여 행렬이 10리나 됐어요. 그런데 이젠 할아버지를 기억하고, 기릴 수 있는 것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는 할아버지의 행적 중 아직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은 많은 부분이 채워지길 기대하고 있다. 후세가 본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선생의 생애 연구가 받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우선 가족들이 나서 선생의 뜻을 기리기로 했다.
"할아버지가 독립유공자로 서훈된 이후 어머니가 생전에 약간의 연금을 받으셨어요. 어머니는 그 돈을 한푼도 쓰지 않고 남기셨습니다. 좋은 일에 쓰라고 말이예요."
부열씨를 비롯한 형제들은 이 돈으로 장학사업 등 할아버지의 유지를 잘 받들 수 있는 일을 펼치겠다는 각오다.
<정진오기자·schild@kyeongin.com>
출처 : www.kyeongin.com/main/view.php?key=319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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