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인물 100人·67]민족운동가 이동휘
60년만에 지워진 '주홍글씨' 사회주의 노선서 독립을 외치다
임승재 기자 / 발행일 2007-02-14 제0면
>67< 민족운동가 이동휘
일요일인 지난 11일 냉전과 분단의 그늘에서 깊이 잠들어 있던 한 독립운동가의 흔적을 찾아 나섰다. 이동휘(李東輝·1873~1935).
일제에 맞서 평생을 독립운동에 바쳤지만 '사회주의 계열'이라는 이유로 역사에서 과소 평가돼 왔던 인물이다. 대한자강회를 설립하고 상해임시정부의 국무총리까지 지냈음에도 최초의 한인 사회주의 단체였던 '한인사회당'과 '고려공산당(상해파)'을 조직했던 경력이 문제였다.
그래도 '역사는 진실을 외면하지 않는다'고 했던가.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에게 첫 유공 훈장이 수여됐다. 광복 50주년을 맞은 지난 1995년의 일이다. 이 때까지 이동휘는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한 수많은 순국지사들과 함께 역사의 뒤편에 서 있어야 했다.
동휘의 숨결은 인천의 교회 역사와 처음부터 함께 한 강화중앙교회에서 느낄 수 있다. 100년이 넘는 오래된 역사를 자랑하는 곳이기도 하다. 인천 기독교 전파의 산파역할을 맡았던 그 교세도 여전했다.
중앙 현관에 들어서자 강화중앙교회의 역사가 한눈에 펼쳐졌다. 강화중앙교회의 전신, '잠두교회'를 거쳐 간 목사들의 사진은 물론 각종 역사 자료가 가지런히 진열돼 있다. 거기에 이동휘의 것도 있다. 상해임시정부에 도착한 이승만 전 대통령을 환영하기 위해 찍은 사진 한 장. 이승만, 이동영, 이시영, 안창호, 박은식 등 한국 근대사에서 빠질 수 없는 걸출한 인물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물론 이동휘도 가운데 함께 자리하고 있다.
이동휘를 오랫동안 연구해 온 이은용(53)씨를 만났다. 이씨는 "우연한 계기로 강화중앙교회의 역사를 연구하던 중 독립운동가 이동휘의 종적을 강화의 역사에서 발견하게 됐다"며 "이동휘는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알려진 것처럼 민족계몽운동의 선구자 역할을 하는 한편 적극적인 전도활동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실제로 이동휘는 기독교인으로, 강화도 지역의 근대화와 항일운동의 기반을 닦은 인물로 평가받는다. 1904년 한일의정서 체결과 일제의 황무지개척요구에 맞서 항일 열기가 고조되던 당시 강화의병의 실질적인 수장이기도 했다. 특히 훗날 강화도를 중심으로 설립한 '보창학교(普昌學校)'를 성공적으로 육성하면서 이동휘는 민족교육운동의 선구자로 우뚝 선다.
대한제국 군복을 입고 있는 이동휘의 또다른 사진이 보였다. 강화도와 깊은 인연을 맺게 된 1902년, 강화군 진위대장으로 부임했을 당시의 모습이다.
이동휘는 함경남도 단천(端川)에서 가난한 농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단천 군수의 시중을 드는 통인(通引)으로 일하다 서울로 상경한 이동휘는 1895년 '한성무관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청렴하고 강직한 성품이 눈에 띄어 육군 참령까지 빠르게 진급했다고 한다.
이씨는 "이동휘에 대한 황실의 두터운 신망으로 어린 나이였지만 강화도를 지키는 대대장이 됐다"고 말했다.
당시 강화도는 군사전략의 요충지였다. 평양과 대동강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강화도는 해상교통의 중심지이자 대한제국의 심장부를 지키는 최후의 방어선이었다. 이씨는 "아쉽지만 강화도 진위대장의 직분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며 "일제의 침탈이 계속되자 진위대장의 신분으로 조국을 지켜내지 못했다는 깊은 자괴감이 스스로를 관직에서 물러나게 만들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사실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된 이후 고종에게 보낸 '유고'에서도 국방의 책임을 다하지 못한 죄로 스스로 해임을 간청했던 이동휘였다. 당시 전국에서는 일제를 규탄하는 시위가 벌어졌고, 민영환·조병세·홍만식·송병선 등의 순절도 잇따랐다. 이때 이동휘는 '을사오적(乙巳五賦)'이라 불리는 이완용·이근택·이지용·박제순·권중현을 처단하고 본인도 자결하려고 결심했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동휘는 대표적인 민족계몽운동가로도 불린다.진위대장에서 물러난 뒤 그는 교육활동에 전념한다. 훗날 이종호의 '보성학교', 이준의 '보광학교'와 함께 '근대 교육의 삼보(三寶)'라 불리게 되는 '보창학교'의 전신, '육영학교'를 설립한다. 1905년 3월의 일이다. 이동휘는 강화도에서 학생들을 육성하는 동안 1906년 3월에 설립한 대한자강회에서도 적극적인 민족계몽운동을 펼쳤다고 한다.
보창학교의 교과목은 역사·지리·영어·일어·산술·한문 등 다양했고, 이동휘의 영향으로 상무정신과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군사교육도 있었다고 한다.
당시 육영학교 학생들은 두루마기 위에 비단허리띠를 둘렀다. 허리띠 위에는 오얏꽃 표식을 달았다. 근대식 복장을 갖추고 고종황제와 대한제국에 충성을 나타내기 위한 의미였다.
육영학교는 영친왕의 지시에 따라 교명이 보창학교로 바뀐다. 특히 영친왕이 교명을 친필로 써준 교기는 이동휘의 명성을 한층 높이고, 보창학교의 발전을 이끄는 계기가 됐다. 보창학교는 왕실과 고관들의 후원을 통해 재정적인 기반을 마련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황성신문(1905년 3월 22일자)'은 민영환, 조동윤, 권중현, 민병석 등의 고위 관리들이 육영학교에 거액의 찬성금을 내놓았음을 밝히고 있다.
이씨는 "대한제국에 대한 일제의 반식민지화 과정에서도 보창학교는 꾸준한 성장을 이어갔고, 강화도에서는 수많은 보창학교의 지교들이 설립되고 있었다"며 하지만 "지금은 보창학교의 옛터를 정확히 확인하기 힘들 정도로 그 흔적이 묘연하다"고 말했다. 보창학교의 옛 모습이 담긴 사진을 찾기도 힘든 실정이다.
이동휘는 보창학교를 세우는 과정에서 당시 잠두교회 김우제 전도사를 통해 기독교에 입문하게 된다.
'강화의 바울(Paulus)'. 한국주재 선교사로 활동했던 케이블(E.M.Cable) 목사가 이동휘를 보고 칭한 말이다.
"기독교가 아니면, 상애지심(相愛之心)이 없고, 기독교가 아니면 애국지심(愛國之心)이 없으며, 기독교가 아니면 독립지심(獨立之心)이 없다. 자수자강(自修自强)의 기초가 기독교에 있으며, 충군애국(忠君愛國)의 기초가 기독교에 있으며, 독립단합(獨立團合)의 기초가 기독교에 있다."
을사늑약 체결 이후 이동휘가 쓴 '유고'에 나오는 대목이다. 기독교에 대한 그의 각별한 믿음이 묻어난다.
종교 생활을 하면서 만난 잠두교회의 손승용 목사(경인일보 2006년 12월14일자 14면보도)와의 인연은 이동휘가 세운 보창학교의 발전 배경에서 중요한 부분이기도 하다. 손 목사는 1903년 영화학당을 근대식 학교로 전환하기 위해 노력했던 인물. 1906년 강화읍으로 건너가 잠두교회 부설 제일합일남학교와 제일합일여학교 등의 교장을 맡기도 했다.
향토사 연구자인 이성진 영화여자정보고등학교 교사는 "다양한 교육활동을 경험했던 손 목사가 보창학교의 내실을 다지는데 지원군 역할을 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많다"고 말했다.
이후 이동휘는 강화도 의병활동에도 깊숙이 개입했다. 1907년 광무황제의 강제 퇴위와 군대 해산으로 대한제국이 식민지화되자 강화도에서 의병활동을 모의한다. 그러나 헤이그밀사 사건에 연관된 혐의로 유배돼 옥고를 치렀다. 같은 해 10월 석방된 이동휘는 '서북학회'를 창립하는데 참여하는 한편 비밀결사 조직이던 '신민회'의 지도자로 항일투쟁을 전개한다. 1913년 이동휘는 러시아 연해주로 이동해 만주와 러시아의 민족운동세력을 규합한 '대한광복군정부'를 조직하고, 이상설에 이어 2대 정도령에 취임하기도 했다.
이동휘는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였다. 1917년 3월 러시아 2월 혁명과 10월 혁명을 접한 이동휘는 볼셰비키세력과의 연대를 통한 항일투쟁을 주장했다. 최초의 한인사회주의 정당 '한인사회당'을 창당한 이동휘는 무장투쟁을 벌인다. 훗날 상해임시정부의 국무총리로 취임한 이동휘는 무장투쟁을 주창했다. 전쟁이 아니고서는 독립을 이룰 수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뜻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그는 결국 1921년 임시정부를 탈퇴한다. 이후 고려공산당과 조선공산당 창당에도 관여하고, 국제공산당에서도 활동했다.
머릿속에 온통 '독립'이란 두 글자밖에 없던 그는 1935년 1월 블라디보스토크의 낯선 동토에서 병사했다.
이씨는 "이동휘의 삶을 굳이 규정하자면 '실천'이라는 표현이 무난할 것 같다"며 "이동휘가 걸어왔던 길을 보다 구체적으로 밝혀내는 것은 한국 근대사의 역사를 바로 세우는 일이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고 말했다.
<임승재기자·isj@kyeongin.com>
출처 : www.kyeongin.com/main/view.php?key=3185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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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인물 100人·67] 연구가 이은용씨가 본 이동휘
'나라 구할 수 있는 방편' 기독교·사회주의 수용해
임승재 기자 / 발행일 2007-02-14 제0면
"이동휘의 종적을 좇다보니 뜨거운 피가 가슴에서 솟구치는 것을 느낍니다."
이은용(53·강화군 농업기술센터 사회지도과장)씨는 "10년 넘게 강화도 기독교 역사를 연구하던 도중 민족의 지도자 중에 걸출한 인물로 손꼽히는 이동휘를 발견하게 됐다"고 회고했다. 그는 이동휘가 '보창학교'를 중심으로 민족계몽운동을 펼쳤던 과정이 고스란히 강화의 역사로 자리잡아 있음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가 말하는 이동휘의 일생은 '기독교', '사회주의', '민족운동'으로 분류된다. 이중에서도 독립운동을 위해 사회주의 노선을 채택했던 과정과 활동에 대한 연구가 보완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씨는 "이동휘는 '나라를 구할 수 있는 방편'으로 기독교와 사회주의를 받아들였을 것"이라며 "그동안 사회주의 활동 경력이 이동휘의 공적을 기리는데 발목을 잡아왔지만 독립운동의 한 과정이었기 때문에 보다 구체적인 접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민족교육운동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이동휘의 보창학교는 강화도 독립운동의 기반이 되었다"며 "특히 보창학교 학생들에게 전술과 제식 등 군사훈련을 시켰다는 것은 민족운동가를 배출하기 위한 이동휘의 숨은 의도"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보창학교를 졸업한 학생 대부분은 의병에 참여하는 등 독립운동가로 활동하게 된다. 특히 훈민정음을 본따 시각장애인을 위해 한글점자 '훈맹정음'을 창안한 박두성 선생도 이 곳을 나왔다.
이씨는 "이동휘의 업적을 국가에서 뒤늦게 인정한 것은 반가운 일이지만 아직도 풀어나가야 할 숙제가 많다"며 "보창학교의 옛터가 강화읍 관청리 지역에 있다고 전해지고 있지만 정확한 위치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이동휘의 흔적을 찾기란 쉽지 않다"고 말했다.
이동휘에게 강화도는 '민족운동의 본거지'임을 부정할 수 없다고 말하는 이씨. 그는 이동휘를 기릴 수 있는 상징적인 의미에서 강화에 동상을 건립하고, 정기적인 학술대회와 추모집회를 여는 것이 꿈이라고 했다.
<임승재기자·isj@kyeongin.com>
출처 : www.kyeongin.com/main/view.php?key=3185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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